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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역사 간직한 가야사 복원, 있는 그대로가 정답”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이영식 교수 인터뷰


글. 이지수 사진.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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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출토 연화문 기와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고대 한반도의 남동지역을 차지했던 가야. 6세기 중엽 신라에 병합된 이후 그 흔적이 없어져 오랫동안 ‘신비의 왕국’으로 남아 있다. 600년의 역사를 가진 가야는 풍부한 철 생산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형성했으며 한때 고구려, 백제, 신라와 전투하고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외교무대에서도 각축을 벌였다.

말기에는 경남 함안의 아라국을 중심으로 백제와 신라가 참가하는 국제회의를 개최해 독립유지의 방안을 함께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헌과 유적, 유물이 많지 않고 <삼국사기>에서 독립적인 역사로 다루지 않아 가야는 많은 수수께끼를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짧지 않은 역사를 품고 삼국과 공존했으나 오랜 세월 역사 속에 잊혀진 나라로 인식돼 왔다. 그런 가야의 ‘비밀의 문’이 최근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정부가 가야사 복원에 나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지시했다. 가야사가 신라사에 덮여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다. 따라서 가야문화 중심지인 경남 김해와 전북 남원 등 관련 지방자치단체의 가야사 발굴과 복원사업에 청신호가 켜졌다. 제4국의 제국역사 되찾기라는 측면은 물론 동서화합과 발전을 이끄는 데 열쇠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30여 년간 가야사 연구와 재조명을 이끌어온 인제대학교 역사고고학과 이영식(62) 교수에게서 정부의 가야사 복원의 의미와 기대효과 등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홀대받던 가야가 가야 할 길
이영식 교수는 정부의 가야사 복원사업에 대해 한마디로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표현했다. 그는 “홀대받던 가야사 복원은 우리 고대사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중요한 몫을 담당할 것으로 생각된다”며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차별적인지역사 교육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교수는 가야사 복원을 반기면서도 정부 주도의 역사 복원으로 결론을 정해 놓고 만들어 가는 사업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내비쳤다. 벌써 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은 근거 없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무엇보다 가야 문화권 지자체의 예산 쟁탈전이 시작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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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라신사(아라국인들이 이주해 조상신 모시는던 곳)교토 동쪽 쿠사츠 2. 함안아라국 유자이기(함안 도항리 13호분 출토) 3. 일본서기 필사본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선언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지만 고고학 자료도 없는 ‘허왕후의 인도공주설’과 기록도 없는 장유화상의 ‘불교 초전설’ 등이 고개를 들고 있다”면서 “현실적으로는 지자체들이 예산 쟁탈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야 문화권은 물론이지만 확인되지 않는 지역들도 예산확보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 없는 가야사를 창조하려 하거나 실제 이상 부풀리려는 시도가 이미 감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이 교수가 제안한 것은 독립재단이나 연구센터 설립이다. 가야사 복원 사업의 중심을 잡아 주면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

이 교수는 “가야유적의 정비와 가야사 복원의 연구가 중심축을 이루겠지만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가야사 연구에 대한 대학원 장학금 지원이나 전문연구자의 연구비 확대, 연구자 간 공동연구 기회 부여 등이 필요하다”며 “가야 문화권에 있는 지자체 박물관 학예사의 증원과 그들의 신분 보장이 이뤄져 그들로 하여금 지역에 밀착한 가야사 연구와 전파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가야사 복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복원(復元)’이란 단어 자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원래대로 회복한다’ 곧 왜곡된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아 원래 상태를 되찾는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 교수는 “가야사가 빠져 문제 됐던 우리 고대사가 바로 잡힐 것”이라며 “근년 우리 역사학계가 이루는 최대 성과 중 하나라고 평가되던 가야사 연구에 대한 의욕과 실천이 재점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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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가락국기)1285년(1076년)
 




