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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유물에
은빛 생명력을 불어넣다

귀금속전승공예 장인 황갑주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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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쇠, 세공 톱, 땜 가위, 망치 등 금속 공예 도구들로 가득한 작업실, 반세기 넘는 세월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귀금속전승공예 장인 황갑주(79) 선생의 공방이다. 이 좁은 공간에서 백제 무령왕릉 출토 은잔과 익산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등 국보급 유물들이 반짝이는 귀금속 공예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황 장인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을 한 땀 한 땀 생생하게 공예품으로 재현해내며 그 속에 은빛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60년 넘도록 예술성 높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이곳에서 그는 수 없이 망치질을 반복하며 무수한 땀방울을 흘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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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서 배운 세공 기술
중학교 때 금은 세공 기술을 처음 배웠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배고파서 시작한 일이다. 가난 때문에 평생 직업으로 알고 모든 수련과정을 이겨내며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외길 인생. 귀금속 세공업에 입문한 지 어느새 63년이 지나 그의 나이도 팔순을 바라본다. “여순반란사건과 6・25 한국전쟁으로 온갖 어려움과 시련은 다 겪었어요. 가난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헛것을 보기도 하며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결국 중학교 3학년 때 학업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죠. 아버지 지인이 금은방 주인이었는데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셔서 금은 세공 기술을 배우게 됐죠.” 황 장인은 고향인 전남 순천시 보석당 금은방에 입사해 16세 때 금은 세공 기술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천주교 집안에서 6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나 성직자가 되고자 했던 그의 인생이 질곡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크게 바뀐 것이다.

작은 손이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다. 가만 보니 남성의 손이라고 하기엔 작고 아담하다. 부지런해 보이는 손이다. 작업 도중 약품이 닿아서 굵어진 손톱, 하지만 생각보다 곱다. “손이 작았지만 적응이 빨라서 먼저 들어온 사람들보다 실력이 앞서다 보니 사장이 나를 전남 구례에 처음 금은방을 내는 데 파견시켰어요.”

1950년대 초에는 금보다 은을 소재로 한 신변 장신구들을 많이 활용했다. 황 장인은 주로 노리개, 적삼, 배자, 마고자 단추는 물론 분합, 향합, 향집, 표주박, 은침과 통 등을 제작했다. 그는 당시 일거리가 너무 많이 밀려 들어와 손가락 지문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금은 세공이 모두 분업화됐지만 당시에는 장인들이 은판을 직접 두드려서 잘라내고 금형, 조각은 물론 광내기까지 모두 혼자 처리했죠. 남보다 일도 열심히 하고 참고 견디며 기술을 배워나갔어요.” 참고 인내한 끝에 일을 시작한 지 3년정도 되던 해부터 그는 인근의 구례와 벌교 지역 금은방에 가서 기술을 가르쳐줄 정도로 일대에서 명성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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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은잔 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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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단추 2. 은반지 3. 십장생 보석함 4. 법고창신 설명하는 황갑주 장인
 


그러던 중 1959년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 상경했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당시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금은부 1호점에 취업한 후 디자인과 다양한 금속 세공 기술을 전수 받았다. 업계에 입문한 지 7년 만에 금은 세공과 당시에는 특수기술에 속하는 백금세공, 조각기술까지 섭렵하게 됐다. 순금, 백금, 보석까지 다루게 된 것이다. 일거리가 제법 따라와 4년 만에 독립했다. “남대문, 명동에서 43년간 사업을 했는데 기술자 50명을 데리고 있을 정도로 사업이 잘됐어요. 가방을 들고 지방에서 장사하는 사람까지 두고 일을 했죠. 서울 담당 제품이 나오면 보석 반지가 한 바가지 나올 정도였어요. 한일회담 이후에는 일본 사람들이 깃대 들고 관광을 왔고 그때는 없어서 못 팔았죠.”

작품 속에 깃든 법고창신의 정신
전통공예로 옮겨오는 과정에는 그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1965년부터 틈틈이 김정섭(중요무형문화재 35호 조각장) 선생에게 금속공예 전통기법과 조각기술을 전수받았고 이는 그가 전통 은공예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 1982년부터 1990년까지 김충현, 김창섭 서예가에게 서예를 사사하고 홍신표 한국화 화가에게 문인화(사군자)를 배우면서 백제와 고려 시대 유물복제와 조선 시대 장신구인 노리개, 비녀, 장도, 반지 등에깊은 관심을 가지고 제작하게 됐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잔, 용잠, 사리함, 표주박 등의 재현 작품들은 현재 익산 보석박물관에 영구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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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령왕릉 출토 은잔 재현 작품
 



형태와 조형은 전통을 재현했지만 현대 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현재와 미래가 맞닿아 있는 셈이다. 과거의 것들을 맹목적으로 지키고 따르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지만, 동시에 과거의 것 일체를 버리고 현재와 미래가 있을 수도 없다. 이는 선현들의 정신과 지혜를 계승해 더욱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려는 그의 작품관이라 하겠다.

팔순의 나이에도 식지 않는 열정
올해로 귀금속 공예에 입문한 지 63년.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열정이 가득하다.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며 꾸준히 기념 작품전도 열고 있다. 2009년 11월 인사동 갤러리 각에서 귀금속 세공조각 입문 55주년 기념전을 열었고 2015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61주년 회갑 작품전을 개최했다. “전통을 하려면 전통을 알아야 하고 풍류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창도 네댓개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화원에서 1년 반 동안 창도 배웠죠. 회갑전에서 8분 걸려서 사철가를 완창하기도 했어요.”

그는 전통공예 문화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제가 입문하면서 세공했던 남녀 신변장신구들도 이미 사라져가고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너무 전통에 대해 모르고 무관심한 것 같아 아쉬워요. 현재 여성 적삼 단추도 배자 단추가 사라지고 매듭으로 하고 있죠. 다행히 남자들 마고자 단추는 아직 남아있긴 해요. 전통공예를 생계 때문에 포기하는 장인들도 많아요. 전통공예를 이어간다는 것이 사명감이 없이는 힘든 일이죠.”

황 장인은 70주년 고희 작품전을 준비 중이다. 박물관에 기증관을 만들어 후대에 남겨주고자 그의 청춘이 담긴 작품 400점을 기증할 계획이다. 전통의 맥을 이어간다는 사명감으로 버텨온 세월. 욕심을 버린 지 오래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후대에 전할 작품을 남기고자 하는 일념뿐이라고.

“이 나이에 돈이 무슨 중요하겠어요. 제가 살던 시대에 작품 하나쯤은 남기는 것이 작은 바람이죠. 배고프고 가난해서 시작한 일이고 정말 어렵게 배웠으니 뭐라도 남겨야겠다는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기증도 하는 겁니다. 제 작품이 전시된 기증관에 와서 많은 사람이 우리 전통의 예술성과 멋을 느낄 수 있으면 제 할 일은 다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