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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빛깔 조각보에

담긴 명장의 삶

김순희 초전섬유·퀼트박물관장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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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보 바느질 기법 중에 ‘삼침’이라는 게 있어요.
세 번 잘 생각하고 세 번 잘 참고 삼 년간 최선을 다하면 뜻을 이룬다는 의미에요.
바느질 하나에도 삶의 지혜가 담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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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섬유·퀼트박물관 개관 20주년 ‘2018 세계인의 퀼트·조각보 서울에 오다’ 전시회가 열린 가운데 테이프 컷팅식하는 김순희 관장
 

운명처럼 시작된 편직 인생
대한민국 편물명장 1호, 김순희(87) 초전섬 유·퀼트 박물관장은 우리 조상들의 삶과 지혜와 철학이 오롯이 담긴 편물 기법을 해외에 알리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이화여대 사범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교육학 석사이기도 하다.

교육자의 길을 걸었을 법한데, 바느질과 인연을 맺어 명장까지 됐다. 어떤 사연일까.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막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죠.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장학금도 받을 예정이었고…. 그런데 그때 집안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어요. 유학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고민 끝에 3년 정도 학비를 마련해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편물 가게를 열었어요.”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김 명장은 초등학교 때부터 해왔던 바느질 솜씨를 살려 1957년 9월 서울 충무로에 ‘제일편물’이란 이름으로 편물가게를 열고 장사를 했다. 그렇게 운명처럼 그의 편직(編織) 인생이 시작됐다.

그러나 완고한 명문가였던 집안 어른들의 반대는 극심했다. “진사(進士) 집안 딸이 웬 직물이고, 웬 상업이냐?”며 가문의 체통이 있지 장사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반대하는 문중 어른들에게 하루가 멀다고 불려 다니며 시달려야 했다. 3년째 되던 해에 그는 결심했다. ‘전시회나 한 번 하고 그만두자’고.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참가했던 전시회. 이곳에서 그는 기적 같은 일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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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8 세계인의 퀼트 조각보 서울에 오다’ 특별전에 전시된 해외 조각보 2. 민속의상 인형 전시실(초전섬유·퀼트박물관 제공) 3. 초전섬유·퀼트박물관 입구(초전섬유·퀼트박물관 제공) 4. 덕혜옹주 복식 재현(초전섬유·퀼트박물관 제공)
 

“신세계백화점에서 첫 편물개인전을 열었어요. 전시에 오셨던 경기여고 교장 선생님이 제 작품을 가리키며 학교 체육복으로 하고 싶다고 하셨죠. 감색 바탕에 흰색, 밤색이 들어간 스웨터 상의였는데 거기에 하얀 바지를 입으면 되겠다며 말이죠.” 그가 출품한 스웨터가 경기여고 최초의 체육복이 된 것이다. 경기여고 스웨터 체육복은 당시 매스컴의 빅뉴스로 보도되기도 했다. 체육복 주문은 밀려들었고 1961년 10월 15일 경기여고 영매 표창을 받았다.