소홀함 틈탄 ‘임나일본부설’
600년이나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영위했는데도 그동안 가야사는 한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연구나 교육 등에서도 홀대를 받아왔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공백을 치고 들어온 것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4세기 중엽에 백제와 신라를 포함한 한강 이남의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이 교수는 “가야사는 우리 고대사를 ‘삼국시대’로 간주했던 역사관의 최대 희생물 중 하나”라며 “현재까지 남아 고대사를 전하는 사서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이었고 이 영향은 우리 고대사를 삼국시대라는 이름으로 규정짓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사 범위는 만주의 천년왕국 부여 등과 함께 가야사를 살피지 않으려는 역사관으로 연결됐고 바로 이 공백을 치고 들어 온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 남선경영론의 핵심인 임나일본부론”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임나일본부에 대해 일본의 야마토 정권에서 파견한 외교 사신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은 임나일본부를 총독부와 같은 관청이라고 주장하지만 관련 인물은 모두 5명에 불과하고 이들이 부여와 경주로 오가면서 외교를 전개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아울러 <일본서기>에 23번 등장하는 ‘임나일본부’의 기사에는 왜나 백제가 가야에서 세금을 거둬들이거나 정치적 강제나 군정 또는 행정과 같은 지배와 관련된 기술은 단 하나도 없고 오로지 외교에 관련된 기술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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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신라금으로 소개된 가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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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75호분 발굴 전경
 



이 교수에 따르면 <일본서기> 자체도 고대에는 임나일본부의 ‘부(府)’를 관청을 뜻하는 ‘후’로 읽지 말고 사신을 뜻하는 ‘미코토모치(御事持)’로 읽어야 한다고 주기하고 있다. 당시 일본(日本)은 왜(倭)였고, 미코토모치는 임금 어(御), 일 사(事), 잡을 지(持)의 한자 뜻처럼 ‘임금의 일을 받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일본말 ‘가방모치’가 ‘가방 들어주는 사람’을 뜻하듯이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왜(일본)에서 가야(임나)에 파견된 사신(미코토모치)이라는 설명이다.

가야에는 가야금만 있는 게 아니다
이 교수가 가야사 연구에 뛰어든 것은 대학 시절부터였다. 서양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다 문득 ‘서양 고대사가 아무리 흥미로워도 남의 나라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러던 중 한국사 연표를 보고 백제와 망한 시기가 비슷하고 조선의 역사보다 긴 600년의 역사를 가진 ‘가야’라는 나라를 알게 됐다. 그는 “600년이나 나라를 경영했는데 내가 듣고 배운 거라곤 가야금밖에 없었다”며 “‘이 나라는 600년간 가야금만 끼고 살았나’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에서 가야사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그 호기심과 궁금증은 그의 발길을 1983년 일본으로 이끌었다. 가야사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고대사, 그것도 임나일본부설로 얼룩진 가야사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다고 하면 아이러니가 될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교수는 “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가야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우리 쪽에 없는 기록이 많고 일본의 연구 축적도 상당히 많아 일본 유학의 기회를 잡았다”며 “와세다대학교 서고에서 독립운동 하는 마음으로 임나일본부설의 타파와 가야사의 복원을 연구했다”고 밝혔다.

고려대와 와세다대의 교환연구원으로 2년 동안 일본에서 공부했지만 <일본서기>를 연구하기엔 부족했다. <일본서기> 속에서 진정한 가야를 찾기 위해 유학 생활 6년을 더 연장했다. 특히 이때 여러 가지 설이 횡행하던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찾고자 연구에 몰두했다. 일본 와세다대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 <가야제국과 임나일본부>는 그가 8년 일본 유학 생활에서 맺은 결실이다.

30년 넘게 가야사를 연구해온 그의 바람은 담백했다. 우리 고대사에서 가야가 ‘가야’로 인정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가야사 복원을 한다고 하면서 역사를 부풀리고 과장해 전혀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려고 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예산 따내기 목적이 아닌 신라나 백제보다 작았고 통합된 나라도 아니었지만 교과서에 고작 5줄 언급되기엔 아쉬운 가야사를 있는 그대로, 진실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이 교수의 바람이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600년이나 독립된 정치세력을 유지하고 독창적인 문화를 영위했던 나라, 그 속에서 자기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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