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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람 윤호상 작가

소망을

조각하다


글, 사진. 백은영 사진제공. 윤호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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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없었다. 그저 마음속의 병이 자꾸만 커져 가는 듯 하루하루의 삶이 버거웠다. 어쩌면 너무 어린나이였기에 삶을 이겨낼 방법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런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족 그리고 조각이었다. 그렇게 열여덟 나이에 처음 조각을 시작해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그는 무형문화재 제7호 보유자 소목장 방대근 선생에게서 사사했으며, 목소장으로부터 얼레빗 제작에 대한 기능을 전수받는 등 예술창작 활동의 다양한 분야에서 부지런히 배우고 그 실력을 갈고 닦았다. 이제 남은 것은 소목장으로서 걸어온 그의 삶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머지않은 시간, 그에게 들려올 좋은 소식이 자못 기대된다.

신앙, 작품의 밑바탕이 되다
5월의 첫날 윤호상 작가를 만나기 위해 전북 진안에 있는 창작공예공방으로 향했다. 폐교를 활용해 만든 공방이 가까워지자 나무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온통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서니 왠지 심신마저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공방의 미닫이문을 열자 유독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노아의 방주’다. 그가 만든 두번째 방주다. 처음 제작한 작품은 지금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교회에 전시돼 있다. “한 20년 전쯤 대전 갈마시장에 처음 작업실을 열고 의뢰 받았던 작품 중 하나가 ‘노아의 방주’였어요. 한 한달 보름 정도 작업했던 것 같아요. 당시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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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를 설명 중인 윤호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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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평화 NGO인 (사)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이 2013년 5월 25일 공표한 ‘세계평화선언문’에 감동해 만든 작품
 


어느 날 그는 당시 다니고 있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성막과 노아의 방주를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지점토로 만들었던 성막은 다 깨진 상태에다 수리비용도 만만치 않아 보류하고, 노아의 방주는 수리할 부분이 거의 없어 유리관에 넣어 빈티지한 상태로 전시하기로 했다.

“그 일이 ‘노아의 방주’를 만들고 싶은 계기가 됐어요. 보다 더 리얼(정교)하게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창조과학회에 계시는 분이 방주를 의뢰하신 거예요. 그렇게 첫 번째 방주를 만들게 됐죠.”

그가 만든 첫 번째 방주를 보지 못한 것이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또 그의 신앙이 더욱 성장한 만큼 두 번째 ‘노아의 방주’는 무엇인가 더욱 특별해 보였다.

“두 번째 방주를 만들 때는 첫 번째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 고민했어요. 나무부터 고재를 사용했어요. 짐승들을 나누어 태울 수 있는 우리도 칸칸이 만들고, 짐승도 태울 수 있을 만큼 많이 만들었어요.”

그렇게 완성된 방주는 대전 창조과학회의 부탁으로 빌려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인디언들이 노아의 방주를 그린 석판을 목판으로 만들어 탁본으로 찍을 수 있게도 만들었다. 이 목판은 창조과학회 행사 당시 탁본으로 찍어 갈 수 있는 체험행사에도 사용됐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방주를 살펴보니 특이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암수를 짝지어 놓은 짐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늘을 향해 두팔을 벌린 사람들과 나팔을 불고 있는 일곱 천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안에는 작가의 남다른 뜻이 담겨있다.

“한동안 노아의 방주를 전시해 놓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짐승 모양의 조각품들이 상당 부분 유실됐죠. 후에 지금의 작업실로 가져 오면서 ‘아~이제 (방주를) 구약에서 신약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방주에 탈 짐승을 사람으로 바꾼 것이죠.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지금 보시는 방주에요.”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방주에 새겨진 일월삼봉도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글씨다. 일월오봉도가 아닌 일월삼봉도의 산 위에 내려온 해와 달 그리고 산 사이로 흐르는 두 줄기의 물이 상징하는 의미가 궁금해졌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보좌가 이 땅 가운데 임하시고 그 보좌를 중심으로 흐르는 물은 생명수 강가를 상징하고 있어요. 방주에 탄 사람들은 성경 요한계시록 4장의 영계 하나님의 보좌 형상과 계열 중 24장로와 7영,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2지파를 표현한 거예요. 또 계시록 15장에 보면 만국이 와서 경배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처럼 만국의 정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모습을 형상화했어요.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평화의 세상.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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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 찾아온 희망
윤호상 작가의 고향은 전북 진안이지만 정작 진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금도 그는 고향 마을을 찾아갈 수 없다. 용담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이 그가 나고 자란 곳이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고향. 가족은 그 길로 대전으로 터전을 옮겼다.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진로에 대한 고민과 깊어진 우울증 등으로 지독한 방황을 했었어요. 용담댐 건설로 마을도 수몰 위기에 있었고, 앞길이 막막하다보니 잘못된 마음을 먹기도 했었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았던 시절. 삶의 끈을 놓으려던 순간 마주친 어머니의 눈. 순간 너무 죄스러운 마음에 그 길로 집을 떠나 친구 집에 얹혀 지낸 적도 있던 그다. 그런그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었던 건 어머니 덕분이었다.

