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꿈을 그리다,
희망을 말하다

몽우 조셉킴, 그가 그리는 세상

글, 사진. 백은영 그림 제공. 몽우 조셉킴


01.jpg
 

02.jpg

<독수리>
캔버스에 유화 100호 F, 2004년 作 산하를 삼킬 듯한 거대한 독수리는 몽우 조셉킴의 이상향과 바람들이 가장 강렬할 때 그려지는 작품군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작품 중 대작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그의 예술사에서 예술성이 높은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독수리 그림은 특히 유럽의 컬렉터들이 소장하였다. 독수리는 고귀함과 권위, 왕권, 통찰력, 지혜를 상징한다. 독수리는 큰 맹금으로서 하늘의 제왕으로 불린다. 또한 굳건한 발은 사냥감을 제압하거나 갈기갈기 찢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독수리를 그릴 때 높은 하늘에서 아래로 돌진하는 소리와 번쩍이는 섬광을 느낀다고 한다. 


꿈을 꾸고 난 뒤에 그린 그림이 보기에 더 좋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어떤 압박도, 머리를 어지럽히는 그 어떤 상념도 끼어들 틈이 없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그의 세계는 마치 꿈속의 정원을 거닐 듯 아름답다. 몽환적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너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도 않다.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하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그림은 이미 충분히 친절하다.

어린 몽우, 그림을 택하다
넥타이를 맨 채 그림을 그리는 작가 몽우 조셉킴. 언제 죽을지 몰라 마지막 자신이 가는 길이 초라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베푼 배려다. 몽우 조셉킴은 제2의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로 불린다. 본명인 김영진보다 몽우화백으로 더 잘 알려진 천재화가다. 이제 갓 40을 넘긴 그이지만 그림과 함께 살아온 세월도 그에 버금간다.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 전 기억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몽우 작가에게 있어 가장 먼 기억은 두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작가는 창가에 앉아 햇살을 따라 춤추는 작은 먼지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두 살 무렵의 몽우에게 햇살에 반짝이며 너울거리는 먼지는 마치 꽃과 같았다. 그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장판이며 벽에 닥치는 대로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린 몽우에게 그것은 낙서가 아닌 그림이었을 것이다. 낙서의 정도가 심해지자 작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이 위에 낙서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때쯤 아버지는 벽과 천장까지 서예작품을 써서 붙이셨어요. 아버지 덕분에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쓰인 글자를 보게 됐고, 아무 것도 아닌 종이에도 표정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당시 작가의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했다. 눈을 감고 사진 찍은 사람들에게는 눈동자를 그려 넣어줬고, 작은 눈은 크게 만들어줬다. 잡티나 주름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버지의 손만 거치면 그렇게 모두가 선남선녀가 됐다. 자연스레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유독 사람의 얼굴 윤곽에 예민하셨던 아버지는 사진 찍는 일 외에도 틈틈이 초상화를 그렸고,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몽우 역시 한때는 초상화에 집착하기도 했다. 그렇게 남들은 기억조차 희미할, 아니 희미한 기억조차 없을 두 살 무렵부터 그림은 몽우 작가에게선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같은 존재였다.

눈에 띄는 사물을 똑같이 그리거나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이 있으면 즉시 그것들을 그려야만 마음이 안정됐던 어린 몽우에게 초등학교 교육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런 일상이었다. 무엇보다 몸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정신적, 육체적 병마와 싸워 내는 일도 어린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찼다. 오직 그림만이 전부였고,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흥미가 없었던 그였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공부 포기를 선언했다.

“11살 정도 됐을 때 백혈병 증세와 임파선, 식도, 혀와 입 안 전체가 하얗게 헐어버리는 증세가 심해졌어요. 염증이 심해질 때면 정신을 잃거나 정신이 몽롱해졌죠. 건강이 계속 악화되니 죽기 전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아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 아까웠던 그에게는 일분일초가 아까웠고 소중했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어린 몽우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건강문제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아지면서 어린 몽우는 집 겸 사진관인 아버지 가게에서 초상화 그리는 것과 사진 찍는 법을 배우고 가업인 전각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몽우는 그림 그리는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했다. 비록 짧지만 강렬하게 살다 가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말이다.

