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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쓰다듬는

고운 결 ‘모필’

붓 끝에 담긴 장인의 혼魂


백산 전상규 백모필장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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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필. 짐승의 털로 만든 붓이다. 모필은 선비의 필수품이었다. 오늘날 문인이나 학생들이 사용하는 노트북처럼. 그 옛날 선비들에게 모필은 휴대할 수 있는 기록의 도구였다. 시대가 바뀌고 모든 것이 발전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오늘날 붓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고 시중에 공장에서 생산하거나 수입산 붓도 많아지면서 모필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있다. 이 때문에 모필장 역시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 그러나 묵묵히 뚝심 있게 55년째 전통 붓을 만드는 한 사람이 있다. 3대째 전통 붓 맥을 이어가고 있는 전상규 백모필장이 그 주인공이다.

3대째 이어온 전통 붓매기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전상규 붓 장인의 공방. 각종 전통 붓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자는 평소 붓을 접해보지 않은 터라 공방을 가득 채운 다양한 붓들이 마냥 신기했다. “3대째 전통 붓을 만들어오고 계시다면서요?” 기자의 첫 질문이었다. 전상규 장인은 자신의 고향 얘기부터 꺼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이 진다리 붓으로 유명한 전남 백운동이에요. 할아버지가 서당을 하시며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세필을 매는 일을 했지요. 그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저도 세필을 매며 붓과 인연을 맺었죠.”

‘진다리 붓’은 1985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됐다. ‘진다리’는 광주시 백운동의 옛 지명이다. 예로부터 붓은 4가지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끝이 뾰족해야 하는 첨(尖), 가지런해야 하는 제(濟), 털의 모듬이 원형을 이루어야 하는 원(圓), 힘이 있어 한 획을 긋고 난 뒤에도 털이 다시 일어나야 하는 건(健)이다. 진다리 붓은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모가 가늘면서 노란 윤기가 나고 글씨를 쓸 때 끝이 갈라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붓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이러한 이유에서 진다리붓은 서예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전상규 장인의 ‘백산(白山)’이라는 아호만 봐도 전통 붓의 고장 백운동 진다리를 연상시킨다. 백산은 광주 남구 백운동의 ‘白’ 무등산의 ‘山’을 따와 아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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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규 백모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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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필방에 있는 붓대에 쓰이는 대나무들
 


100번 손이 가는 정성
전상규 장인은 민화붓, 한문붓, 한글붓, 사군자붓, 세필붓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붓을 만든다. 실제로 그의 붓을 한번 사용해보면 다시 그를 찾아온다고 한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도 그의 공방엔 고객들이 찾아왔고 주문이 들어온 붓을 택배로 보내기 위해 매우 정성껏 붓을 포장해 보내는 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전상규 장인의 붓의 우수함은 그가 붓을 만들 때 들이는 정성이 말해준다. “좋은 붓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그 과정을 하나 하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먼저 털 고르는 일부터한다. 주로 어린 흰염소의 털을 이용하는데 우리나라 염소는 사계절을 견디고 자란 덕분에 털이 특히 부드러워 붓으로 삼기 좋다. 이때 염소 털은 반드시 처음 난 털이어야 하고 음력설 50일 전후 시기에 수확된 것만 사용한다. 털을 고르고 난 후에는 다리미로 털의 기름을 8회 정도 뺀다. 이때 다리미의 적절한 온도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고온으로 작업하면 털이 손상되고 저온으로 하면 기름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붓이 뻑뻑해진다. 그는 다리미 바닥에 물을 튀겨 물방울이 맺히는 정도로 적당한 온도를 가늠한다니, 그 만의 노하우인 셈이다.

기름을 뺀 후에는 여기저기 뻗은 털을 모아 정리한다. 털 하나라도 잘못되면 결코 좋은 붓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길고 짧은 털을 솎는 것은 물론 털의 위아래가 뒤바뀐 것까지 하나하나 골라낸다. 모은 털의 끝자락은 실로 묶는데 이때 힘조절에 신경써야 한다. 너무 약하게 묶으면 붓의 맥아리가 없어지고 강하게 묶으면 털이 억세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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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규 장인이 제작한 붓들(백산필방 제공)
 


