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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3대 대첩 중심,

신흥무관학교 출신들 있었다”

황원섭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글, 사진 장수경 사진제공.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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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10월, 중국 만주 땅에서 역사에 기록될 승전보가 울려 퍼진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자유 그리고 사라져 버린 평화.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제는 그야말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누군가는 싸워야 했다. 일제의 잘못을 만천하에 알려야만 했다. 이들과 싸운 인물이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요, 그 중심에는 홍범도 장군이 있었다. 독립전쟁 전승 100주년을 맞아 어느 해보다 특별한 이때, 황원섭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만나 단체의 역할과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들어봤다.

독립운동 정신 계승 운동 펼쳐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에서 만난 황 공동대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자를 반겨줬다. 그는 우당기념관 이사직을 겸임하고 있다. 우당기념관은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 동지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전시 공간이다. 황 공동대표가 현재 일을 맡게 된 것도 누구보다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이를 알리고자 함이었다.

지난 2011년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이 진행됐다. 행사는 독립군 간부를 양성한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업적, 독립운동 정신 계승을 위해 마련됐다. 당시 기획위원장이었던 그는 사업 기획과 예산 확보 등을 담당했다. 행사 후 뜻깊은 이 일을 일시적으로 끝낼 게 아니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새로 기념사업회를 창립한다.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였다. 자연스레 그는 공동대표직을 맡는다. 단체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리고 우리 역사에서 잘못 인식해 온 것을 바로 잡기 위해 힘쓰고 있다.

매년 6월 10일 개교기념식을 개최하고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관련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도 추진해왔다.

신흥무관학교 원동력은‘ 신민회’
1911년 만주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는 10여 년간 3500여 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이름은 신민회(新民會)의 ‘신(新)’과 흥할 ‘흥(興)’이 합쳐져 지어졌다.

즉 단체의 원동력이 1906년 조직된 독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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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영정사진



신흥무관학교의 투철한 독립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늑약(乙巳約)’을 통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한다. 이는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을 뜻한다. 고종황제는 자신의 서명 날인을 하지 않아 을사늑약이 사실상 무효라고 생각하고 일제의 만행을 국내외로 알리려고 했다. 그리고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이상설·이준·이위종 세 사람은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로 향했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해 우리의 독립을 국제문제화 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헤이그 특사 사건의 배경에는 우당 이회영 선생이 있었다. 일제의 궁내 감시 속에서 고종에게 특사파견을 주청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미국 등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무산된다. 이로 인해 1907년 고종은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다.

신민회는 군대를 길러 일제와 싸워 쫓아내고 독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무장투쟁론’이다. 황 공동대표는 “문제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일제와 어떻게 싸우는가였는데, 일제가 전쟁하는 국가와 힘을 합쳐 쫓아내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래서 망명한 후 먼저 군인을 양성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즉 신민회는 독립군을 키우기 위해 만주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했고 군사훈련을 시작하자 청년들이 몰려들면서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게 됐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가 인적자원의 토대가 됐고, 우당 이회영 선생과 여섯 형제의 가산(家産)이 무관학교를 유지하는 경제적 토대가 됐다. 또한 망명 현지에 소학교를 세워 체계적으로 학생을 충원해 10년간 3500여명의 독립군을 배출한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봉오동·청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 독립전쟁의 3대 대첩을 이끌었다. 1940년 창설된 광복군의 최고위 지휘관 전원과 중견 간부들의 대다수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의열단’ ‘다물단’ ‘흑색공포단’ 등에도 속해 의열 투쟁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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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연해주에서 홍범도 장군과 새부인 이인복이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여자 아이는 이인복의 손녀로 알려져 있다.
 



청산리 전투, 왜 홍범도 장군 지워졌나
3・1운동 후 독립군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며 활발한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수많은 전투 중 가장 눈부신 활동을 펼친 부대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다. 1920년 6월 대한독립군은 최동진이 이끄는 ‘군무도독부군’,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과 연합 부대를 편성하고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다. 연합부대의 잇따른 기습에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 300여 명이 다쳤다. 반면 독립군 전사자는 4명뿐이었다. 이후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합세해 두만강 상류에 있는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싸워 이긴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다.

