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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안식처 ‘민족과여성역사관’

“나라가 없으면 국민은

천대 받아요. 그래서 가르칩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 인권운동가 김문숙 회장


글/사진 신정미 사진제공 민족과여성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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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긋지긋한 악몽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다니… 지우개로 지울 수만 있다면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길례야 멀리 가지마라 위험하다’ 으흑흑흑 “엄니이”….

만화가 최신오 씨가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전에 출품한 <70년 동안의 악몽> 끝부분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다. 7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일본군이 괴롭히는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이야기가 그려진 작품이다. 맺힌 한을 풀고 싶어도 풀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을 누가 알아주랴. 일본의 제국주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엔 상처와 깊은 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역사 가르쳐야 한다

“고생한 국민이 불쌍했고,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당했던 억울한 일이 한이 맺혔습니다. 그래서 벌었던 돈을 모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썼습니다. 그렇게 24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일해왔습니다.”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민족과여성역사관’을 찾아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 인권운동가로 일하고 있는 김문숙 회장(89)을 만나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본으로부터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일본에 대한 이해도 전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학교 선생님들만 보면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못살게 한다.” 김 회장은 민족과여성역사관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역사관이라며, 후손들이 역사를 모르고서는 위안부 피해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는다.

그는 역사관에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한 두 시간 정도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김 회장은 “우리가 일본에 속아서 식민지가 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라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아픔이 있었던 것은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며 나라없는 국민은 천대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깨우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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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 부인하는 일본

흔히 사람들이 ‘정신대’나 ‘종군위안부’ 등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대(근로정신대)란 말은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몸을 바친 부대’라는 말로 일제가 강제 연행했음을 부인하는 잘못된 표현이다. 종군위안부 역시 군대를 본인 스스로 따라갔다는 의미로 강제 연행임을 부정하는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잘못된 표현을 통해서도 일본이 일제강점시대에 저질렀던 만행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을 공식화하고 있으나 최근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중국, 동남아 전체를 점령하면서 전쟁으로 흥분된 군인들을 위해 위안소를 설치했다. 일본 술집 여성들은 돈벌이 목적으로 군대를 따라다닌 일이 종종 있었으나 한국 여성들은 일본에 의해 군인들의 성노예로 강제 동원됐다.

이제 시대의 증인이 된 김 회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역사의 퍼즐조각을 하나씩 맞춰가기 시작했다.

“그 시절 우리나라는 가난한 집에서는 아이들을 공부도 안 시키고, 집안일을 돌보게 하거나 남의 집 아이를 봐주며 식모살이를 하게 하는 일이 많았던 시대였다. 총독부는 처녀 있는 집을 조사해서 월급도 많이 주고 공부도 시켜주겠다고 하면서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협박해 딸들을 빼앗아갔고, 그렇게 딸들을 빼앗겨야만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지금 저그들은 ‘조선 처녀들이 중국으로 몸 팔러 왔다’고 강제 연행을 부인하고 있지만 내가 모아 놓은 많은 증거들만 봐도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부산에 사는 하순녀 할머니도 내가 직접 찾아가서 조사를 해봤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이웃집 아이 봐주고 밥 얻어먹고 있는데, 어느 날 일본 놈 하나 한국 놈 하나 둘이 오더니만 ‘일본 공장에 안 갈래? 거기 가면 월급도 많이 주고 학교도 보내주고 얼마나 좋니?’하며 사탕발림을 하니까 그 소릴 듣고 좋아서 그 집 아이 엄마한테 간다온다 말도 안 하고 업고 있던 아이를 마루에 그대로 내려놓고 따라나섰다고 한다. 원래는 전라도 할머닌데 가보니 부산이더래. 그 후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중국 상해 우순로에 있었는데 지금도 거기 가보면 집 전부를 한 칸 한 칸 만들어 놓은 위안소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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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 다닐 때 학교 공부하고 있는데 왜놈들이 쳐들어와서 여학생들을 끌고 가서는 그대로 중국으로 보낸 게 강제로 노동력을 끌고 갔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못했던 거라. 저그가 끌고 가서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며칠 자고 그 다음에는 밤에 군함에 바로 태워가서 중국, 대만, 저 월남으로 다 끌고 가놓고 ‘조선 처녀들이 스스로 중국에 몸 팔러 갔다’고 말한다. 조선 처녀들이 중국이 어딘 줄 알고 스스로 몸팔러 가노. 왜놈들이 우리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하고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게 제일 분한거여.”