   

03.jpg
 

1. <해와 달이 덩실덩실 더덩실>
1. 4호 F, 2015년 이 작품은 해와 달을 동시에 묘사하고 닭이 하늘을 나는듯하여 이채로운 감정을 전달한다. 아침이 되자 밤이 지나가고 동이 틀 때의 닭의 환희를 노래한 작품으로 작가는 해와 달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밝아오는 세상을 표현했다.

2. <황금바다 물고기>,
2. 6호 F, 캔버스에 유채, 2015년 작가는 어느 날 황금바다에서 푸른색의 물고기가 유영하는 꿈을 꾸게 된다. 너무나 이채롭고 경이로워서 꿈에 깬 뒤 여러 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10여 년에 걸쳐 여러 작품을 그렸다. 하나의 주제를 향한 작가의 애착은 황금바다 물고 기라는 매개로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모두가 황금바다 물고기 처럼 부와 건강과 소망이 성취되는 삶이 되기를 희망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3. <가족의 기도>
3. 50호 F, 캔버스에 유채, 2004년 서명은 2004년도작으로 되어 있지만 작가가 애착을 가지고 계속 붓을 대어서 2015년에 완성되었는데 2017년 전시에 앞서 작업을 더 진행하여 이른바 13년 작업의 결과물이다. 가족이 사랑과 웃음꽃이 피어나고 이 가족의 기도가 나무를 타고 하늘로 상달되어 무수한 나뭇잎의 숫자만큼 이 가족의 소원과 바람이 성취되어 온 세상이 낙원이 되어 여유롭고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인생의 소중한 벗들을 만나다
그의 나이 14살에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몸이 안 좋아지시면서 세 살 터울의 형이 가장이 됐다. 어디로 튈지,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어린 몽우와 그보다 더 어린 여동생을 돌봐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서 형은 동대문에 전각공방을 열었다.

“전각과 인장 재료를 파는 도매상 안에 책상 하나를 놓고 전각, 인장 하청 일을 하는 작은 공방을 열었어요. 서예가들과 전각가들이 형의 예술적 구도와 정밀함에 놀라 일을 맡기기 시작했어요. 저는 형이 조각을 하면 다듬질을 했죠.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외모는 동양인인데 서양인 같기도한 특이한 모습의 사내가 들어와 “탈무드를 조각 하려는데 한국적인 조각기법에 관심이 많다”며 말
을 건넸고, 그렇게 유태인 ‘아브라함 차’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됐다. 형의 재능과 열정을 높이 산 유태인 스승은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했고, 15살 몽우 역시 그에게서 삶의 많은 교훈을 얻게 된다.

“책을 많이 읽고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어요. 여러 선생들의 말보다 책 한 권이 더 위대한 가르침을 여과 없이 가르쳐 준다는 말씀이 큰 충격이었어요. 책을 읽어야지만 그림의 깊이가 더 깊어진다고도 하셨죠. 그 이후 책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림 외에는 관심이 없던 그에게 책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바깥활동을 좀처럼 하지 않는 그에게 책은 또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통로였으며, 통찰력을 길러주는 스승이었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거나 마음이 어두워질 때마다 책은 또 하나의 그림처럼 그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했다. 때로는 상처를 싸매주기도 했고, 자기만의 동굴 속에 갇혀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그를 20년 넘게 곁에서 지켜본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오정엽 선생은 몽우 작가의 작품 세계가 넓고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다독(多讀)’에 있다고 귀띔한다. 실로 어마한 분량의 책이 그의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자양분이 됐다. 세상의 수많은 사상과 철학, 종교와 과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그것을 섭렵하고 분석해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이 엿보인다.

