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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와 각이

한몸을 이루다


호산 김주연 서예서각 명인

글. 백은영 사진. 이현복 사진제공. 호산 김주연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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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은 정말 묘한 숫자이다. 아홉을 쌓아 놓았기에 넉넉하고,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에 헛헛하다. 그 아홉이 지나면 또다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기에 불안하기도 하다.”

<아홉 살 인생(위기철)>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읽은 지 10년 남짓 된 이 책이 문득 떠오른 것은 호산 김주연 명인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다. 책과 김주연 명인의 연관성이라고 해봐야 ‘아홉 살’이라는 숫자밖에 없지만 말이다.

호산(湖山) 김주연 명인은 지난 2017년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주최·주관한 한국예술문화명인 인증식에서 공예 서각 부문 ‘전통서각(제17-04-12-09)’ 명인으로 인증받았다. 이미 2015년 (사)한국서화협회서예, 서각 명인(제153-002호)으로 그 재능과 예술성을 인정받은 그는 제19회 세계서 법예술대전에서 종합대상인 대통령상, 제53회 대현율곡 전국휘호대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또한 자신의 호(號)를 딴 ‘호산서체’로 유명한 작가다.

부슬비가 살포시 내려앉은 저녁 어느 날, 김명인을 만나기 위해 강원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위치한 ‘초은산방’을 찾았다. ‘초은산방’은 그의 스승이자 서각 명인인 단초 심종보 선생의 작업실이자, 스승과 함께 후학들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다.

‘초은산방’에 들어서니 흠씬 밴 나무향이 코끝을 스쳤다. 작업실 사면을 가득채운 솟대와 장승, 서각 작품들이 뿜어내는 향과 작업을 위한 공간들이 온통 나무뿐이니 당연한 일이다. 귀한 손님이 왔다며 손수 커피를 내리는 심종보 명인에게서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모습이 보였다. 스승과 제자라는 위계질서 속에서도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동질감 때문일까 허물없어 보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홉 살에 만난 인생
김주연 명인이 서예를 처음 접한 것은 그의 나이 아홉 살 때다. 보통의 아홉 살 아이들이 아직 삐뚤빼뚤한 글씨로 받아쓰기를 하던 그때 ‘붓글씨’를 만난 것이다.

“국전에서 특선하신 (우리) 선생님을 친구로 두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가게 된 곳이 서예학원이었어요. 당시 안성 시내에서 서예학원을 운영하시는 친구 분을 찾아가 ‘잘 부탁한다’는 말 한 마디로 (저를) 등록시키셨죠.”

밖에서 한참 뛰어놀 어린 나이에 가만히 앉아 붓글씨를 쓰는 것이 힘들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밤에 잘 때면 천장에 글씨들이 아른거렸다”고 답하는 그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글자들을 봤을 정도였다. 지금도 글자들이 꿈에 나타난다고 하니 서예를 향한 그 사랑이 한결같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서예가 빠진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그는 “평생 붓만 잡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밤을 새워 글을 연습하고, 전시를 하고 대회에 나가기 위해 열심히 글을 썼던 시절을 지나 김 명인은 운명처럼 ‘서각’을 만나게 된다.

경이로운 신세계‘ 서각’
대학에 진학한 김 명인은 서각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나무에 글을 쓰고 새기는 모습이 경이로워보였다는 그는, 칼에 손을 베어가며 창칼로 글씨를 따내고 깊이를 맞춰 새겨내는 일이 재미있어 밤을 지새우기가 부지기수였다. 몇 년을 음각, 양각, 음양각, 음평각를 꾸준히 익혀온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서각을 좀 더 깊이 있게 배우고 싶어 몇 곳을 찾아다녔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늘 그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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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각 연습은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서예를 주로 했던 저는 1996년부터 서예 강의를 시작해 2001년에 용인 양지 초등학교 앞 건물에 호산서실을 열어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김 명인의 글씨를 알아본 사람들의 요청으로 현판 작업도 많이 할 수 있었다. 오세암 사찰의 ‘기도접수처’ 현판도 그의 작품이다. 2016년에는 발왕사 현판 ‘대웅전, 산신각’을 새겼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현판 작업과 함께 SBS 드라마 <조선연애사> 서각 판각을 진행하기도 했다.