여행사 사장, 일본과의 싸움 시작

“한때 여행사 사장을 했어요. 내가 노력해서 버스 20대나 가지고 많은 돈을 벌어서 여행사를 하면서도 국내외에 많은 공헌을 했던 부산에서는 여사장 1호입니다. 그러다가 1990년에 ‘위안부’에 대해 처음 들었어요. 그 해 기생관광이 하도 많아서 윤정옥 선생님하고 김포공항과 김해공항에서 ‘기생관광반대, 일본인은 입국하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었단 말이지. 그때 일본인들이 비웃으면서 ‘너희가 전쟁 때 몸 팔러 다닌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가 돈을 많이 주잖아’라고 말하는 거라. 그래서 위안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딱 덮어놨으니 몰랐어. 1965년 한·일 회담 때도 위안부 ‘위’자도 안 나왔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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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은 아무도 위안부라는 말을 하지 않을 때 <조선인 군대 위안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말로 쓰다가 1991년 일본에서 아가스 서점 스스끼라는 여자 편집장이 일본어로 출판해 일본 전역에 배부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그 책을 부산으로 가져와서 배부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와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명백한 증거에도 사과하지 않는 일본, 미온적인 정부 태도 아쉬워

김 회장이 1992년에 시작해서 6년 동안 일본을 상대로 26차례나 진행했던 시모노세키 재판은 유일하게 승소한 재판이었다. 그 후로 일본은 재판을 받아주지 않고 다 기각했다고 한다. 김 회장에 따르면 많은 세계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소송했지만 서류도 보지 않고 모두 기각해버린 것이다. 그는 시모노세키 재판기록을 <관부 재판의 기록>이라는 책으로 펴내고 400권을 각 도서관에 보냈는데 회신은 딱 한 군데만 왔다고 말한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재판에 이겨서 일본 정부가 1인당 300만 원씩 준다하니 할머니들이 ‘더럽다. 너 해라’하고 안 받았던 역사가 있는데 우리 정부는 ‘재판했냐’ 하는 소리도 안 해요. 그동안 고노 수상이나 무라야마 수상, 미국서 혼다 위원은 일본이 할머니들을 위해 많건 적건 배상금을 주고 사과해야 한다고 했거든. 당연히 일본은 우리나라에 사과해야 하는데 왜놈들은 한 번도 우리에게 사과도 배상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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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을 위기…
열심히 일하면 좋은 나라가 될 거라는 희망으로 살다


김 회장은 1990년 윤정옥 선생과 함께 서울에서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를 시작했지만 서울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힘들어 그 해부터는 부산에서 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위안부 신고전화를 받기 시작하면서 전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 나섰다.

시에다 위안부 할머니를 등록하라고 해서 그때 당시 전국에 250명이 등록했다고 한다. 표면상으로 봐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알 수도 없고 직접 찾아가보니 다들 밥도 제대로 먹질 못하고 힘들게 생활하기에 한데 모아 놓고 쌀을 팔아다주면서 치다꺼리를 했다는 김 회장.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밥
이라도 굶지 않도록 자비를 털어 한 달에 15~20만 원씩 드렸다고 한다. 이제는 정부에 이야기해서 살아계신 할머니들 40여 명에게 50만 원씩을 지급하게 했다고 한다. 경기도 나눔의 집에서는 먹고 입는 것, 병원 가는 일 등을 해결하고 있다.

“이제는 나이도 많이 먹고 할머니들은 돌아가시고 식민지 역사를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그만하려고 했더니 다들 그만두면 안 된다고 한다. 교육받은 아이들이 100원짜리 500원짜리를 다 집어넣어도 2만 8000원밖에 안 들어가는 돼지저 금통에 동전을 모아가지고 와서 그러지 말라고 한다.”
그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그들의 마음이 정말 고마워서 한 달 한 달을 일해 나가고 있다.

김 회장은 일제강점기에 만주나 중국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요 몇 년 고생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한 마음을 품는다. 오히려 자비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그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국민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뼈 빠지게 일하면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희망, 그런 애국심이랄까. 김 회장은 오늘도 그런 보람을 느끼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