작가 몽우에게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한 오정엽 선생은 “이 시대의 문화와 미술에서 ‘헤비성향’을 가진 작가가 안 보인다. 여기서 헤비 성향이란 인간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기법의 기능을 이미 어려서부터 섭렵하고, 그 기능과 훈련이 채워져 있는 작가를 말한다. 그런데 몽우 화백이 바로 그 ‘헤비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미 어려서부터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 예를 들어 전각이나 서예 등의 대가를 스승으로 둔 작가는 흔치 않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아 배우고 노력한 화가는 드물다. 아니 한국에는 그만한 작가가 없다. 신기하게도 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작가가 바로 몽우 조셉킴이다. 오정엽 선생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그를 기억한다.

단 하루도 그림을 그리지 않은 날이 없던 몽우였기에, 영혼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라면 그 분야를 막론하고 배우고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기 위해 스스로와 씨름하던 그였기에 그의 작품세계는 뚜렷하면서도 다양하다. 작품마다 화풍은 달라도 몽우 조셉킴의 그림임을 알 수 있는 것. 이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관이 또한 일맥 상통함을 말해준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아무리 천재적인 성향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작가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런 관점에서 오정엽 선생은 “현 시대에 몽우화백 만한 천재적인 작가가 없다”고 말한다. 그가 미술계의 혁명이자, 문화의 혁명이라며 몽우 작가를 높이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 500점 판매 그리고 파산
몽우 작가는 본래 왼손잡이 화가였다. 20대까지 왼손으로만 무엇인가를 그리고 쓰는 전형적인 왼손잡이였다. 두 살 때부터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던 그가 지금은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손이 바뀌니 당연히 화풍도 바뀌었다.

왼손잡이 화가인 그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을 좋아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그가 왼손을 다쳐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됐을 때 등을 돌렸다. 화단의 평가도 냉정했다.

몽우 작가는 오른손으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니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정신적, 육체적 병마는 그를 좌절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가능성을 믿은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인 독일인 토마스 마틴 선생이다. 원래 미국을 본 활동지로 유태인과 아랍, 유럽에 풍부한 인맥을 둔 로비스트였던 그가 미술품과 보석 거래, 고미술 감정 등에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작품을 볼 줄 아는 뛰어난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유명 컬렉터의 눈에 인사동 길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던 몽우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스무 살의 그였다. 토머스 마틴은 몽우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사갔으며, 몽우를 보러 올 때마다 독일 현대미술, 유럽의 명화 등에 대해 설명해주곤 했다.

“당시 길거리 화가였던 제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셨어요. 인물 중심의 그림에서 벗어나 다양한 주제로 한국적인 깊이를 작품에 담는다면 놀라운 작품이 나올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곤 했어요. 제 작품에 사인을 남길 때 외국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Joseph Kim(조셉킴)이라고 남기면 어떻겠냐는조언도 해주셨어요.”



04.jpg
 

<화가의 꿈>
캔버스에 유화, 50호 F, 2002년 作 한 작품에 세 개의 시점이 담긴 그림으로서 그림속의 화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 그네를 타는 남녀모습이 그려졌다.

그림 속의 화가는 내면화된 인물이며 상단부의 두 그림은 작가의 소망이다. 상단부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남자의 모습이 나온다. 남자는 바이올린을 켜며 음악을 사랑하는 이에게 심장의 소리를 쏟아지는 별빛에 담아 보낸다. 두 번째 그림은 청아한 달빛이 비치는 그네에서 두 남녀가 손을 맞잡고 그네를 타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둘의 마음속에는 꽃이 피어나 밤을 사랑으로 번지게 한다. 세 번째 그림은 화가가 이 두 작품을 그리고 있는데 표정에서 보이듯 황홀한 행복감에 젖어 현실과 꿈을 구분 짓는 벽이 사라지는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캔버스의 화면 너머 모든 것이 그림이 되고 그림과 현실이 별들과 새들이 오가면서 꿈이 이뤄지고 있다.