그의 명성은 높아져 갔지만 집안의 반대는 여전했다. 그는 집안 반대를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학원을 열었다. 1962년 제일편물학원을 설립했다. 상업은 안 되고 교육업은 된다는 집안 어른들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63년 일본 편물작품 발표회가 끝나고 문화복장학원을 처음 방문한 자리에서 학원 간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1998년 10월에는 자신이 50여 년 살아온 남산동 주택을 개축해 초전섬유·퀼트박물관을 열었다. 이곳엔 조선왕조 궁중의상과 세계의 민속 복식, 전통자수 및 보자기, 조각보, 장신구, 김 관장이 수집한 세계 각국의 민속 복식 인형 등 1700여 점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세계 4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50여 회의 해외전시회도 열며 우리나라 섬유예술을 알리는 데 힘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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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올림픽 산증인
1963년 일본 유학은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유럽에 견학 갈 기회가 생겼다. 1964년 일본인 동료들과 유럽으로 학습여행을 떠난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뜻하지 않게 운명과도 같이 국제기능올림픽대회를 처음 접하게 됐다. 당시 국내에선 기능올림픽대회의 존재도 알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세계 각국에서 모여 각자의 기능을 뽐내는 경연장이라니. 국제기능올림픽대회는 김 관장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기능올림픽을 밀어붙일 수 있도록 기초를 제공했다. 1966년 초대회장 故 김종필 전 총리를 추대, 제1회 전국 기능올림픽대회를 개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학습 여행에서 세계적 의상 디자이너 코코샤넬을 만난 일화도 들려줬다. 당시 코코 샤넬 패션쇼를 가게 됐는데 김 관장은 그곳에 고운 한복을 입고 갔다.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 동료 사이에 홀로 한복을 입은 김관장은 눈에 띄었다. 여름이라 남색 저고리를 입고 패션쇼장을 돌아보고 있는데 샤넬의 비서가 김 관장에게 다가와 “샤넬이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고, 김 관장을 만난 샤넬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무슨 옷이냐?”며 “정말 멋있다. 그 브이넥은 뭐냐?”고 물었다. 샤넬이 말한 브이넥은 한복 저고리의 동정을 보고 한 말이었다. 그 후 50년이 흘러 한국에서 한복과 조각보, 오방색 등을 모티브로 한 샤넬 패션쇼가 열린 것을 보고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생각을 했다고.

이방자 여자·덕혜옹주와의 인연
김순희 관장은 영친왕의 부인 故 이방자 여사와의 인연도 각별했다. “덕혜옹주가 돌아가시기 2, 3년 전이었죠. 1968년 일본에서 귀국해 이복오빠인 영친왕의 부인 故 이방자 여사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던 옹주가 근처 철쭉을 구경하던 모습을 뵈었어요. 옹주는 당시 3명이 부축해야 겨우
문턱 하나 넘을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쇠약했어요.” 뜨개질 취미를 매개로 이방자 여사와 친분이 깊던 김 관장은 낙선재에 들렀다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1912~1989)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이를 계기로 김 관장은 조선 궁중의상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고 1984년 이 여사의 제안으로 <조선왕조궁중의상>이라는 책을 펴내고 일어와 영어로도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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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섬유·퀼트박물관 내부 전경
 

또 일본 문화학원 오오누마 스나오 이사장과 제일편물학원 시절부터 50년간 맺은 인연을 토대로 일본에 있던 덕혜옹주의 전통옷 일부를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이 옷들을 2012년 12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덕혜옹주 탄생 100주년 & 환국 50주년 기념 전시회’를 통해 국내에 처음 공개했다. 당시 들여온 당의, 홍색 스란치마, 풍차바지, 반회장저고리 등 옹주의 유품 7점은 우리나라에 환수돼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2017년에는 초전섬유·퀼트박물관에서 덕혜옹주의 의복을 재현하는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덕혜옹주의 전통 의상 전시회는 제 숙원이었어요. 덕혜옹주와의 첫 만남 후 마음 한편에 자리했던 짐이 그제야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죠.”

낙선재 뒤뜰 철쭉꽃을 구경하러 갔다가 우연히 처음 모습을 보게 된 덕혜옹주의 모습을 오랜 세월 마음에 담아두었던 김 관장. 그것은 어느새 의무감으로 자리 잡았고 전시회를 통해 어느 정도 이뤘다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러나 김 관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조선왕조 궁중의상과 덕혜옹주의 의상 전시회를 일본에서 열어야만 제 의무를 다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그 옷들이 그냥 사장돼 버리잖아요.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타까워하는 그의 표정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궁중의상은 그 나라 특유의 전통을 전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니까 우리에겐 정말 소중한 것들이죠. 또 우리 조각보는 둥글고 모나고 네모난 것을 허물없이 감싸줘서 품에 안는 듯 하는 것이 알록달록한 자식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 같죠. 펼치면 넓어지고 접으며 작아지는 보자기의 의미가 참 위대해요. 우리의 소중하고 귀한 것들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복의 옷자락은 곡선이에요. 둥글게 천을 잘라 옷을 짓고 나면 항상 자투리가 남게 되죠.
옛사람들은 그런 자투리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 아름다운 조각보를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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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의 소녀시절 당의(초전섬유·퀼트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