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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선친의 명예

되찾겠다


민족서예가 장재설 선생


글, 사진. 백은영



순백의 거대한 광목 위에 대붓을 들고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글씨에서 강한 기운과 함께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그의 글씨에는 민족과 나라를 위한 그리고 선친(先親)을 향한 그리움이 공존한다. 한마디로 말해 혼(魂)이 담긴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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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설 선생 서예 퍼포먼스
 

‘동양의 쉰들러’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장용갑 선생
아버지의 신원회복을 위해
유명해져야겠다고 다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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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서예가 항심(恒心) 장재설 한민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해마다 3・1절과 광복절이면 광화문광장과 시청광장에 나가 서예퍼포먼스를 펼친다. ‘그리운 고국 어머니 품으로 통일광복만세’와 같은 문구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의 서예퍼포먼스는 국경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기꺼이 달려간다. 장 공동대표가 서예 퍼포먼스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선친의 독립운동 업적을 세상을 알리기 위해, 나머지 하나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아버지를 위해 이름을 알려야 한다”
장재설 공동대표는 서예가로서 이름을 알려야 했다.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유명해져야만 했다. 오롯이 선친의 신원회복을 위해서다.

장 공동대표는 ‘동양의 쉰들러’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고(故) 장용갑 선생의 4남 4녀 중넷째 아들이다. 장용갑 선생은 평생을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했으나 6・25전쟁 당시 80일간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선친께서는 학생 때부터 조국사랑 모임을 가지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정신과 항일운동에 전념하셨어요. 친구들과 함께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대를 만들고 일본군 사령관 충혼비 앞에서 웃옷을 풀어헤치고 기념촬영을 하는 등 일제에 대항해 우리민족의 자존의식을 보여주셨던 분이셨죠.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찍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던 선친이 6・25전쟁 당시 인민위원장을 했던 건 지역의 선후배와 은하면 면민들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어요.”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전국 단위로 점령한 읍・면・동은 부산과 제주도를 제외하고도 3천개가 넘었다. 북한군이 점령한 곳에서는 모두 잔인한 살육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중 단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는 곳이 장용갑 선생이 인민위원장으로 있던 홍성군 은하면이다. 또한 인민위원장으로 부역한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도 장 선생이 유일하다.

“선친께서는 생명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더욱이 무고한 사람이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죠. 당시 인민군들의 1차 표적은 경찰, 고위 공직자,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이었는데 살생부가 올라오면 아버지께서 미리 알려 피신하게 하셨어요. 전 홍성경찰서장인 전병석 씨가 총에 맞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직접 그 앞을 가슴으로 막아 목숨을 구하기도 하셨죠.”

이외에도 해경총장을 역임한 홍세기 씨, 홍성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전용안 씨를 비롯한 우익인사 수백 명이 장용갑 선생에게 목숨을 빚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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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서예가 장재설 선생의 서예 퍼포먼스
 

장재설 공동대표에 따르면 선친인 고 장용갑 선생은 일제에 맞서 홍성 일대에서 구국독립운동, 징용반대운동 등을 펼치며 항일운동에 앞장섰지만 6・25전쟁 당시 충남 홍성 은하면 인민위원장을 역임한 이유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후 유신체제에서의 긴급조치 9호법 위반으로 징역도 살았다.

일찍이 학창시절부터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찍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정도로 항일정신과 항일운동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이 두 가지 그림자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삶과 그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을 알기에 장 공동대표는 자신의 삶을 선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바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또한 ‘빨갱이’ ‘불순분자’로 손가락질 받으며 고초를 겪어야 했던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군 제대 후 어렵게 취직한 직장에서 첫 출근 28일 만에 권고사직을 당했다. 당시 부친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긴급조치 9호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기 때문이다.

“1975년 7월 어느 저녁 선친께서 광천시장에 다녀오시다가 버스 안에서 승객들 간에 양반, 상놈 격론이 벌어지는 것을 듣고 ‘요즘 세상에 양반, 상놈이 어디 있는가? 지금은 돈과 권력만 있으면 양반이 되는데 굳이 이야기 할 때가 아니다’ ‘1인 독재로 자유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말살됐다’는 말을 한 것이 화근이 됐어요. 이틀 뒤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돼 5년형을 구형받으셨죠. 재판 과정에서 6・25전쟁 당시 인민위원장을 했던 것이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죠.”

