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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낱 돌도

깎고 깨고 다듬으면

작품이 된다


‘맷돌지기’ 정정교 석공예가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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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탕~” 일정한 리듬을 타고 정의 머리를 때리는 망치질의 울림이 온 사방으로 퍼진다. 그 울림을 따라 그저 볼 품 없고 육중했던 돌덩이는 자비로운 미소를 띤 부처가 되거나 역사 속 위인으로 환생하고 맷돌과 절구통 같은 아기자기한 생활 소품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정정교 석공예가는 약 20년간 돌과 소통하며 그곳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에게 돌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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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조각원, 안중근 외 11단지 동맹기념비 조형물
 

 


목표는 만능 석공예가
늦게 시작했다. 23세 때 입문했으니 이미 10대 때부터 시작한 사람들보다 많이 늦은 셈이다.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17호 김동철(석주 조각원 대표) 씨와의 인연으로 석공예에 입문했다. 남들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 결과 기능대회 뿐만 아니라 석공예 관련 미술 대전에서 다수 입상하는 등 누구보다 앞선 자타공인 실력자가 됐다. 석공예 계통에 만능이 돼야겠다는 생각에 필요한 자격증은 다 땄다. 석공예 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보유 한식석공 2274호, 문화재수리기능보유 석조각공 3393호, 문화재수리기능보유 쌓기 석공 4545호 등이 그가 보유한 자격증이다.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모아 전통 석공예 관련 NCS(국가직무능력표준)을 집필했다. 현장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석공예를 배우는 것과 같은 매뉴얼을 개발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도 들고 또 지금 근무하고 있는 석주조각원에서 공장장을 맡고있다 보니 모르면 안 되겠더라고요. 또 돌을 깎고 다듬는 일이기 때문에 안전사고도 예방하기 위해서 지게차 운전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했죠.” 정 작가는 도전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돌을 만지는 동안에는 그 어떤 잡념도 들지 않아 행복하단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개인전도 준비했다. 일과 끝나고 두 시간 정도를 투자해 개인전 3회, 부스개인전 2회를 열
고 자신의 작품들을 세상에 선보였다.

“앞만 보며 달렸어요. 결국 몸이 망가져 병이나서 고생도 많았죠. 그래도 돌만 만지면 평온해지고 잡념도 사라지니 천직인가 싶어요.”

그는 선조들의 생활용품을 재현한다. 맷돌, 절구, 약연, 다듬잇돌 등을 만드는 데 우리나라 전통의 멋을 살리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사용이 가능한 작품들이다. 문화적 가치와 실용적 가치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정 작가는 스스로 자신을 ‘맷돌지기’라고 소개했다. 개인전을 열때마다 ‘맷돌지기의 서울나들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 그의 개인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도 틈틈이 작품을 만들며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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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하지 않는 돌
돌에도 결이 있다. 작업할 때 이 결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정 작가는 말한다. 돌의 평면을 다듬는 작업인 ‘치석’을 할 때 이 결을 이용해야 한다. 한번 깎아낸 돌은 다시 붙일 수 없다. 오차가 생기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한다. 돌은 정직하다. 깎으면 깍는 대로 정성을 들이면 들인 만큼 그대로 표현된다. 정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 친 만큼 딱, 그만큼 떨어진다. 못생긴 돌,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돌이 자신에게 와서 작품이 되는 것을 보면
희열이 느껴진다는 정 작가다. “돌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체력적으로 힘들 때가 있어요.

큰 돌은 무게가 거의 100~200t까지 나가니까 큰 작업을 할 때는 체력적 소모가 상당합니다. 그런 작품 가운데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안중근 외 11인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들 수 있어요.”

‘안중근 외 11인의 단지동맹 기념비’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이자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작품이다. 지난 2011년 베테랑 석장들과 함께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를 제작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 세웠다. 크라스키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약 200㎞(두만강에선 북쪽으로 60㎞) 떨어진 마을로, 동북부 항일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단지동맹 기념비는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세운 비석이다. 인근 강물이 범람하면서 기념비가 자주 물에 잠겨 훼손이 심각해지자 2006년 원래 위치에서 1㎞ 떨어진 유니베라 회사 공장 앞 공터로 옮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역이 국경 지역으로 편입되면서 기념비를 다른 곳으로 옮겨 세우는 작업이 추진됐다. 이 기념비는 높이 4m, 폭 1m의 큰 비석과 높이와 폭이 각각 1m인 작은 비석으로 제작됐다. 안중근 외 11인 단지 동맹은 안중근 의사가 옥중수기 <안응칠 역사>에서 1909년 2월 11명의 동지가 항일 결사를 했다고 밝힌 것을 근거로 삼고있다. 단지동맹 기념비는 그가 가장 보람을 느낀 작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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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업실 2. 물확 3. 약절구 4. 약연과 옻칠
 



후진 양성 힘써
정 작가는 석공예 분야가 힘든 일이다 보니 배우려는 사람이 적다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조소 전공한 사람들이 직원으로 들어오는데 인원이 많이 없어요. 힘들어서 잘 안 하려고 하죠. 무던하게 평정심을 가지고 기술을 연마해야 느는 법인데 요즘 젊은이들은 빨리 가려고 하는 게 있어서 결과물이 바로 나오지 않으면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그는 석공예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체험학습 중심으로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가 지도교사로 가르쳐 전국대회에서 입상한 제자가 5명이다. 이는 자신이 메달을 딸 때 보다 더 기쁜 일이었다.

길에 굴러다니던 돌도 작업대 위에 올려놓으면 가치가 느껴진다는 정정교 작가. 돌은 그를 꿈꾸게 하고 기쁨을 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다. 어떤 돌이든 작품이 될 수 있기에 길을 가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깎고 깨고 다듬어 돌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