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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

하오개그림터 권용택 서양화가


글. 백은영 사진. 이현복 사진제공. 권용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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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창공을 유유히 비행하는 것인가. 새들의 날갯짓이 마냥 자유로워 보이는 이곳은 보는 이에 따라 바다가 되기도 하고, 하늘이 되기도 한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石) 위에 펼쳐진 세계는 또 하나의 자연이자, 삶의 터전이 됐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물론 돌 그 자체로도 자연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택함 받은 돌은 우주까지라도 담을 수 있는 무한의 캔버스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가. 자명(慈明) 권용택 서양화가를 평창에서 만났다.

권용택 화백은 돌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백석산 자락이 넓게 펼쳐진 평창군 진부면 화의리 하오개마을에 ‘하오개그림터’를 만들고 3000여 평에 달하는 대지에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식물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가꾸는 식물만 해도 400여 종에 이른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식물들이 20년이 지나니 저절로 자생해서 씨앗을 맺기에 이르렀고 ‘하오개그림터’ 안에 또 하나의 작은산을 이뤘다.

권용택 화백 부부가 함께 만들어낸 기적이다. 권 화백의 부인 이향재 씨도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문득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부부가 함께 화가의 길을 걸으며, 우리 토종식물을 키우고 자연을 보존하는 일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아름다운 노부부의 이야기 꽃이 이곳 평창에서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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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택 화백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하루 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 그림에 담았다.
 

하오개마을의 하오개그림터
‘수원의 작가’로 불릴 정도로 수원을 기반으로 활발한 미술활동을 펼치던 권 화백이 40대 후반 연고도 없던 이곳 평창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수원에서 활동할 당시 그는 주로 참여미술을 했다. 소위 말하는 리얼리즘 화가, 민중미술 화가로서 현실 참여를 하는 작가였다.

“당시에는 주로 환경 관련 시민운동을 많이 했어요. 작품 속에도 환경 문제가 많이 들어가 있었죠. 생태 문제까지 연결된 것도 그런 바탕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에요. 시민운동 및 사회 문제에 많이 관여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집안을 돌볼 여유가 없었죠.”

활발한 활동 덕에 공동대표를 맡게 되는 일도 많아지고 자연스레 시민활동마다 앞장서게 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러던 중 한번은 인권에 관련된 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됐는데, 이 일로 인해 곤란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작가로서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것도 좋지만, 바깥일이 많다보니 집중해서 그림을 그릴 시간이 부족했다. 그저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싶었다.

“일단 현장으로부터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찾아들게 된 곳이 하오개마을이었어요. 백석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우리 꽃, 우리 식물이 지천에 널려 있었죠. 환경에 관심이 많은 제게 이곳은 우리 것을 보존하고 싶었던 제 꿈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어요. 첫눈에 반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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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문화예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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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발왕산 평화봉>, 돌 위에 아크릴, 48×28×4㎝, 2020
 


프랑스 ‘LE SALON(르싸롱)’ 금상 수상 등 국제적인 상을 비롯해 수많은 그룹전 및 기획전 등을 통해 이미 이름을 알린 그였기에 강화도 산골에 둥지를 튼 작가 부부의 삶에 많은 언론이 주목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를 찾는 방송이 끊이지 않는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만난 이곳, 어쩌면 이 둘의 만남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오개마을은 화의리 안에서도 작은 동네에 속해요. 처음 마을 이름을 들었을 때 ‘하오개’라는 발음이 정말 좋았어요. 바로 친숙해질 수 있었죠. 작업실 이름을 이곳 지명을 따라 ‘하오개그림터’로 지은 이유죠.”

그런 그의 작업실이자 집이기도 한 ‘하오개그림터’로 가는 길은 사실 쉽지 않다. 차가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평지인 국도에서 바라보면 640 , 해발 680 정도에 위치해 있으며, 이마저도 800 까지 올라갔다 고개를 넘어 다시 내려와야 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글 쓰는 작가, 역사학자, 한의학자, 식물학자 등 그를 찾는 이들의 직업군도 다양하다. 그를 만나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온다는 것은 아마도 그에게서 사람좋은 향기가 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가 캔버스와 돌 위에 담아내는 그림처럼 말이다.

돌과 함께 다시 태어나다
권 화백이 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수원에서 평창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부터 그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돌도 한정된 산맥에만 존재한다. 계방산부터 가리왕산 중간 자리에 위치한 돌이 그의 선택을 받는다.