그 무렵 몽우는 인사동에서 만난 재미교포를 통해 미국에서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그동안 그린 그림을 합치니 700여점 정도가 됐다. 주로 1호에서 2호, 조금 커도 4호를 넘지 않는 소품이었다. 자식과도 같은 그림들이 몽우의 곁을 떠나 바다 건너 미국으로 넘어 갔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록 작품에 대한 이렇다할만한 소식이 없었다.

몽우 작가는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며 가족들을 위해 가업인 전각에 전념하려고 했다. 바로 그때 토머스 마틴 선생의 활약이 돋보였다. 재미교포와의 연락을 통해 창고 보관비를 내지 못해 창고에 보관해 두었던 몽우 작가의 작품을 사용할 수 없었단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문제를 해결해줬다. 뿐만 아니라 작품 전시회도 열 수 있도록 도왔다. 그 결과 몇 년에 걸쳐 판매하려고 계획했던 작품이 단번에 500점이 팔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아트 포스터, 판화, 액자 하시는 분이 300점을 사셨고 크리스티, 소더비 고미술 전문 딜러분들이 50점을, 독일계 유태인들과 뉴욕 금융계 유태인들이 나머지 150점을 사셨다는 거예요. 고미술을 좋아하는 한 금융업자가 주최한 연말 유태인들 모임이 있었대요. 작품 감상도 하고 자선도 하는 파티였는데 그때가 마침 한국 고미술과 한국인 화가의 그림을 소개하는 시기였다고 해요. 이중섭, 박수근 선생님의 작품으로는 전시장을 가득 매울 수 없어 수소문하던 중 제 그림이 700점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성공의 기쁨도 잠시뿐, 그림 판매로 벌어들인 돈을 앤티크 가구공장에 투자했다가 그만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경제적으로는 더욱 어려워진 꼴이 되고만 것이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가 되다
그림밖에 모르던 그가 사업에 손을 댄 일은 인생의 교훈으로 남았다. 다시 그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뜻하지 않은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제가 왼손으로 그린 그림이 최고의 그림인 줄알았어요. 사진을 보고 그린 것처럼 똑같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우연히 어느 사진전을 보다 충격을 받았어요. 사진이 회화를 능가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그동안 그리던 그림은 사진을 보고 비슷하게 흉내 낸 것일 뿐 진정성이 없었던 거예요. 회화는 그저 사진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계속 저를 괴롭혔어요. 그러던 중 한 중소기업 사장님이 제게 초상화를 그려달라며 200만 원뭉치를 던져주는 일이 있었어요. 사진처럼 잘 그린다고 하니 한 번 그려달라는 거였죠.”

중소기업 사장의 초상화 의뢰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자신의 그림이 그저 사진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괴로웠던 그에게 ‘사진 처럼 잘 그린다’는 말은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었다. 그는 받은 돈뭉치를 불에 태워버렸다. 그리고선 은행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돈을 찾은 뒤 망치로 자신의 왼손을 내리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손이 다쳐 당분간 초상화를 그릴 수 없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의뢰비로 받은 돈을 돌려줬다.



05.jpg
 

<킹 다비드 (King David)>,
100호 F, 캔버스에 유채, 2016년 作 (시를 떠올리며 작사, 작곡을 하던 성경 속의 다윗을 현대적으로 표현했다)

성경 사무엘하 6장 12~21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다윗, 요셉, 모세와 같은 성경인물들을 그려왔다. 그러나 종교화로서의 의미보다는 개인의 특성들과 용기, 예술적 감수성, 성품들에 관한 존경의 의미로서 표현했다. 몽우 조셉킴은 종교의 구분 없이 성경의 내용이나 일체유심조와 같이 불교적 사상이 담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작가는 한 종교에 국한된 작품을 하지 않았다. 종교적 의미보다는 한 인간이 품은 큰 꿈과 고난을 이기어 현실을 바꿔나간 적극적 태도와 당대성에 큰 의미를 두었다.