1980년 장용갑 선생은 김대중, 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3・1절을 맞아 사면 복권됐지만, 완전한 복권이 아닌 선거권만 복권된 반쪽자리였다. 이후 아들 장재설 공동대표의 항소 끝에 장 선생은 2013년 긴급조치 위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평생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던 ‘빨갱이’ ‘범죄자’라는 낙인은 끝끝내 지우지 못하고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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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 위해 싸우다
고 장용갑 선생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총명함을 보였다고 한다.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슬하에서 큰 형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탓에 학교에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아버지와 큰형수를 끈질기게 설득해 들어간 결성초등학교를 전교 2등으로 졸업하고, 또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투쟁등을 벌인 끝에 시험을 봐서 지금의 한밭대학교 전신인 홍성공업전수학교에 들어가게 됐죠. 당시 홍성공전은 3개 반에 각 12명씩 편성됐는데 아버지께서는 가구과에 속했죠.”

당시 홍성공전은 충남 일대에서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학교였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 속, 장 선생은 가구과 학생들을 독려해 조국사랑 모임을 갖고 독립을 위한 구국운동에 나섰다. 그 무렵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 여학생들을 희롱한 것이 발단이 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생은 구속된 광주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격문 수천장을 살포하고, 장날을 기해 벌이려고 했던 시위가 사회단체와의 합작 문제로 지연되자이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맘도 조선 넋도 조선 우리 조선이로세
에야 데야 우리는 다진다.
폭발탄들 무서 하랴 우린 조선이로세
에야 데야 우리는 싸우자.
강철같이 단결하자 우린 조선이로세
에야 데야 우리는 싸우자.


장용갑 선생은 이 시를 학내에 배포하고 배외 투쟁을 전개하다 왜경에 체포돼 일주일간 홍성경찰서에 구금됐다. 바로 이때부터 일제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 감시검속의 대상이 됐다.

1931년 7월 중국 길림성 장충현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 관민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만보산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한인 농민 다수가 상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반중사상과 함께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홍성에도 중국인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중국인이 하는 호떡집에 불을 놓으셨어요. 반감보다는 한민족을 함부로 멸시하거나 핍박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같은 거였죠. 이 사건으로 아버지는 또 홍성경찰서에 일주일 동안 구금됐다 풀려나게 됩니다. 훗날 정신없이 허둥대는 사람들에게 ‘호떡집에 불났냐.’는 말이 생겼는데 아버지 사건에서 유래됐다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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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석 판공실 신현상 비서실장에게 받은 답신
 

교과서에 실려야 할 사진
해방 후 장용갑 선생은 독립과 함께 하나의민족, 하나의 나라, 하나의 정부가 세워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좌우 이념의 대립과 남북의 진영논리로 다시 갈라질 위기에 처한 조국에 대한 우려와 고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친께서는 진정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촉구하는 서신을 백범 김구 선생님에게 보내셨어요. 주석실로부터 1946년 2월 16일 답신을 받았는데 선친의 서신 내용은 알 수 없고 답신 내용만이 남아 있어요. 당시 답신은 주석 판공실 비서실장인 신현상 선생에게서 온 것으로 그 내용이 곧 김구 선생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죠.”

답신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선생의 귀한 뜻을 주석에게 전달했으며 함께 새나라 건설에 공동 분투하자.’ 주석실 전용 편지지에 주석 판공실 직인이 찍혀 있다.

장용갑 선생의 독립운동을 증명하는 사료중에는 사진 두 장이 있다. 선생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사진이지만 무엇보다 당시 학생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선친께서 홍성공전 2학년 11명의 학생들과 깊은 산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시(詩) 한수를 적은 사진이 있어요. 선친께서 결성한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대가 일제의 눈을 피해 산사를 찾아 비밀 회합을 하고 항일 의지를 결속하는 자리였죠.”

