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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각,

행복을 아로새기다


고천高天 고은아 서각명인


글. 백은영 사진. 이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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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 <직지심체요절>은 우리나라의 인쇄기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또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인사 <팔만대장경>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인쇄술이 얼마나 빼어난지를 가늠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인쇄물을 위해 목판이나 금속에 글자를 새기는 ‘서각’ 기술은 인류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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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 번 툭 내리치는 것 같아도, 그 찰나의 순간 혼이 담긴다. 그렇게 수천수만 번의 망치질과 섬세하게 다듬는 수천수만 번의 손길이 지나면 비로소 작품 하나가 완성된다. 망치와 정 그리고 끌. 여기에 잘생긴 목판 하나만 있으면 매력적인 서각의 세계가 펼쳐진다.

나무나 금속 위에 글자나 시(詩), 그림을 아로새기는 일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한 번에 ‘툭’하고 떨쳐내기도 하지만, 선 하나, 글자 하나를 각(刻)하기 위해 여러 번의 망치질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서각은 서예나 그림과 같은 회화작품에 비해 긴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같은 작가의 글씨나 그림이라도 그것을 새기는 사람의 예술성이나 서각 기술에 따라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이것이 바로 서각이 가진 매력이 아니겠는가.

바람이 몹시도 매섭게 느껴졌던 1월의 어느 날 저녁, 서각계의 떠오르는 신예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양주로 향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천(高天) 고은아 서각명인으로 작년에만 (사)대한공예예술연합회가 주최·주관한 제10회 한국공예예술 공모전 및 문화관광 상품대전에서 종합대상인 ‘국회의 장상’과 제36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전통미술공예부문 서각 분야에서 작품 ‘첫사랑’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정도면 사실 ‘획기적인’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획기적인 일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남양주보건소 건강생활지원센터를 찾았다. 고천(高天) 고은아 명인의 또 다른 직함은 공무원이다. 공무원이면서 명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아마도 고천 선생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인터뷰를 위해 건강생활지원센터 문을 열고 들어가니 흰 가운을 걸친 고은아 명인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내 상담실로 사용되는 작은 사무실로 안내하며, 직접 커피를 내려준다. 로스팅한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원두라며 능숙한 솜씨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빨리 배우고 잘한다는 그의 말이 이 작은 손놀림에도 와 닿는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벌써 몇 번은 만난 사이처럼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도 타고 난 듯하다. 그래서인가. 그윽한 커피 향과 함께 시작된 인터뷰는 인터뷰라기보다는 언니와 동생이 주고받는 대화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남달랐던 손재주를 걱정하다
고은아 명인의 호는 고천당(高天堂)이다. 고천으로도 부르는데, 말 그대로 ‘높은 하늘에 있는 집(학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호가 가진 뜻이 참으로 높다고 하자,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호의 뜻을 물어봤을 때 사실 조심스러웠어요.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때였어요. 손재주와 영감이 남달랐던 손녀가 걱정됐던 친할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치악산 줄기 아래에 있는 국형사(원주시 행구동)에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주지스님께서 제 사주를 풀어보시고 지어주신 호가 바로 ‘고천당’이었어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호에는 사실 영적인 부분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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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인 단초 심종보 명인・호산 김주연 명인과 함께
 




옛말에 ‘여자가 손재주가 너무 좋으면 팔자가 드세다’는 말이 있다. 지금 들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옛날 어르신들 중엔 이 말을 철석같이 믿는 분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고천 선생의 할머니께서도 어린 손녀의 남다른 손재주가 걱정이었을 테다. 하지만 타고난 손재주와 예술성이 어디 감춘다고 감춰지겠는가.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어머니께서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는 명작 그림책 5권을 마루에 던져놓으셨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그림책은 어머니께서 어떤 분께 빌려준 돈 대신 받아오신 거였어요. 어머니께는 아무 소용없는 그림책일 수 도 있었지만 제겐 ‘혁명’ 그 자체였어요. 그 그림책을 본 후 그림의 매력에 빠져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죠. 그땐 공부도, 집안일도 뒷전이었어요. 그렇게 그림에 빠져있는 절 보시더니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제가 보는 앞에서 그 그림책을 찢어 아궁이에 태워버리시는 거예요. 어린 저에겐 충격이었죠.”