“처음 돌에 그림을 그릴 때는 제가 그 돌을 선택하고, 또 그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릴지 결정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아니라 돌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제게 말을 건네는 거였어요. 그렇게 산처럼 생긴 돌에는 산을, 계곡처럼 보이는 돌에는 계곡을 그리게 되었죠.”

권 화백의 말에는 ‘미술’에 대한 그의 철학과 인생관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자연과 동떨어지지 않고, 삶과 괴리된 것이 아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미술. 그는 생각과 삶과 말과 그림 이 네 가지가 하나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 지향점을 향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작가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그림에는 삶이 묻어나고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지난 역사가 보인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기도 하고,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의 삶을 투영할 수도 있다. 이뿐 아니다. 그는 그림을 통해 평화를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에 유독 새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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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설명 중인 권용택 작가
 

그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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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동강을 날다>, 캔버스에 오일, 먹, 90.9×65.1㎝, 2019
거대한 새가 산을 감싸 안은 것도 같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것도 같다. 이렇듯 작가는 작품 안에 새의 형상을 자주 등장시킨다.
 


그의 작품 중 <저어새 날다(캔버스에 오일, 먹, 60.9×65.1㎝, 2019)>는 한강 하류 쪽에 위치한 유도라는 섬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996년 8월 경기도 김포시 한강 하류에 있는 비무장지대 무인도인 ‘유도’라는 섬에서 황소 한 마리가 발견된다.

집중호우로 홍수가 발생해 북한에서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됐지만 비무장지대인 만큼 황소를 구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습격으로 오해할 경우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듬해 1월 황소를 구출해 남북 평화통일의 상징이 되라는 의미로 ‘평화의 소’라 이름 붙였고, 이후 1998년 제주도에서 기증한 암소인 ‘통일 염원의 소’와 결혼도 시켰다.

그렇게 둘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수소가 바로 ‘평화통일의 소’다. 권 화백은 이 그림에 저어새를 그려 넣어 평화를 물고 오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저어새가 물고 있는 것을 자세히 보면 철조망 같기도 하고 생명을 싹틔운 잎사귀를 물고 있는 것도 같다. 아니, 아니다. 기자의 눈에는 철조망에 핀 새싹을 통해 평화와 희망을 상징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언제쯤 남과 북이 하나 되어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을까. 그저 국경도 이념도 초월하며 저 창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돌(청석) 위에 그려진 <발왕산 평화봉>이라는 작품에도 새가 등장한다. 이 새들이 날갯 짓하는 곳이 바다인지, 하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는 보는 이들이 저마다 결정할 문제다. 그저 그 어디든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이 그림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염원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이 그림이 주는 매력이 아닐까 한다.

현실을 반영하다
“산에 올라와 ‘와~ 멋있다!’라며 있는 모습 그대로만 그린다면 그냥 풍경화가에 지나지 않아요. 저는 그 속에 많은 생각들을 담으려고 노력해요.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저 편하게 그림을 보아도 괜찮고, 나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넣어서 다르게 해석해도 좋고요. 또 그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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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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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독도>, 캔버스에 돌, 아크릴, 72.7×53.0㎝, 2020
이 작품에도 새들이 등장한다. 푸른 바다 위 창공을 나는 새들의 모습 속에서 자유와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삶과 그림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살아가는 모습은 거짓투성인데 그가 그려낸 그림이 아름답다면 과연 그 그림이 얼마만큼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을까. 권 화백은 그림을 잘 그려내는 기술만 가진 사람이 아닌, 생각과 삶과 말과 그림이 하나가 되는 작품을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을 담아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말 그대로 ‘진실함’이 묻어났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뿌리를 내린 평창에서의 삶에도 늘 최선을 다한다. 삶과 그림이 따로 갈 수는 없다는 그의 소신처럼 평창에서 진행되는 축제나 행사가 있으면 재능기부를 통해 평창 알리기에도 앞장서 온 그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대답에 그는 천생 그림을 그려야 할 운명을 타고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과 같은 표현방식이 제 ‘트레이드마크’가 됐다고 해서 평생을 우려먹는 고인물의 썩는 작가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항상 노력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것이며, 자연과 우리 식물을 보존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을 것입니다.”

곧 있으면 칠순을 바라보는 권 화백.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그가 새롭게 선보일 작품들이 몹시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