“아들이 조각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신 어머니께서 어느 날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미시는 거예요. 고향 땅 수몰 후에 나가 살 집을 구하러 대전에 가셨다가 저처럼 나무를 다룬다는 분의 연락처를 받아오신 거죠. 현재 무형문화재 제7호 보유자 소목장 방대근 선생님과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거죠.”

IMF가 터진 후라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스승이나 제자나 형편이 어려운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도제수업 몇 년이 지나서는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틈틈이 부모님 댁 일을 도와드리면서 생활을 유지했다. 그렇게 60개월의 사사 기간을 거친 후 그는 대전 갈마동 갈마시장 안에 작은 작업실을 얻었다.

“당시 경기가 어렵다보니 들어오는 주문이 많지 않았어요. 그곳에서 제가 하고 싶은 작품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사이 첫 번째 노아의 방주를 만들게 됐던 거죠.”

삶의 끈을 놓고 싶을 만큼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사랑, 조각과 예술을 향한 열망 그리고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되었던 신앙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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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놓치고 기회를 잡다
“나무를 다루면서 소원했던 것 중 하나는 전통문화대학에 들어가 더 체계적으로 배워보자는 거였어요. 이미 무형문화재 이수증도 갖고 있고 여러 스승에게 사사했던 경력이 있어서 추천서만 있으면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죠. 그런데 그만 원서접수 기간을 놓치고 만 거예요. 모든 서류들이 준비돼 있었는데 그걸 확인 못했던 거죠.”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상심에 빠져 있던 그에게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문화연수원에서 진행하는 ‘문화재 수리・복원 전문인 양성과정’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전통목칠공예 기능 전승 및 목조 문화재 수리・복원 전문가 양성과정을 통해 목칠공예 등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에게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당시 소목만 10년 이상 해왔던 윤 작가 자신의 실력도 좋았지만, 낮은 자세로 배우고 익히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도 적지 않았다. 때론 조각만 30년 넘게 해온 다른 교육생보다 연꽃 조각을 더욱 얇고 정교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시간은 좀 더 걸렸지만 말이다.

“무엇인가 하나를 만들더라도 정말 최고로 만들고 싶었어요. 2년 과정의 한국전통문화학교에 들어갈 때도 성경을 한 번 다 읽고 갔어요. 무엇이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문화재 수리・복원 전문인 양성과정’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만든 것은 씨앗 모양의 접시다. 옻칠을 아홉 번이나 입힌 씨앗 접시는 생명을 주시고, 좋은 기회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옻을 타는 그였지만 얼굴과 몸이 퉁퉁 부으면서도 옻칠을 배우는 일이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좋게 본 교수님이 제자 삼는 일도 있었지만, 그곳에서 때로는 종교로 인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불교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지만 삶의 버팀목이자 창작의 원천이기도 한 신앙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종교는 바꿀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을 겪으며 지낸 2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는 “10년짜리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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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윤호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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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성경 요한계시록 10장의 내용을 조각한 작품, 우)2010년 8・15 광복 65주년을 기해 공표된 ‘조국통일선언문’의 내용으로 제작된 작품
 



그는 고향인 진안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지만, 임실에서도 ‘나무와 사람’이라는 문화공방을 열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진안보다는 교통편이나 입지 조건이 좋은 임실에 예술학교를 세워 후학들을 양성하고 임실을 예술의 고장으로 만드는 것이 그가 세운 목표다.

“젊은 예술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도 만들고 카페 갤러리도 만들어 예술활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누구나 고르게 문화를 향수하고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람 윤호상 작가. 그가 꿈꾸는 세상, 그가 그리는 예술의 고장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그의 꿈이 하루속히 이루어져 다시 한 번 만나는 날을 기대하며, 그의 꿈에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