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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를 전하다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글. 이지수 사진. 백은영


작가들의 숨결이 담긴 초고와 적지 않은 유품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다. 누군가는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했다. 1972년 남편(이어령 전 문화체육부장관)이 <문학사상>을 창간하며 문인 초상화 시리즈를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원고와 편지들을 모았다.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문학박물관을 열게 된 계기를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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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문학관 제1전시실에 전시된 한말숙 작가의 육필 원고
 

문학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이 집은 이어령 선생이 지었지만
재단은 내 퇴직금과 마지막 3년 치의
월급을 모아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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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숙 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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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지만 가야 할 길
평창동에 갔다. 영인문학관을 가기 위해서 였다. 북한산 등산로 같은 오르막길이 만만치 않았다. 정수리를 태울 것만 같은 햇빛 아래 약 20분간 언덕길을 올라가니 숨이 목젖에 와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발걸음은 가벼웠다.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지만 그동안 선뜻 나서질 못했다. 이제야 인터뷰를 핑계(?) 삼아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꼭 한번 오고 싶던 곳이었기에 무더운 날씨도, 긴 오르 막길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구나! 이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작은 교훈을 발견하게 되나 보다. 자신이 원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함에는 힘든 과정도 별 것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힘들지만 묵묵히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그곳에서 만났다.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수십년간 모은 다양한 문인들의 원고와 물품들은 빡빡한 도심 속 삶에서 많은 사람에게 문학이 주는 정신적 풍요와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강 관장은 2001년 서울 평창동에 120평 규모의 문학박물관을 짓고 남편 이 전장관의 영(寧)자와 자신의 이름 강인숙의 인(仁)자를 따서 ‘영인(寧仁)’이라고 지었다.

“문학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이 집은 이어령 선생이 지었지만 재단은 내 퇴직금과 마지막 3년 치의 월급을 모아 만들었죠. 정부의 보조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곳은 개인 문학관이에요. 재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문학관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계속 무산돼 결국 우리가 하게 됐어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귀중한 자료와 물건들이 다 버려질 것 같아서 안 할 수가 없었다. 문학관 개관 당시 강 관장은 인후암 수술을 받은 지 한 달이 안될 때였다. 병원에서는 성대에 무리가 가니 말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지만 박물관 개관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문을 연 지 18년째. 강 관장은 여전히 바쁘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귀중한 자료를 하나라도 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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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가 집필한 책과 소품들.
 

다양한 기획전시
개관 이후 대부분 기획 전시로 이뤄지고 있다. 전시 때마다 작품이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자리 배치, 전시 운용까지 새로 조직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영인문학관은 한 명이 아닌 다수의 문인을 두루 살피는 공간이기에 기획 전시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개관 이후 지금까지 총 40회 기획
전시를 진행해왔다. 지난해에도 故 김영태 시인의 편지들을 모은 문인 교신전에 이어 1960~1970년대 문인들의 육필원고를 보여주는 전시를 열었다. 강 관장은 김영태 기획전을 설명하며 당시를 회고했다.

“김영태 시인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종기 시인에게 보낸 편지 100여 통과 함께 많은 편지를 주고 가셨어요. 김 시인이 저를 수소문해서 보내준 겁니다. 제가 잘 간직할 거라고 믿고 주신 거니 보답을 해야죠. 문학관이 작가들에게 자료를 안심하고 기증할 수 있는 그런 의미 있는 곳이 되는 것에 뿌듯함을 느껴요. 그럴 때 가장 또 힘이 나고요.”

강 관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영인문학관 2001년 개관 기념 전시인 ‘문인 초상화 104인전’이다. 1971년 이 전 장관이 <문학사상>을 창간하면서 그 표지에 화가의 초상화를 싣게 했고 그 104점을 모아 마련한 것이 영인문학관의 첫 전시회다. “문단과 가깝게 지내온 저명한 화백들에게 좋아하는 인물을 선정해 그리도록 부탁했어요. 문인 초상화들은 그 문인의 얼굴은 물론 그의 시와 소설 세계까지 그린 것이라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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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문학관 제1전시실에 전시된 작품들
 

40번째 전시회에선 1960~1970년대 문인들의 육필원고를 소개하는 기획전을 열어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복사기도 보급되지 않고 마감에 쫓겨 여벌의 원고를 만들 수가 없어 대부분의 작가는 파지를 제외하고는 육필원고를 소장할 수 없었다. 출판사나 잡지사 역시 규모가 작아 수장고가 없어서 보관하기가 어려워 육필원고는 세월이 지나면 소실되기 일쑤였다. 영인문학관은 이 전 장관이 보관해둔 작가 84명의 원고를 선보였다.

“육필원고에는 작가의 성격, 솜씨, 기분과 정신 그리고 그들이 겪은 인고의 시간이 그대로 반영 돼요. 그만큼 글씨는 그 사람을 대변하는 것으로 육필원고를 통해 작품의 다른 이면과 중요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기록물이죠.”

1933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쿄(東京)대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했으며 건국대 교수와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현재는 건국대 명예교수다. 저서로는 논문집 <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 <김동인>, <자연주의 문학론1>, <자연주의 문학론2>, 수필집 <언어로 그린 연륜>, <생과 만나는 저녁과 아침>, <겨울의 해시계>, <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 <아버지와의 만남>, <어느 고양이의 꿈> <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문명 기행 내 안의 이집트>,<셋째 딸 이야기>, <서울, 해방공간의 풍물지>, <민아 이야기>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의 <25시>, <키랄레사의 학살>과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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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가 집필할 때 사용하던 책상과 소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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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문학관 정원에서 촬영 중인 강인숙 관장
 

그는 올해 (사)한국박물관협회가 선정한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 원로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국 근대문학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하는 종합문학박물관을 남편 이어령 전 장관과 공동 설립·운영하며 문학 자료 유실방지, 자료 체계화 등 근대 문학발전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았다.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은 관람객들이 찾아줄 때다. 멀리 제주도나 거제도에서 방문하거나 휠체어를 타고 온 나이 지긋한 교수, 손자를 봐주고 있는 나이 많은 문학소녀의 관람은 그가 문학관을 계속 운영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 수도권은 물론이고 먼 지방에서 새벽차로 올라와 몇 시간씩 전시품을 정독하고 가시는 노인분들을 접할 때마다 저절로 경외심을 품게 된다고. 하루에 관람객 한 사람만 와도 문학관은 존재의미를 가진다는 게 강 관장의 생각이다.

올해 가을에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0~1960년대 활동한 장용학, 최인훈, 오상원 작가 3인전을 열 계획이다. 이 시대 문학 속에는 전쟁 직후 격변의 현실 속에서 인간의 삶과 그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작가들이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소년 시절을 보냈고 민족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후 폐허가 된 삶의 터전에서 새 삶을 가꿔나가야만 했다. 가치개념이 붕괴되고 꿈과 이상이 상실되어버린 현실이 문학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 있다.

“50~60년대 작품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 사회와 나와의 문제 등을 전시 후 혼란 속에서 찾아냈기 때문에 작가마다 추구하는 방향과 관점은 다르지만 기존 작품과 또 다른 새로운 접근들이 눈에 띄죠. 아주 새로운 문학들이 나온 시기에요. 작품으로 그 시대를, 그 시대를 작품으로 조명해보는 시간이 될거에요.” 강인숙 관장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