이처럼 봉오동·청산리 전투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홍범도 장군이다. 하지만 지금껏 청산리 전투 이야기를 하면 김좌진 장군 위주로 해석돼 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황 공동대표는 역사적 배경에 주목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독립군은 일제에 계속 쫓기게 된다. 이에 연해주로 넘어가서 활동하는데, 그때가 ‘러시아 혁명(1917~1922)’ 시기였다. 볼셰비키 혁명세력은 홍군(소련공산당이 지도하는 당군), 반대 세력은 일본군이 지원하는 백군이었다.

이때 일제와 싸우기 위해 독립군은 홍군에 가담했고, 홍군이 혁명의 최종 승자가 된다. 그런데 홍군 가담을 두고 어떤 이들은 독립군을 공산주의자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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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지
 


또 주목할 부분이 있다. 1860년대부터 우리 동포들은 빈곤과 기아의 탈출구로 러시아 극동 연해주에 들어가 살았다. 이들은 시민권이 있어 토지 소유가 가능했다. 하지만 독립군 출신은 땅이 없었고 소작농만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발언권이 있어야 했기에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다. 황 공동대표는 “해방 이후 반공 위주 권위주의 시대에는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해 청산리 전투가 김좌진 장군이 단독으로 추진한 것으로 해석하다가 1991년 한국-러시아 수교 이후 역사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만주·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연구해 홍범도 장군의 역할이 새로 부각됐다”고 강조했다.

홍범도 장군은 1921년부터 연해주에서 활동했고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1943년 현지에서 순국했다. 황 공동대표는 “해방 이후 철저한 반공정책이 이뤄졌고 홍범도 장군은 후손이 없어 1990년대 이전까지는 그의 업적이 부각되지 못했다”며 “2005년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창립과 학계의 노력으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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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섭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가 홍범도 장군의 사진을 들고 미소짓고 있다.
 


최근까지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이 추진돼 왔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2013년 10월 카자흐스탄 현지에서 ‘70주기 추모식’을 하면서 이 문제를 정부 측에 제기하기 시작됐다. 그간 북한 측도 홍범도 장군이 평양 출신이고 의병투쟁 지역이 주로 함경도 지방이라 봉환을 주장해왔다. 이에 카자흐스탄 정부는 남북 경합상태에서 결정을 보류해왔다. 그러다 작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을 방문,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직접 교섭해 봉환이 성사됐다. 이에 지난 3월 말 봉환하려 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지연됐다. 양국은 코로나19 사태 진정되면 다시 일정을 잡아 봉환 예정이라고 한다.

독립전쟁 전승 100주년, 그리고 남은 과제
올해는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다. 황 공동대표는 “어떤 이들은 미국이 일제와 싸워 이겼기에 우리나라가 해방됐다고 말하지만, 을미의병 이후 무장투쟁과 독립전쟁 등이 하루도 쉬지 않고 이어져왔다”며 “나라를 지키겠다는 선조들의 주체적인 노력과 목숨을 건 헌신이 있었기에 해방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여전히 과제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국군의 역사 복원이다. 황 공동 대표는 “우리 국군의 역사를 해방 후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와 ‘조선경비대’에서 출발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광복군, 독립군, 의병 등 독립전쟁의 역사가 국군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다행히도 2년 전부터 정부에서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육군사관학교가 국군의 간성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그 뿌리가 신흥무관학교라는 사실을 새로 정립했지만, 국군의 연원과 정통성을 분명히 복원하기 위해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건일인 9월 17일로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아 해방 후 신흥대학을 건립하는데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개명하는 과정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전통성이 훼손됐다. 찬란한 학교 역사를 복원하려고 경희대학교 총동창회에서 역사복원 작업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광복은 됐지만 불완전한 광복”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분단조국의 통일, 식민사관의 극복, 친일세력의 역사적 정리 등 미진한 부분을 조속히 해결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개인의 공명심,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국민화합적 자세가 중요한 때”라고 말했다. 이어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을 위한 정부의 뒷받침이 꾸준히 이뤄져야 하며 우리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민족임을 깨닫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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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홍범도 장군 추모 기념식(카자흐스탄 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