사진 위에 조국독립을 염원하며 적어 내려간 짤막한 시에서는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묻어난다.

‘뜻 깊은 사찰/ 등지는 젊은이/ 한 떨기 모란꽃/ 버리기는 서러워’

시를 읊는 장 공동대표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듯했다. 장 공동대표는 시의 뜻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깊은 사찰에서 모임을 가진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짊어질 것이며 임금의 병풍에 친 모란꽃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주 독립을 버리기가 죽기보다 싫다’고 해석했다.

특히 “모란꽃은 꽃 중의 왕 꽃으로 임금의 병풍에는 모란꽃이 장식돼 있다. 또한 모란꽃을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한 사람, 한사람이 대표라는 뜻을 갖는다”면서 “목숨을바쳐서라도 자주독립국가를 버리지 않고 지키고 싶다는 결연한 의지가 묻어 있는 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평양기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하는 학생들이라고 설명한 교과서가 있어 이를 바로잡기도 했다”며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운동을하는 학생들이 모습이 담긴 사진을 쉽게 구할 수 없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본다. 선친께서 학우들과 함께 찍은 이 사진이 학생운동을 증명할 수 있는 귀한 사료가 될 것이다. 교과서에 실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라고 강조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국 각군에 세워진 일본군 대장 카게아키(천촌경명. 川村景明) 충혼비 앞에서 두 동지와 함께 웃옷을 풀어헤치고 찍은 사진이다. 천촌 경명은 압록강까지 진군해 원수의 칭호를 받은 인물로 그의 충혼비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자세를 취해야 했다. 장 선생이 그 충혼비 앞에 걸터앉아 웃옷을 풀어헤친 것은 우리민족의 자존의식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 1년 마다 거주지를 옮겨 다니기를 몇 번,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옥고를 치른 적도 여러 번이지만 장용갑 선생은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공적 내용에 대한 활동 당시의 객관적 입증자료 미비’가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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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설 선생이 아버지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이 사진과 함께 일본군 사령관 충혼비 앞에서 웃옷을 풀어헤치고 찍은
사진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주년 기념 100년사 사진전에서 공동 1등을 차지해 한동안 전시되기도 했다.

 



고(故) 장용갑 선생은 학생운동을 이유로 홍성공전에서 퇴학을 당했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아가 취직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퇴학이라는 말 대신 ‘가정형편상 자퇴’라고 기재하는 일이 많았다. 허나이 배려가 장 선생에게는 외려 살아오는 동안 걸림돌이 됐다.

선생이 다니던 홍성공전, 즉 지금의 한밭대학교에서 선생이 학업을 중단하게 된 이유를 알고 지금이라도 명예졸업장을 수여한다면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일에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들에게 이제라도 명예졸업장을 수여한다면 학교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다.

이에 장 선생의 아들이자 민족서예가 장재설 한민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당장 오늘,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선친께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실 것”이라며 “역사를 바로잡고 숨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찾아내는 일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앞장선다면 분명 이 나라는 더욱 밝아질 것이고 새로워질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가로서 한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아오신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 또한 한평생을 바쳐온 민족서예가 장재설 선생. 선친을 위해 유명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던 그는 지금 국내뿐 아니라 이탈리아, 필리핀, 뉴욕과 같은 해외에서도 개인전 및 서예퍼포먼스를 할 정도로 이름을 알렸다. 덕분에 평양에도, 북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일본의 조선대학교에도 방문할 수 있었다.

과거 명함을 교환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떨어진 명함을 주우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던 그였지만, 이제 많은 이들이 그의 글씨로 명함을 새기길 원하는 입장이됐다. 하지만 아직 그동안 해왔던 모든 활동을 멈출 수 없다. 장재설 공동대표는 말한다. 지금은 선친의 완전한 명예회복을 위해 마지막 스퍼트(Spurt. 짧은 시간 전력을 다해 빨리 달리는것)를 내야 할 때라고. 이 글을 통해 작게나마 그의 마지막 질주를 응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