호산서실을 운영하며 서예, 서각 강의와 함께 후학양성을 하던 그였지만 여전히 서각에 대한 부족함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한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스승’ 단초 심종보 선생을 만나게 된다.

“선생님이 계신 곳이 조금 멀기는 했지만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서각을 향한 열정이 불붙듯이 피어올랐어요. 시간이가는지, 오는지 모르는 그런 날들이 계속됐죠. 늘 설레는 마음으로 작업실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시작된 단초 심종보 명인과의 만남은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겼다. 이제는 같은 길을 걷는 동료와 같은 사이이기도 하지만,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고 했던가. 여전히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많은 단초 심종보 명인이다. 김 명인 역시 지금의 모습에 안주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스승의 조언을 새겨듣는 모습이 인터뷰 현장에서도 느껴졌다.

“항상 전통서각의 매력에 빠져 지내던 제게 선생님께서 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명인을 권하셨어요. 연구반, 전승조교 절차를 밟아왔던 저는 선생님께서 말한 기회를 잡고 싶었죠.”

김 명인은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과 대외 활동 등을 토대로 엄격한 심사와 절차를 거쳐 2017년에 한국예술문화명인(전통서각)이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명인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연습과 창작활동을 쉬지 않았던 그다. 아홉 살에 붓을 잡은 뒤 40년 가까운 세월을 오롯이 서예와 서각에 쏟은 결과다. 그렇지만 여전히 작가의 길, 명인의 길은 너무도 길고 혹독하다. 오로지 예술성이 있는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싶은 그이지만, 삶은 또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느작가들이 그렇듯 그 또한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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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조가 높으면 화답(和答)하는 사람이 적다.’라는 곡고화과(曲高和寡)라는 말이 있어요. 대중성과 예술성, 간혹 둘을 갖고 제대로된 조화를 이루는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중의 기호나 시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자신의 색깔을 내면서 일관성 있는 작품 활동을 해가는 뚝심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요. 시류(時流)란 글자 그대로 한순간에 사라지는 불꽃과도 같은 것이기에 그것보다는 영혼을 담아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불후의 명작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호수 호(湖)에 뫼 산(山)을 쓴 그의 호(號) 호산(湖山)처럼 ‘자연을 벗 삼아’ 살고자 하는 그의 철학이 작품 속에 녹아나 더욱 많은 이들의 마음을 정화시킨다면 그것이 또한 그가 바라는 불후의 명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꺼지지 않는 열정의 근원‘ 즐거움’
2001년 호산서실을 운영하며 서예, 서각 후학양성에 나선 김 명인은 2014년 고려대학교 서예문인화 최고과정 강사로 활동하는 등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금도 꾸준히 개인전을 열고, 각종 대회에 출품하는 등 자기개발을 멈추지 않는 그다. ‘아무리 좋은 연장도 쓰지 않으면 녹이 슨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좋은 재능을 타고 났어도 연습과 창작활동을 게을리 하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도 있다. 마치 재능에 노력 그리고 즐기는 것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춘 호산 김주연 명인을 두고 하는 말 같다.

현재 김 명인은 (사)한국각자협회 경기지회장 및 상임이사와 경기전통화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국예술문화명인아카데미 원장으로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미 하와이, 일본, 중국, 터키, 베트남 등에서 초청전 시를 열며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는 그는 앞으로 전통과 현대서각을 구체화시키고 체계화시켜 서각의 맥을 영원히 이어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꺼지지 않는 열정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창작활동을 할 때의 그 ‘즐거움’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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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 김주연 명인과 그의 스승 단초 심종보(가운데) 명인이 전승아카데이 발표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