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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의 영롱한

에 빠지다


임충휴 나전칠기 명장


글.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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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충휴 나전칠기 명장
 


나전칠기를 처음 본 15세 소년은 바로 그 매력에 흠뻑 빠졌다. 빛에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뿜어내는 것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소년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껍데기는 지천으로 널려 버려지던 것이었는데 그 하찮은 것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을 보고 나전칠기 공예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나전칠기 대한민국 명장 임충휴(73)씨는 나전칠기 공예인의 길을 걷게 된 과거를 떠올리며 차분히 설명해나갔다. “제 고향 전남완도 바닷가에는 전복껍데기이나 조개껍질이 지천으로 깔려있었어요. 어린 시절 귀한 줄 모르고 갖고 놀던 전복껍데기가 나전칠기 제품으로 완전히 변신하는 걸 보고 반해서 시작한 지가 벌써 56년이 됐습니다.”

타향살이의 고달픔
어린 시절을 전라남도 완도의 한 섬마을에서 보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서울행이었다. 당시 완도에서 서울까지 오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4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금의환향하리라 결심하고 홀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시작한 타향살이는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신문팔이와 식당 배달부 등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전통 칠공예 기술을 배우면서부터다.

“기술을 배울 수 있다기에 들어간 곳이 경대 공장이었어요.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쉽지 않았죠.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하고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 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어요. 휴일도 한 달에 한 번뿐이었죠.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 행복했어요. 너무 모질고 힘들어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전복과 조개껍 데기가 나무와 옻칠을 만나 예술작품으로 탄생하는 감동을 잊을 수 없더군요. 힘들었지만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어요.”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엔 본인 재량껏 어깨너머로 선배들의 작업을 훔쳐보며 기술을 익혀야만 했다. 연습하고 싶어도 재료가 비싸서 못하고 밤에 몰래 연습하다가 걸려 맞은 적도 많았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하고 선배들의 속옷까지 손빨래하면서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있을 만큼 고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3년간 기술을 익히고 나서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게 됐고 월급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열심히 기술을 갈고닦아 드디어 28살에 공방을 차렸다.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그의 ‘옻칠’ 인생은 두 번의 위기를 맞았다. 바로 1978년 2차 유류 파동으로 인한 업계 불황과 1997년 IMF 사태였다. 특히 IMF 때의 타격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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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나비이층장
 

가장 어려울 때 초심으로 돌아가
“유류 파동으로 나전칠기 업계가 불황을 맞으면서 수금마저 이뤄지지 않아 몇 번이고 그만둘까 고민했었죠. 그래도 힘들었지만 잘 넘겼어요. 그런데 IMF 때는 정말 감당하기 힘들더라고요. 주변에 함께하던 나전칠기 공예인들도 다 그만두는 거예요. 부의 상징이던 자개장이 IMF사태로 중산층의 몰락과 함께 무너져 내리면서 서울경기옻칠조합원이 600명에서 20여 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죠. 3개월간 고심했었죠. 다 떠나니까.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배운 것도 없고 돈도 없고 제가 배운 기술은 오직 나전칠기 이것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못 하겠더라고요. 그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는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야말로 초심으로 돌아간다 생각했죠. 데리고 있는 직원 30~40명 정도를 다 정리하고 네사람 데리고 다시 시작했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하고 도전하며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임 명장은 2004년 고용노동부 ‘대한민국 나전칠기 명장’으로 인정받으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제28회 전승공예 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 옻칠 공예대전 금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한다. “노력 끝에 받은 ‘명장’이라는 칭호는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우리나라 명장 제도가 참 잘돼 있는 것 같아요.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희망을 주면서 동시에 책임감도 느끼게 하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 제도라고 생각해요.”

명장이 되기까지 힘들고 어려운 고비가 있을 때마다 그를 버티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의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14살 때 처음 서울에 와서 구두닦이, 신문 배달 등을 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8개월 만에 도망치듯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을 때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가 제게 말씀하셨죠.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임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인내’라는 두 글자를 품고 어려울 때마다 떠올리며 견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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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나전주칠목련사주함, 우) 나전포도당초문서류함
 

인내로 얻어지는 고귀함
나전칠기의 생명은 ‘옻칠’이다. 옻칠을 얇게 칠하고 말리고를 수백 번, 수만 번 반복해야작품 하나가 탄생한다. 나전칠기 하면 자개 장식이 많아 화려하게 빛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나전칠기에 대한 오해라고 임 명장은 말한다. “나전 칠기는 자개도 좋지만 칠이 잘돼야 해요. 칠을 어떻게 많이 하는 가에 따라 작품이 달라져요. 오히려 자개가 많이 안 붙은 게 좋죠. 자개가 많은 붙은 것은 작업하기도 쉬워요. 반면에 여백이 많은 게 작업이 어렵죠. 그래서 자개가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가격도 비쌉니다.”

옻칠은 습도와 온도에 매우 민감하다.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을 낼 수 있다. 보통 10~15번 정도 반복한다. 온도는 20~30도, 습도는 70~80% 적정선을 유지해야 하는 건조 환경도 간단하지 않다. 한번 칠에 천년을 간다는 신비의 ‘옻칠’로 만들어진 나전칠기 작품은 외형의 아름다움을 넘어 천연재료이기 때문에 방충·방수·방습 등의 기능을 갖춘 친환경 생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토피와 같은 피부 질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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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임충휴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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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령화조도
 

가르치는 보람, 후진 양성 매진
임충휴 명장은 현재 서울시 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며 배우는 학생들도 있고 취미나 취업을 목적으로 배우는 학생들도 있다. 이처럼 임 명장은 나전칠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가르치고 싶은마음이다. “남녀노소 누구든 적성에 맞고 인내심이 있으면 배울 수 있는 기술이 바로 나전칠기 공예에요. 학생 중에는 퇴직한 분들도 계시고 군 장성 예편 후 수업을 듣는 분도 계시는데 전시도 하고 작품을 팔 정도로 실력들이 출중해요. 그만큼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인생 이모작으로도 할 수 있는 분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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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살피는 임충휴 명장
 

임 명장은 젊은 학생들의 작품을 볼 때 보람을 느끼고 또 희망을 생긴다고 말한다. 나전칠기 업계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많이없다는 것. 현장에 기능인이 너무 없고 전부 고령화되다 보니 50세 정도는 현장에서 젊은 축에 속한다고. 그렇기에 젊은 세대들에게 가르칠 때 행복을 느낀다. 젊은 학생들이 만든 디자인을 보면 아주 참신하고 기발해서 놀랄 때가 많고 오히려 그들에게 배우는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임 명장. 열심히 하는 학생들을 보면 더 아낌없이 기술을 가르쳐주고자 하는 마음이 솟구친다. “나전칠기 공예가 힘든 분야인데 하고자 하는 젊은 학생들을 보면 기특해요. 우리나라 나전칠기는 외국에서도 인정하기 때문에 세계화가 가능하죠. 앞으로 정부에서 젊은 세대들이 전통의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저렴한 이자로 창
업자금도 지원해주면서 더 잘해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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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모란이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