붓대를 고르는 일도 중요하다. 붓대는 담양에서 재배된 2~3년생 대나무를 사용하는데 이때 대나무는 반드시 12월에 쳐내야 하고 황토물을 이용해 겨울 내내 건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후 대나무 속을 파고 무늬나 전각을 새겨넣은 다음 붓털과 붓꼭지를 달면 완성된다. 전체 과정은 45일, 횟수로 치면 100번이 넘는 작업을 거친다. 이처럼 고된 과정을 거쳐 좋은 붓이 탄생한다니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붓은 붓끝을 모았을 때 뾰족하고 붓털을 부채처럼 펴쳤을 때 갈라짐이 없고 붓끝이 가지런하며 붓끝 주위가 둥글게 꽉 에워 싸서 어느 한쪽이 홀쭉하거나 빠져 보이면 안돼요. 탄력성이 풍부해 붓을 눌러쓴 다음에도 붓털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해요. 좋은 붓은 붓털이 부드럽고 말을 잘 듣기 때문에 더 좋은 선을 그릴 수 있죠. 붓털이 무겁고 뻑뻑하면 힘이 들어가고 붓이 좋으면 피로감이 덜해요. 한마디로 붓이 좋으면 붓이 사람따라 가는데 붓이 안 좋으면 사람이 붓을 따라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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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전상규 백모필장(백산필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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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전상규 백모필장(백산필방 제공)
 


붓 매는 행복한 가족
유년 시절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붓 매는 기법을 전수받은 전상규 장인은 스승 고(故) 박순 선생 문하에서 양호붓 제작 전수를 거쳐 55년째 전통 붓을 만들고 있다. 그러한 훌륭한 스승들처럼 그도 스승으로서 우수한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많은 제자들을 길렀고 제자 중 2명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무엇보다 직계가족들이 붓 매는 기술을 직접 계승하고 있으니 그의 말을 빌려 전 장인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아들인 전희태씨는 전수조교로 있으며 두 딸인 전소연 씨와 전소희 씨는 이수자로, 사위인 오충현 씨도 이수자로 현재 부천에서 전통붓 공방을 운영 중이다. 그런 자녀들을 얘기할 때 전 장인의 얼굴엔 시종일관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지난해는 그에게 특별한 해였다. 54년 붓 매기 외길 인생, 묵묵히 인내하며 걸어온 그에게 서울특별시에서 백모필장으로 제5호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서를 교부했다. 한국적 예술혼이 깃든 전통붓을 제작해온 그는 우리 전통붓을 바르게 재현하고자 전국의 여러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붓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연구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작한 붓이 예술성과 전통성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그는 동작 현충 미술대전 국가보훈처장상(2017년)을 비롯해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한민국 예술대제전 등에서 수차례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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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규 장인이 제작한 붓들(백산필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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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붓 만들기 체험 중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전상규 백모필장, 우)백산필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전상규 백모필장(백산필방 제공)
 


전통붓의 우수성 세계에 알리고파
전상규 장인은 지난해 5월 인사동 사거리에 있는 와담빌딩에 ‘백산필방’을 마련했다. 중국산이 넘쳐나는 인사동 거리에 우리 붓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바람이고 세계로 알려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인사동 유일의 실제 붓 만드는 공방, 박물관 성격을 갖춘 갤러리, 붓쓰기 체험장으로 꾸며진 ‘백산필방’을 차렸다. 이곳은 우리 붓을 세계에 알리는 장으로 출발했고 젊은 세대에게 전통 붓을 알려주는 소통과 교감의 장이 되고 있다. 그는 한글 붓을 일본에 수출하고 있는 입장에서 중국산이 인사동에 넘쳐난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국산 붓과 중국산 붓의 차이를 설명하는 전 장인의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갔다.

“값싼 중국산 붓에 밀려 우리 붓이 설 자리가 사라지면서 장인들의 설 자리도 잃고 있어요. 우리나라 붓은 기후가 좋다보니 붓을 만들면 붓이 부드럽게 올라가요.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은 털 재료 자체가 무겁거든요. 기름도 약품으로 빼기 때문에 수명이 짧아요. 그러나 우리 털은 친환경으로 기름을 빼기 때문에 확실히 차이가 나요.”

이러한 맥락으로 그는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재전공 지도자 과정을 통해 만학의 길을 걸었고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등을 찾아 한국, 중국, 일본 등 3국의 전통붓을 비교 조사하는 일에 매진했다. 침체되어가는 우리 전통붓 시장의 활성화와 우리 붓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것을 사명감으로 여기며 그는 지금도 하루하루 붓 매기에 열정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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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이 좋으면
붓이 사람따라 가는데
붓이 안 좋으면
사람이 붓을 따라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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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살피는 전상규 백모필장(백산필방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