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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우리 소리

지켜야죠


배뱅이굿 이수자 이성관 선생


글. 백은영 사진.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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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구나~ 왔어. 배뱅이가 왔어~”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故 이은관 명인이 불러 대한민국에 ‘배뱅이굿’ 열풍을 불러온 바로 그 대목이다. 완창을 하면 1시간을 훌쩍 넘는 창극으로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서는 완창이 힘든 곡이다.

배뱅이굿은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서도 창극의 하나로 1명의 배우가 등장해 처녀 배뱅이의 넋을 불러 위로하기 위해 창으로 여러사람의 역을 도맡는 형식이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의 김관준이 판소리 등을 참작해 서도소리로 창작한 작품 중 하나로 김관준의 제자 김종조, 김칠성, 곽풍, 최순경 등이 잘불렀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부르는 이가 극히 드물다. 그나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던 이은관 옹이 지난 2014년 향년 97세로 별세하면서 배뱅이굿의 입지가 흔들릴 뻔했다.

우리 소리를 사랑하고 특히 배뱅이굿을 사랑하는 그의 제자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배뱅이굿을 음반에만 의존해 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저 소리가 좋았지요
고 이은관 명인의 뒤를 따라 ‘배뱅이굿’을 부르는 이들 중 수제자로 꼽히는 이가 있다. 인생살이 굽이굽이 아리랑 고개 넘어가듯 살다보니, 늦은 나이에 이수자가 됐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오랜 시간 ‘배뱅이굿’을 따라 부르고 완창하며 음반까지 낸 이성관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버지께서 사물놀이, 상여소리를 내는 데 훌륭하셨어요. 당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이곳저곳 다녀오시느라 집을 비우시는 날이 많았죠. 그래서인지 항시 가난 속에 살았던것 같아요. 그래도 뱃속에서부터 듣던 아버지 노래 소리 덕분인지 어려서부터 풍물을 제법 잘 쳤어요. 마을에서 씨름 대회가 열리면 어린 제가 꽹과리 치며 나가곤 했죠.”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이성관 선생은 올해 75세가 됐다. 일흔을 훌쩍 넘겼음에도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쉬지 않고 소리를 한 때문일 것이다. 그저 노래가 좋고 소리가 좋아 어릴 적부터 따라 부르던 그다.

1960년대 초에는 라디오를 소유한 집이 많지 않았다. 선생이 살던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라디오가 귀했던 시절이었기에 이천읍에서 보내주는 유선방송을 통해 듣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때부터였다. 이은관 명인의 소리를 듣고 가슴에 찡 하고 와 닿은 게 말이다.

“처음부터 배뱅이굿을 들은 건 아니었어요. 그때만 해도 배뱅이굿은 몰랐어요. 이은관 선생님째(표) 뱃노래, 오봉산타령 등을 듣는데 그 소리가 이상하면서도 자꾸 마음을 울리는 거예요. 집에서 솥뚜껑 두들기며 그렇게 선생님 노래를 따라 불렀죠. 유선방송으로 듣는 게 전부이다 보니 몇 소절씩밖에 따라 부르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이 즐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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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뱅이굿 이수자 이성관 선생
 

10대 중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은관 명인의 소리는 20대가 되어서야 제대로 된 음반으로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서울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갔는데 배뱅이굿 음반이 있는 거예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데 이전에 길거리에서 듣던 소리와 너무도 다른 거예요. 그야말로 뒤로 자빠질 정도로 좋았어요. 워낙 선생님이 노래를 잘 하시니까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소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농사일도 많지 않은 데다 정신은 늘 살아있다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플라스틱 공장에 취직해 물건을 팔던 어느날 버스를 타고 가던 그의 눈에 이은관 명인이 운영하던 학원 간판이 들어왔다. 다음 날이라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서울 지리도 잘 몰랐을 뿐 아니라, 그럴만한 여유가 있을 때도 아니었다. 그렇게 2년 정도가 지나서야 이은관 선생을 찾아갈 수 있었고, 그것이 인연이 돼 선생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날 이은관 명인과의 첫 만남을 “마치 대통령을 만난 것 같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그에게 있어 배뱅이굿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외롭지만 고고한 학처럼
어릴 적부터 이은관 명인의 소리를 따라하던 그였기에 우상과도 같았던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동안 수없이 따라 불렀던 배뱅이굿 몇 소절을 들려드리고 싶었다.

“선생님. 저 배뱅이 몇 소절 할 줄 압니다.”

떨리는 마음 다잡으며 몇 소절을 불렀을 때 학원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았다. 어떻게 보면 처음 배우려고 온 제자들과는 시작점이 달랐던 그였기에 기량도 남달랐지만, 그만큼 남모를 서러움도 많았다고 한다. 물론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도 무시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성격이 고지식하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이 또한 전통을 사랑하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테다.

