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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한지체험박물관장 안치용 한지장
“한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이죠.”
 
글 이경숙 사진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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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란 말이 있다. 종이는 천 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는 의미로 한지의 숨결이 약 천 년을 이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 년이란 시간은 단순히 한지의 수명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천 년의 세월을 담아내는 한지는 과거로부터 현재 또는 현재로부터 미래를 이어주는 기록문화유산으로서 선조들의 숨결을 보존하고 후대에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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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는 겨레의 과학입니다. 요즘 컴퓨터나 휴대폰의 발달로 종이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한지는 기록문화로써 보존 가치가 컴퓨터 그 이상입니다. 컴퓨터나 USB, CD 등의 기록이 천 년을 갈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지는 이미 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후대에 그 기록을 알리고 있죠.”
 

 
천 년을 곁에서 지켜봐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역사적 사료들이 한지의 우수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 중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인 ‘무구광정대다라니경(국보제126호)’은 통일신라 751년경(경덕왕 10)에 제작된 것으로서 한지에 인쇄돼 그 내용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니 과연 천년종이 한지의 위력이 아닌가.

천년종이는 하늘이 내린다고 한다. 보이는 한지가 그저 종이 한 장이 아닌 것이다. 천년종이는 과학적 원리가 내재돼 있으며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양심, 자연의 청정함이 고루 배어졌을 때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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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한지장이 제작한 천연염색한지
협찬 괴산한지체험박물관
 

 
 
섬유질이 조밀하고 견고한 참닥나무를 주 원료로 제작한 한지는 내구성이 강하고 질겨 보존능력이 뛰어나다. 그런 까닭에 왕실이나 중국에서는 보물급 내용을 기록해 보관할 때 한지를 사용해왔다. 하지만 한지의 우수성은 중국이나 일본 화지의 홍보에 밀려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해 그 아쉬움이 크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노력하고 있는 이가 있어 그를 만나보았다.

“한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과 아주 밀접해 있죠. 옛날에는 창호지 하나로 문도 바르고, 장판도 바르고, 씨앗을 담을 수 있는 그릇도 다 한지로 만들었으니 우리의 생활이라고 볼 수 있지요.”

충북 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한지장(韓紙匠) 안치용 선생. 그는 현재 괴산한지체험 박물관장이기도 하다. 안 관장은 청풍명월의 고장 괴산에서 할아버지에 이어 3대째 한지를 제작하는 가업을 잇고 있다.

“자연스럽게 가업을 잇게 됐습니다. 그리고 전통가업을 잇는다는 것이 뭔지를 고민하게 됐죠. 전통한지 문화를 계승해 나가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저의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통 제작 방식을 유지하되 현대인에 맞는 한지를 개발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안 관장은 한지가 그저 전통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현대인의 감각에 맞춰 한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가 특허를 낸 한지만 해도 무려 10~15종에 이른다. 한지에 천연염색을 입혀 예술적 가치를 높여 주었고, 쑥이나 클로버 잎 등을 넣어 자연미를 한껏 살린 한지를 개발해 현대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것이 바로 안 관장이 전통한지를 알리고 후대에도 이어갈 수 있도록 고민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한지 한 장으로도 금방 인테리어 소품이 완성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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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의 수준은 세계 제일이죠. 세계인들이 한지를 보고 모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자란 닥나무는 잘 영글어 세계 최고의 섬유질을 제공해 주지요. 그 중 공기 좋고 물 맑은 청풍명월의 고장 중부내륙에서 자란 닥나무가 으뜸입니다. 재료가 좋으니 당연 최고의 한지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화지에 비해 한지가 뛰어남에도 홍보가 미흡한 점이 아쉽습니다.”

안 관장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종이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켰고 디자인과 함께 마케팅 전략에 노력을 기울여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천 년을 가는 뛰어난 한지 제작 기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홍보가 미흡하고 발전이 더디다고 안 관장은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한지는 겨레의 과학입니다. 요즘 컴퓨터나 휴대폰의 발달로 종이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한지는 기록문화로써 보존 가치가 컴퓨터 그 이상입니다. 컴퓨터나 USB, CD 등의 기록이 천 년을 갈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지는 이미 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후대에 그 기록을 알리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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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는 보존의 가치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한지는 문·벽지·장판·가구·장식품·서적 등 다양한 곳에 쓰이면서 그 기능을 발휘했다. 또한 요즘 화학제품과 달리 깨끗한 환경에서 자란 닥나무를 재료로 깨끗한 물을 가지고 한지를 제작하니 환경호르몬으로부터 인체의 건강도 지킬 수 있다.

이뿐 아니라 한지에는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절약정신의 교훈도 스며져 있다. 글씨 연습을 하고 난 한지 한 장을 버리기 아까워 연습한 종이를 접어 다시 지갑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지갑을 만들면서 남는 한지쪼가리는 다시 물에 불려서 그릇으로 만들어 유용하게 사용했다.

지난해 세계 명인에 선정된 바 있는 안치용 관장은 2012년부터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자리를 잡고 한지체험박물관을 개관해 운영하며,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한지와 관련된 유물 약 2~3천여 점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으며, 전통한지뜨기 시연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한지 제작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한지 체험박물관에 방문하는 가족들은 어린이들과 함께 한지뜨기 및 한지공예 체험을 맛볼 수 있는데 특히 자녀들이 좋아한다.

안 관장은 “어린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체험을 통해 한지가 어떤 것인지를 느끼고 안다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한지를 사용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한다. 한지체험은 한지문화를 잇기 위한 또 하나의 노력이 되는 것이다. 한지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과 사랑을 통해 세계 반열에 오른 천년종이 한지를 이미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