아이큐(IQ) 145인 머리 좋은 딸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던 어머니였기에 그림에 빠져 공부는 안중에도 없는 딸이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면서도 어린 고천은 반항인지 복수심인지 모를 감정으로 공부를 아예 접어버렸다. 여기에 더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를 피해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나무들과 소통하며 지내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혼자 산에 돌아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외려 나무의 정령들이 저를 지켜주고 있는 기분이었죠.”

공부를 접었기에 당연히 수업은 뒷전이고, 대신 교과서에 온통 그림을 그려 넣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교과서에 그림만 그리던 애로 유명했다고 하니 대단한 고집이다 싶다. 물론 그런 고집과 집념 그리고 그림에 대한 열망은 학창시절 미술계에서 많은 상을 수상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수상경력에도 어머니는 미대 진학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법관이 되길 바라셨기에 법대도 아닌 미대는 언감생심이었다. 이미 큰오빠가 서울에서 음대를 다니고 있었던 터라 어려운 가정형편에 사실상 대학진학은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미대를 가고 싶어 21살에 어머니 몰래 사촌언니가 자취하는 서울 청량리로 야반도주를 했어요. 그렇게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이 공무원이었죠. 그런데 미대는 야간이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림은 취미생활로 만족해야 했죠. 그래도 그림은 꾸준히 그려왔어요.”

서각, 인생이 즐거워지다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이 있었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이 또한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는 고천 고은아 명인. 억눌려 있던 예술에 대한 욕망과 삶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것이 서각이다.

“나무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다보면 어느덧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상념들이 사라져요. 서각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거죠. 마음을 비우게 된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작업한 뒤 결과물이 나왔을 때의 성취감과 희열은 느껴보지 않으면 모르실 거예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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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탱화 서각 작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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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을 통해 주 1회 2시간 정도 서각을 배우기 시작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장승을 깎는 한 명인을 접하게 된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달음에 그가 살고 있는 산방으로 향했다.

“산방에 들어서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탱화서각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죠. 그때 탱화서각을 하기 위해서라도 서각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그렇게 사부님과의 연이 시작된 거죠. 정말 주말마다 열심히 서각을 배웠던 것 같아요.”

고천 선생이 ‘사부’라고 부르는 이는 장승·솟대·서각으로 유명한 단초 심종보 명인이다. 단초 선생은 전통서각과 장승 명인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솟대(제30-0507119호)와 장승(제30-2009-0005986호) 디자인 특허를 내고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 스승의 그 제자라고 하던가. ‘사부’의 뒤를 이어 서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고천 선생의 꿈은 스승인 한국문화예술명인 단초 심종보 선생처럼 되는 것이다.

“제가 사부님처럼 되는 것이 꿈이듯이, 10년 뒤의 저도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어요. 10년 뒤에 저는 아마도 퇴직하고 작은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사부님처럼 재능기부 하며 살지 않을까 해요. 그게 바로 지금의 제 꿈입니다.”

이렇듯 확고한 꿈을 가진 고천 선생에게 또한 명의 스승이 있으니 호산 김주연 전통서각 명인이다.

호산 서체 특허출원으로도 유명하다. 두 명의 훌륭한 명인을 스승으로 뒀으니 이제 고천 선생에게 남은 일은 전수받은 서각 기술에 자신의 예술성과 혼을 더해 자식 같은 서각작품들을 세상에 많이 내어 놓는 일이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각작업을 하며 느끼는 감정과 서각만의 매력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도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과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말씀 중에 ‘만권의 책이 가슴 속에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는 말이 있어요. 좋은 서고를 위해 수없이 글을 읽고 결 좋은 나무에 도흔을 내며 망치를 수백 번, 수천번 두드리는 일은 무의미한 일상에서 제가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에요. 동시에 행복한 순간이자 삶이 달라지고 인생이 즐거워지는 시간이기도 하죠. 남들에게는 소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만은 행복이 될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찾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