“워낙 선생님 소리를 좋아하고 배뱅이굿을 좋아하는 터라 제가 어느 정도 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없는 살림이지만 차곡차곡 모아둔 돈으로 음반을 하나 냈어요. 과연 내가 잘할 수 있는지, 가능성이 있는지 보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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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낸 음반이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학원 동료들의 마 음은 편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 배뱅이굿의 역사와 그 진가를 알아보기 위해 정리한 책 <배뱅이굿(노재명 편저, 아름출판사, 2002)>에 스승인 이은관 명인과 함께 그의 사진과 이름, 그가 낸 음반이 수록됐던 것이다. 물론 스승인 이은관 명인은 ‘배뱅이굿의 명인들’에 김관준, 김종조, 최순경, 김주호, 양소운, 김영택 등과 함께 내력이 회고록 처럼 실려 그 무게감은 다르지만 불편함이 감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배뱅이굿이 좋고 소리가 좋았지만 학원에 가는 날이면 마음이 답답해져왔다. 어떤 이는 그가 학원에 나오는 것을 불편해 하기도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운명이자 숙명이었기에 힘들다고 포기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첫 음반을 낸 이후로도 몇 번 음반을 더 냈다. 계속해서 가능성을 시험해 본 것이었지만 스스로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변 식견 있는 이들은 그가 낸 음반을 듣고 그를 응원하거나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가뭄에 단비’처럼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고 있는 그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한마디가 위로가 됐고, 신념과 소신을 지키며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올 수 있는 힘이 됐다.

전수생의 신분으로 국립국악원에서 발표를한 이력도 있는 그다. 심장이 약해 무대에 설때마다 아직도 떨린다는 그이지만 막상 장구채를 손에 잡고 소리를 시작하면 거침없이 뽑아낸다.

배뱅이굿으로는 제일가는 그이지만 여러 이유로 늦은 나이에 어렵게 배뱅이굿 이수자가 된 그다. 그저 좋아서 하는 우리네 소리이기에 묵묵히, 그렇지만 문화재 계승과 보존에 대해서는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그다.

우리 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깐깐하다고 꼿꼿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원칙대로 가는 그이기에 외로움과 고독은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닌다. 그럼에도 소리에 대한 철학과 사랑이 넘쳐나는 그이기에 이 길을 계속 갈수 있었고, 또 무대에도 설 수 있었다



부끄럽지 않은 제자 되고파
“살아생전 칭찬에는 인색하셨지만 배뱅이굿만은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명창이셨어요. 그런 선생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겠노라고, 열심히 해서 ‘(이은관 선생) 제자 중에저런 사람도 있었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배뱅이굿을 계속해서 사회에 알리겠다고 약속드렸어요.”

스승 이은관 명인이 작고한 지 올해로 6년이됐다. 스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년 열리는 정기공연 및 행사 등을 통해 배뱅이굿을 알리고 있다. 작년에는 초등학생 손자 둘(장구 고수 이준영, 북 고수 이준범)과 합동공연으로 배뱅이굿을 선보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아직 어린 학생들이 북과 장구를 치며 할아버지와 함께 공연하는 모습에 많은 어르신들이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저이는 이은관 선생님 비슷해. 이름을 성관으로 지어.’라고 말씀해주신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이현채에서 소리 성(聲), 대죽 관(管)을 쓴 이성관으로 부르기 시작했어요.”자식을 잘 둔 부모가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제자를 잘 뒀다는 소리를 듣게 해드리고 싶었다는 이성관 선생.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나 욕심보다는 그저 좋아해서 해 왔던 ‘배뱅이굿’이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이 가슴 아프다는 그는 마지막으로 ‘배뱅이굿’ 음반을 한 번 더 내고 싶다고 말한다. 다만 세월 따라 가치관과 문화도 바뀐만큼 ‘계집애’라는 단어를 순화하고, 아들 낳자고 불공을 드렸더니 딸이라니 웬 말인가를 아들 딸 낳자고 불공 드려 예쁜 딸이라니 얼마나 좋으냐와 같은 말만 바꾸어 45분짜리 음반을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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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관 선생이 평생을 내조해준 아내와 함께 웃음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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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그동안 소리한다고 힘들게 했는데도 옆에서 힘든 기색 없이 내조해준 아내에게 노래를 만들어 선물하고 싶다고 말한다.

“‘황혼의 명품 인생’이라는 노래를 만들고 있어요. 나이 들어갈수록 사람이 명품이 되자는 내용인데 아내에 대한 제 마음을 담은 노래예요.”

배뱅이굿 한 길만을 걸어온 그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역사와 전통이다. 그렇기에 단군왕검을 기리는 어천절 대제 때마다 직접 만든 ‘비나리’를 부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역사를 지키는 일에도 힘을 쏟는 그다. 학자들의 명언대로만 살아도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다는 선생은 ‘해불양수(海不讓水)’라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한다. “실력 있고 현명한 사람은 시기를 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같이 갈 수 있어요. 국악계나 문화계 전반에 걸쳐 해불양수와 법고창신의 정신이 가득 넘쳐나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우리의 소리가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는 이성관 선생. 그렇기에 힘닿는 데까지 배뱅이굿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선생의 그 목소리에 어딘지 모를 애달픔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