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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붓 칠에

세상 울고 웃다

<내가 피카소 할애비다> 저자

- 광대화가 최영준 작가


글, 사진. 장수경 사진제공. 최영준 유랑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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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출 수 없었다. 재치와 강인함, 뜨거운 열정까지. 선글라스와 페도라(fedora, 둥근 챙이 있는 모자)는 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변사(辯士)인 최영준 작가. 그는 변화무쌍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다. 평소에 그는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동그란 안경에 콧수염을 붙인 변사로 나타나면 금세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늘 새로운 시도를 했고 그가 만들어낸 창작물은 그 한계점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극·음악·개그 등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한 최 작가. 이번에는 수묵화에 도전해 책을 출간했다. 그가 걸어온 길, 그리고 걸어가고자 하는 꿈을 들어봤다.

길이 아닌 곳을 걷다
산을 오를 때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까. 당연히 등산로다. 누군가 걸어간 길이고 그래서 걷기 편하다. 하지만 최 작가는 “저는 길이 아닌 곳을 걷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등산로를 이용해서 산 정상에 오르면 ‘정복했다’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사실 얻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면 산에 쉽게 오르지만 그것 또한 스스로 이뤄낸 게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최 작가의 삶과 신념은 늘 길이 아닌 곳으로 향했다. 이는 다른 사람이 따라 걸을 수 없는 길이요, 오직 그만이 걷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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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준 작가의 수묵화 에세이
 



“세상에서 가장 먹기 쉬운 게 있죠. 남이 말린 곶감입니다. 가만히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면 홍시가 있고 그 위에 까치밥인 연시가있죠. 맨 꼭대기 그 위에 감이 하나 더 있는데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성취감’입니다.”

최 작가는 성취감이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따먹기 위해서 항상 높은 사다리를 만들어 톡 따내고야 말았다. 누군가에게 도움받는 것은 그 사람을 따라하는 것이기에, 스스로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창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최영준’다운 것이 만들어졌다. 그는 자신을 ‘자칭 천재’라고 부른다. 그는 철부지 아이처럼 그렇게 믿고 있다.

최 작가가 ‘이 시대의 마지막 변사’라는 닉네임을 갖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남들과는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인하공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했지만 마음속은 늘 연기를 하고 싶었다. 그 꿈을 향해 1년 만에 자퇴하고 국내에서 가장 큰 극단에 들어간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출신을 중시하지 않던가. 선배들은 항상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저는 출신이 없습니다”라며 더욱 당당히 이야기했다. 틀에 매이지 않는, 꿈의나래를 자유로이 펼치는 자신이 좋아서였다. ‘당돌한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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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화가 최영준(제공:최영준 유랑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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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북촌리 마을공연(제공: 최영준 유랑극단)
 


그는 극단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다. 밑바닥에서부터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었고, 극장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연극을 느끼고 싶었다. 덕분에 그의 사고는 남들보다 풍부해졌고 연기에 대해서 빠르게 알아갔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열정을 바치는 것은
삶의 활력을 주는 가장 좋은 처방이다
나는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나는 날마다 다시 시작한다
<습>


몇 번의 극단을 거친 그는 극단을 만들었다. <최영준 유랑극단>! 1인극 모노드라마 연극배우로 인천에서 활동하게 된다. ‘약장수’ ‘팔불출’ 등의 공연은 흥행으로 이어졌고 서울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 우연히 본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비를 털어 신파극무성영화 ‘이수일과 심순애’를 제작해 직접 변사로 활동한다. ‘변사(辯士)’란 무성 영화를 할 때 영화에 맞춰 그 내용을 설명하는 사람을 뜻한다. 태백에서 장승포까지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고, 미국 전역의 교민을 상대로 순회공연도 했다. 이후 개그맨과 라디오 DJ에 몸을 담는다. 작곡가로도 활동 중인 그가 현재까지 저작권 협회에 등록한 곡은 100곡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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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북촌리 마을공연(제공: 최영준 유랑극단)
 



이처럼 그는 남들이 쉽사리 하지 못하는 것에 도전한다. “계란을 던져 바위를 깨는 건 불가능하죠. 하지만 저는 던집니다. 세상이 반응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새로운 콘텐츠를 늘 만들고, 저의 존재 가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성취감을 맛보는 재미가 인간의 존재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 왜 거기서 나와
지난해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온 세계를 휩쓸었다. 이로 인해 문화계는 잠시 ‘멈춤’ 상태가 됐다. 어떻게 본다면 이 시기는 심리적으로 침체될 법할 때였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무언가를 기획하고 있었고, 수묵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그는 인생을 바꿀 기회를 만난다. 깨진 바닥과 오일자국, 자잘한 스크래치. 그 순간 그는 눈을 번뜩였고 “유레카”하고 탄성을 지른다. 눈에 보인 스크래치가 마치 피카소의 그림처럼 보였다. 스크래치는 결국 그의 작품이 되었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같은, 이 시대의 <세한도>를 표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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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준 작가의 수묵화 에세이
 


그런데 <세한도>는 멋스러운 글씨가 함께있지 않은가. 이 시대의 명필가(名筆家)를 만나기 바랐고, 그때 묵개 서상욱 선생과 운명처럼 연이 닿게 된다. 이들의 만남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묵개 선생과 함께 지필묵을 골랐다. 처음이라 서툴지만 최 작가는 그림을 하나씩 그려갔고, 거기에 묵개 선생은 제목을 붙여 그림에 생기를 더했다.

“마치 영혼의 교감이라고 할까요. 글과 그림은 마치 한 사람이 한 듯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두 천재의 만남이었다. 이들은 한달에 두 번씩 만났고, 최 작가는 석 달간 300점의 수묵화를 쉴 틈 없이 그려갔다. 밤을 지새우니 입술이 부르트고 몸무게도 훅 빠졌다. 그리고 1년 후, 그림 112점을 선정해 책, 최영준 수묵화 에세이 <내가 피카소 할애비다>에 담아냈다. 각 작품 옆에는 그가 쓴 짧은 에세이도 담겼다. 함축적이면서도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글은 책의 세련미를 더했다. 그림과 글의 어울림은 때론 철학적이고, 때로는 유쾌했다. 또 팝이 되고, 트로트가 되기도 했다. 책 속의 글과 그림은 자유로이 춤추는 듯했다.
 
오뉴월 무성했던 녹음방초 어디 가고
빈 가지 서글퍼 달빛 아래 홀로 섰네
바람 따라 계절 따라 봄이 오시면
소쩍새 둥지 되어 꽃을 피우리
<나목망월>

그는 왜 새로운 도전으로 그림을 선택한 걸까. 그 이유는 과거 미국에 가서 변사 공연을 했을 때 언어의 장벽을 느껴봤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공연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림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세계인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소장하고 싶거나 선물용이 되도록 디자인했다. 책이라는 갤러리 안에 그림이 담기고, 책 한 장 한 장은 하나의 작품이 되게 한 것이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최 작가에게는 계획이 있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전국을 다니며 ‘북(Book)- 콘서트’를 하는 것이다. 이 자리를 통해 그가 직접 만들어 온 동영상, 음악, 그림 등 최신작을 공개하여 찾아온 이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전할것이다.

“인류가 하지 않은 것,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을 저는 늘 고민합니다. 본능의 힘을 믿고 어떻게 하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낼까 생각합니다.”

그렇다. 이 시대의 마지막 변사이자 광대화가인 최영준을 기억도록 하는 키워드는 자신을 천재라고 믿는 ‘긍정의 힘’ 그리고 자신의 본능 속에서 찾는 창조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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