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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연을
귀금속에 담다

이순용 귀금속 세공 명장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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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으로 형태를 잡고 천연사파이어를 사용한 날개와 블랙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몸통의 나비.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오를 것 같다. 화려하게 피어난 산수유는 봄을 느끼게 하고 아름다운 백합을 찾는 황금 여치는 자연의 미를 느끼게 한다. 귀금속 가공의 최고 기술을 갖고 있는 이순용 명장(65)은 한국의 자연을 작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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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손재주
이순용 명장은 경북 영덕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였다. 농사철에 이 동네 저 동네 서로 품앗이를 할 때 아버지는 동네마다 대장간을 임시로 설치해 칼, 낫 등 농사기구를 만들어 도움을 줬다. 그런 아버지를 닮아서였을까. 어릴 때 직접 자전거를 만들어 타고 다닐 정도로 이 명장의 손재주는 남달랐다. “가난하다 보니 쇠 대신 나무로 세발자전거를 만들어서 타고 다녔어요. 나무를 보고 ‘아 저 나무를 베어 이렇게 하면 자전거를 만들 수 있겠다’라는 게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대로 만들었어요. 아무래도 손재주를 타고 난 것 같아요.”

1966년 영덕 신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 16세 때 돈을 벌기 위해 서울 마포에 살던 셋째 누나 집으로 올라왔다. 기술을 배워두면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1970년 초 종로3가에 있던 금은방(은성사)에 들어가 귀금속 가공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16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진학도 못 하고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월급도 없이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세공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돈이 없어 끼니를 굶을 때도 있었다. 선배들 잔심부름을 하면서 물어봐도 잘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중요한 기술 부분은 아예 못 보게 했다. 그가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연습 또 연습. 저녁 늦게까지 남아 열심히 연습을 반복하며 기술을 습득했다. “지금은 귀금속 가공 기술 관련 학교도 많이 생기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다 돼 있지만 제가 기술을 배울 당시에는 제대로 가르치는 학원도 없었어요. 금은방에 딸린 공장에서 잔심부름하면서 어깨너머로 세공술을 익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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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수유 2. 호박벌 3. 고향 4.일품나비
 



선택의 기로
1976년 지인의 소개로 대구로 내려간 그는 중앙통에 있던 보경당에서 8~9년 근무하다가 대구역 근처 교동시장에서 조그만 공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다 1987년 직접 운영하던 공장과 정금캐스팅이라는 회사가 합병해 (주)크라이스로 상호를 바꿨고 그곳에서 공장장, 상무, 전무까지 올라갔다. 부사장까지 제의가 있었으나 13년 6개월 근무하고 1999년 12월 31일 그만뒀다. “IMF 때 수출 쪽으로 돌려 매출은 많았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직책이 높으면 좋은 줄 아는데 그게 힘든 거죠. 좋을 것 하나 없어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요. 밥을 먹을 때도 모래 씹는 느낌이고 전화벨소리를 들어도 겁이 났죠. 나만의 작품성 있는 것을 만들고 싶어 자영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당시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그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다고 이 명장은 회상했다. 안정적인 회사에 다니느냐, 개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느냐의 갈림길에서 고민이 무척 많았다고. “회사에 다니며 13년 6개월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나’라는 존재는 없었어요. 그래서 저의 작품을 사람들이 인정해 줄까하는 판단이 잘 서질 않았죠.”

인생의 전환점
1995년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광내는 기술(폴리싱)을 배우기 위해 1주일 정도 미국 LA다운타운에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던 회사에 가게 됐다. 광내는 기술을 연수하기 위해 갔다가 다이아몬드를 세팅해 가공하는 인비저블 세팅 기술을 보고는 그는 그냥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미국 연수 기간을 2달로 연장하고 한국에 없는 인비저블 세팅(Invisible Setting), C.Z(큐빅 지르코니아)캐스팅 기술 등을 배웠어요. 인비저블 세팅은 금속 부분이 보이지 않고 보석만 보이게 세팅하는 기술이죠.

한국으로 돌아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기술을 터득했어요.” 그가 인비저블 세팅을 이용해 브로치를 만든 것을 보고 당시 회사 사장이 한국현대공모전에 출품할 것을 제의했다. 인비저블 큐빅으로 목걸이, 귀고리, 반지를 제작해 ‘도시의 야경’이란 주제로 출품했고 대상을 받았다. 그가 공모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이후 그는 1996년 24회 일본국제진주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작품명 ‘이침 이슬 브로치’로 4위, 자유 부문 작품명 ‘바닷가 이야기 브로치’로 5위를 차지하며 동시 수상으로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1997년에는 ‘더 에어 쇼’란 작품명으로 25회 일본국제진주디자인 콘테스트 자유 부문에서 다시 한번 4위를 차지했고 2002년 6회 삼신국제다이아몬드디자인 공모전에선 ‘일편단심 브로치’로 은상을 받는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쥬얼리 디자이너로 명성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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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활동과 후학양성
각종 작품전으로 귀금속 세공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00년 9월 대구과학대 보석디자인학과가 주최한 1기 귀금속디자인전문가 작품전 참여를 시작으로 그해 12월에는 서울 가나아트 갤러리에서 15회 한국장신구디자인 협회전, 2001년 5월 서울 중소기업중앙회 중소기업과 전문대산학협동 디자인 전람회에 참여했다. 이 명장은 지금도 매년 8월이면 한 달간 경북 청도 와인 터널에서 정기적으로 ‘창금회’ 회원전을 갖고 있다. 2000년 설립된 창금회는 현재 명장 3명을 포함 19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2012년 3월부터 2016년 2월말까지 4년여 간우송정보대 강단에도 섰던 이 명장은 후학 양성에도 매진하고 있다. 1995년 서울산업대에 500만원의 대학발전기금을 기탁했고, 2003년에는 대구과학대 보석디자인학과와 산·학협동 협약서를 체결하고 평생 교육원 출강을 통해 자신이 개발한 세공기술인 왁스적층기법을 교육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기억 작품 속에
그의 작품 속에는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들어 있다. 어릴 때 들판을 다니며 봤던 이름 모를 꽃들, 곤충, 나비, 고향 초가집,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하던 쥐불놀이 풍경까지 이 명장의 어린시절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의 작품에 한국의 자연과 정서가 담긴 이유다. 그래서일까. 작품마다 스토리가 담겨있다.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 작품에 담긴 스토리에요. 예를 들면 ‘봄이 오는 소리’란 작품은 새로운 봄이 오면 또 한 해를 시작한다는 마음속 설렘을 매화꽃 브로치로 표현하고자 했어요. ‘고향’이라는 작품은 초가집에서 굴렁쇠를 굴리고 쥐불놀이하는 아이들과 들판을 뛰놀던 저의 어린 시적 추억을 되살리며 만들었어요. ‘아침 이슬’은 이른 아침 이슬을 머금은 개구리가 이슬을 안고 있는 자연의 청정함을 표현했죠.”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추억을 공유하며 아름다운 기억을 선물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의 작품에 담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