한동안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자꾸만 어두워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건강도 더욱 나빠졌다. 그렇다고 삶의 끈을 놓을 수는 없는 법. 겨우 돈을 구해 작은 전각 공방을 시작하게 됐다. 이때도 역시 토마스 마틴 선생은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양한 작품을 주문하고 시도하게 하면서 그가 오른손잡이 화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아직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제대로 된 화단의 평가가 없어도 언젠간 하늘의 별처럼 빛날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아랍 두바이에서 큰 사업을 하는 사업가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림만 그려주면 현금 500억 원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 제안을 거절한 일도 있었다. 형의 빚 때문에 땅에 묻힌 적도 있었다. 참으로 인생의 우여곡절이란 곡절은 다 겪은 그다. 물론 다분히 괴짜이기도 하다.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도 그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NO!”를 외쳤다. 똑같은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혹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몽우는 쉬운 길을 마다하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살아 있는 동안 되도록 많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려야만 할 모든 것들을 그리고 있는 몽우 조셉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의 작업 프로젝트는 2066년까지 계획돼 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물으니 “2066년까지 프로젝트가 계획돼 있다”고 말한다.

꿈 친구, 희망을 주다
꿈 몽(夢), 벗 우(友). 화가 김영진의 아호다. 2005년 부터 몽우란 아호를 주로 사용하면서 본명보다 몽우 조셉킴으로 더욱 알려진 작가다. 두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서예와 그림을 사사했고, 청소년기에는 유태인 아브라함 차 선생을 만나 조각과 미술, 종교, 문학, 예술, 법,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무엇보다 책을 가까이 하면서 그림의 깊이를 더해갔다. 몸이 극도로 안 좋아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극도로 예민하고 어두웠던 시절에 그린 그림보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그리는 지금의 그림이 더 좋다고 말하는 몽우 조셉킴. 어두웠던 지난날조차 인생의 교훈으로 삼고, 누가 봐도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긍정적인 생각을 멈추지 않는 그다.

화가에게 있어 그림은 말과 다름없는데, 평생을 하나의 콘셉트만 그려야 한다는 건 너무 큰 압박인 것 같다며,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는 몽우 조셉킴. 다양한 화풍의 그림이지만 누구라도 한 번쯤 그의 그림을 보게 되면 몽우만이 가진 특징을 잡아낼 수 있다.

바로 탐미적인 색감이다.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그의 그림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색에 놀랄 것이다. 전혀 다른 화풍이지만 그가 캔버스 위에 펼쳐놓은 색의 향연은 마치 샤갈을 보는 듯 하고, 간결한 선과 강렬한 색체 그리고 그림처럼 쓰는 한글을 보면 미국의 유명 그래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이 떠오른다. 물론 기자만의 느낌일 수 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란 사실이다.

지친 마음에 위로를 주는 것도 같고, 어둠 속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 안타까운 것은 그의 그림이 한국 화단에서보다 외국에서 더욱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외 유명 갤러리와 컬렉터들이 몽우 조셉킴과 조우하길 원하고 있다.

몽우 작가와 대화하며, 또 그의 작품을 보며 새삼스레 걱정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류와 비주류로 나뉜 한국화단의 기류에 밀려 혹여 우리가 만난 작가들에 대해 강요된 선택, 혹은 잘못된 평가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그래, 여기서 다시금 생각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봐서 좋은 그림이 내게는 가장 좋은 그림이며, 남녀노소·국적 불문하고 누가 봐도 좋은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그림이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그림처럼, 그의 아호 몽우처럼 사람들에게 ‘반짝이는 꿈과 희망’을 줄 그에게, 그리고 하늘의 별처럼 한국화단을 너머 전 세계에서 반짝일 그에게 격려를 보낸다.



06.jpg
 

<밤이 활짝 피었다>
6호 F, 캔버스에 유채. 2016년. 화가는 어느날 밤에 피어난 목련을 바라보게 된다. 이후 그는 밤이 어둠 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밤에 그윽히 빛나는 꽃들과 생물들의 환희를 느끼고 밤이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는 표현을 위해 밤의 풍광을 꽃에 비유하고 한글로 시를 지어 쓰며 밤에 대한 환희를 희화하고 시적감흥으로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