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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의

한국 사랑 느꼈죠”

‘고은당’ 정하근 대표


글, 사진. 장수경 사진제공. 고은당 정하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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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의 작품이 걸려있는 전시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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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
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내 남편이 묻혀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는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
- 이방자 여사 어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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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 유난히 차가운 한일관계. 일본의 경제보복과 불매운동 등으로 양국 간의 분위기는 다소 얼어있다. 이런 가운데 역사 속 인물 중 우리 민족을 위해 노력했던 일본 황족이 있으니 ‘이방자’ 여사다. 올해는 이방자 여사 타계 30주기이다.

일제강점기와 일본 패전이라는 혼란 속에서 오직 한국을 위해 남은 생을 살다간 이방자 여사. 고미술품 전문 갤러리 ‘고은당’의 정하근 대표는 이방자 여사의 삶은 국가 간 대립이 아닌 소통과 봉사, 화합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30여년간 이방자 여사의 작품을 수집해왔다. 이방자 여사가 남긴 작품이 상업적인 대상이 돼 거래되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였다. 지난해에는 이방자 여사의 대표작인 ‘칠보 혼례복’ 등이 전시를 통해 대중에 공개됐다.

정 대표는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혼란기인 근현대 속에서 봉사의 어머니로서, 진정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황족과 고종 아들의 결혼
이방자 여사는 일본 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왕(梨本宮 守正王)의 장녀인 마사코(方子)이다. 조선 제26대 왕이며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일곱째 아들인 대한제국 황태자 영친왕(李垠, 이은)보다 4살 아래인 이방자 여사는 가쿠슈인 초·중등과를 졸업했다. 이방자 여사는 요시히토(嘉仁) 천황의 맏아들 히로히토(裕仁)의 배우자 물망에 올랐었다. 하지만 사촌 나가코(良子)에게 밀려 결국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일본 어의가 그를 불임 관상이라고 판정하자 조선 왕실의 적통을 끊으려고 영친왕과 결혼시켰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자신들의 결혼 소식을 일본의 한 신문을 통해 알게 됐다.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전하와 약혼하게 되다니!”

이방자 여사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에 대해 키가 작지만 어깨가 넓어 믿음직스러워 보였고, 말 한 마디나 행동이 온후하고 교양이 깊어 보였다고 회상했다. 또 영친왕이 외롭게 성장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다정한 성격을 지녔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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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 작품전 전시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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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 대표작 그림 ‘한매쌍작’(제공 고은당 정하근 대표)
 


귀국 후 낙선재 그리고 봉사
일본 패전 후 1962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회동으로 한국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시대는 일본인을 받아주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영친왕은 한국에 돌아와 병마와 싸우다가 7년 만에 서거했다. 홀로 남은 이방자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했다. 그리고 봉사에 전념했다. 사회봉사는 부부가 평소 구상해온 것이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한국에 돌아가면 봉사활동과 선행을 하고 살자며 다짐을 했고, 일본에서도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왔다.

이방자 여사는 그 뜻을 남은 생애 동안에 지켜나가기로 했다. 사실 이방자 여사는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회봉사에 열정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을 받게 된다.

정 대표는 “이방자 여사는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일환 중 하나로 희생됐던 인물이었다. 한국 귀국 후 황족으로서의 대우나 직위가 전혀 없었음은 물론,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살았지만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다”고 설명했다.

자선바자회를 통한 수익금 창출
이방자 여사는 정부에서도 돌보기 힘들었던 정신지체장애자들을 위해 남은 삶을 바쳤다. 1971년 수원시 탑동에 정신지체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를 세웠다. 1982년에는 신체 장애아 교육시설 ‘명혜학교’를 광명시에 세웠다.

특히 일본에서 배운 칠보 기술로 ‘서울칠보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신체장애인의 재활과 가난한 한국 젊은이의 자립을 위해 기술을 전수했다. 평생을 헌신적인 열정으로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자선바자회도 열었는데, 수익은 전액 지체 장애인을 위해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 이방자 여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선의 왕비라기 보단 일본 황실 이미지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정 대표는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자선바자회를 통해 자금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며 “당시 일부 사람들의 모임에서의 기부가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또한 1970년 무렵 일본에 이방자 여사 후원회가 있었는데, 이들이 자선바자회에 참여해 수입이 생겼다.

이방자 여사는 모든 상황을 차분히 받아들였고,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활동에 더욱 힘썼다. 그의 진실이 통한 걸까. 이후 한국에서의 시선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방자 여사는 1989년 4월 30일 88세를 일기로 별세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옆 영원(英圓)에 묻혔다. 낙선재에서 함께 지내던 덕혜옹주가 숨진 지 9일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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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 대표작 칠보 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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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 대표작 그림 ‘물총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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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문화교류기금’의 제20회 기금상을 수상한 정하근 대표(가운데)
 


늠름한 모습의 이방자
정 대표는 이방자 여사의 삶이 담긴 작품을 볼때면, 옛 추억이 아른아른 떠오른다고 한다. 정 대표가 그의 작품을 처음 수집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초였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이방자 여사 작품 바자회에 참석했다. 정 대표는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 정도만 가능했던 이방자 여사는 키가 작고 갸름했다”라며 두 차례 이방자 여사를 만났고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이방자 여사는 자신이 일본 황족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비라는 위치에 있음에도 자신의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봉사에 전념했다”라며 “일본인이 한국에 저지른 일에 대한 반성의 마음이었는지, 한국에 와서 소외된 지체장애자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줘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방자 여사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어려운 시대를 참고 이기며 묵묵히 봉사에 전념한 그의 모습이 존경스럽다고 전했다. 실제로 역대 왕조를 통틀어 우리나라에 손재주가 많았던 왕비로 이방자 여사가 꼽히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 외무성계의 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의 제20회 기금상에 정 대표가 결정됐다. 정 대표는 이방자 여사가 남긴 서화와 도자기 등의 유작과 유품 수집가로 지금까지 2회의 작품전을 모두 자비로 개최해 이방자 여사의 숨은 업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시상식은 지난 9월 18일 서울에서 열렸다.

정 대표는 “칠보, 서예, 서화, 도자기, 한복 등 이방자 여사가 직접 만든 작품을 모아왔다”며 “한국이든 일본이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기념관을 만들어 작품을 전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한국을 사랑한 이방자 여사의 정신을 우리 국민도 깨닫고 이어받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일본과 한국이 국가적으로 보면 현재는 불편한 관계이지만, 민간 교류는 영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은 이방자 여사가 영친왕 이은과 결혼한 지 100년 되는 해이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게 느껴지는 한 세기. 세상은 변화를 거듭했지만, 이방자 여사의 혼은 그의 작품 속에 오롯이 잠들어 있는 듯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