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독사에게 물려 죽은 여왕,

클레오파트라


글. 신현배



01.jpg
 

기원전 51년 클레오파트라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을 나눠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두 사람에게 이집트를 공동으로 다스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은 형제 간이라도 나눠 가질 수 없나 보다. 3년 뒤 권력 다툼이 일어났는데, 클레오파트라가 패배하여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반드시 왕위를 되찾겠다며 이집트와 시리아 국경 지대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그 무렵 로마 제국의 명장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적인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왕위를 되찾기로 마음 먹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몰래 이집트로 숨어 들어갔다. 카이사르가 있는 곳은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시종에게 자신의 몸을 카펫에 둘둘 말아 카이사르에게 바치게 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카펫을 펼쳤다가 깜짝 놀랐다. 그 안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인은 클레오파트라였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곧 카이사르의 연인이 되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남동생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살았다. 두 사람은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그 아이를 ‘카이사리온’이라고 불렀다.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로마의 원로원에서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 카이사르가 죽자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 등 세 사람이 로마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지중해 동쪽을,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맡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국 로마와의 충돌을 피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집트가 있는 지중해 동쪽을 맡은 로마의 최고 권력자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로 결심했다.

안토니우스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 클레오파트라는 금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배를 타고 소아시아의 타르수스 항구로 갔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를 배 안으로 초대하여 사치스러운 파티를 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귀에 달고 있던 진주 귀걸이에서 진주를 떼어 술잔에 떨군 뒤, 그 술잔을 단숨에 비워 안토니우스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세 명의 아이를 낳았고,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그 아들에게 자신이 맡은 지중해 동쪽을 넘겨주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시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원로원과 손잡고 안토니우스의 집정관 자리를 박탈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8만 대군과 400척의 전함을 주어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도록 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 군은 악티움 해전에서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무찔렀다.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또 한 번의 전투에서 패한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포로로 잡힌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살 길을 찾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하려고 했다. 그러나 38세의 클레오파트라가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할 수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쇠사슬에 묶어 로마로 데려간 뒤, 거리를 행진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난 자리에서 그녀를 조롱하며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살아서 그런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죽음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클레오파트라는 시종을 시켜 무화과 열매 광주리를 가져오게 했다. 그 광주리 안에는 독사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독사에게 물려 목숨을 끊었다.



02.jpg

 



“클레오파트라는 정말 독사에게 물려 죽었을까요?”


클레오파트라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고 밝힌 것은 그리스의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두 시녀와 함께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클레오파트라와 두 시녀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독사는 사람을 물 때마다 독을 뿜어내지 않는다고 한다. 방울뱀의 경우에는 한 번 물면 독을 거의 다 써서 두 번째 물 때는 독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명이 한꺼번에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다.

독사를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좀 이상하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뱀을 두려워하여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떻게 커다란 독사를 잡아 자기를 물게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클레오파트라가 독사에게 물려 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을 살펴보았던 의사가, 그녀의 팔에서 뭔가에 물린듯한 자국들을 찾아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03.jpg

 



코끼리를 타고 한나라 군대를 몰아낸
베트남의 여성 영웅, 쯩 자매


베트남 역사에는 씩씩하고 용감한 여성이 있다. 오늘날까지 베트남 사람들이 중국 지배에 맞서 한나라 군대를 몰아낸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하는 쯩 자매다.

언니 쯩짝과 동생 쯩니는 베트남 하노이 근처에 있는 메링현의 낙장 딸로 태어났다. 이 때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 중국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 100년이 넘도록 한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쯩 자매의 어머니는 말수가 적었지만 성격이 강하고 애국심이 있는 여성이었다. 어린 자매에게 한나라가 베트남을 얼마나 혹독하게 지배하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쯩 자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베트남 독립에 대한 열망과 애국심을 지니게 되었다.

언니 쯩짝이 다른 낙장의 아들인 티삭에게 시집을 갔다. 티삭은 베트남을 다스리는 중국인 관리인 소정 태수를 비판하는 애국 청년이었다. 소정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여 자기 배만 채우는 탐욕스럽고 포악한 인물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티삭이 걸핏하면 소정을 비판하였으니 소정은 티삭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어느 날 소정은 티삭을 잡아들여 잔인하게 죽여 버렸다.

베트남 태수에게 남편을 잃은 쯩짝은 복수를 다짐하며 동생 쯩니와 함께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러나 처음엔 사람들이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반란군을 이끄는 지도자가 여성이었으니, 그를 따라 전쟁에 나서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어느 날 쯩짝이 쯩니에게 말했다.

“우리가 얼마나 용맹스럽고 지혜로운지 사람들에게 보여 주자. 우리 손으로 호랑이를 잡는 거야. 호랑이 가죽을 벗겨 햇볕에 말린 뒤 그 가죽에 전투 호소문을 써서 사람들에게 돌리자.”

“좋은 생각이야. 호랑이 사냥을 하여 만든 전투 호소문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따를거야.”




04.jpg

 



쯩 자매는 호랑이가 우글거리는 하노이 근처의 멜린 숲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호랑이 한 마리를 사냥했다. 호랑이 가죽을 벗겨 햇볕에 말린 뒤, 그 가죽에 전투 호소문을 써서 사람들에게 돌렸다. 사람들은 한나라에 맞서 함께 싸우자는 글을 읽고 쯩 자매 밑으로 모 여들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힘을 합쳐 한나라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고 다짐한 사람이 무려 8만 명이었다.

서기 40년 쯩 자매는 그렇게 반란을 일으켰다. 나란히 코끼리 등에 올라타 8만 대군을 지휘했다. 반란군의 핵심 세력은 36명의 여성 장군이었다. 그 가운데는 쯩 자매의 어머니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쯩 자매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며 순식간에 65개 성을 점령하고 한나라 군대를 베트남에서 몰아냈다.

쯩짝은 되찾은 땅에 새 나라를 세웠다. 고향인 메링을 도읍으로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쯩짝은 백성들에게 2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 주는 등 3년간 베트남을 잘 다스렸다.

그런데 이 나라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뒤 후한 광무제가 보낸 최고의 장수 마원의 한나라 대군과 2년 동안 맞서 싸우다가 끝내 패하고 말았다.

전설에 따르면, 한나라 대군은 마지막 전투에서 베트남 군의 상당수가 여군임을 알고 일부러 옷을 벗고 알몸으로 싸웠다고 한다. 용감한 베트남 여군들은 민망하여 급히 후퇴했고, 남은 남성 병사들이 맞서 싸웠지만 한나라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쯩 자매는 마지막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적군의 포로가 되기 싫다며 핫몬 마을 근처의 핫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기 43년 2월 6일의 일이었다.



“쯩 자매는 오늘날까지 베트남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면서요?”


<후한서>에는 쯩 자매가 마원의 한나라 대군에게 크게 패한 뒤, 메링의 딴 비엔 산으로 들어가 1년 동안 싸우다가 43년 1월 사로잡혀 처형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이 베어져 그 머리가 한나라 수도인 낙양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 역사책에는 쯩 자매가 산 채로 잡혀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핫 강에 몸을 던져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은, 쯩 자매가 베트남에서 외세에 맞서 싸운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쯩 자매를 통해 큰 용기를 얻었으며, 외세를 몰아내고 독립을 얻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은 939년이었다. 그 뒤에도 끊임없이 중국의 침략을 받았고, 19세기 후반에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어 98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그처럼 오랜 세월 외세의 지배를 받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독립 의지를 잃지 않고 외세에 맞서 싸웠다. 정신적인 지주로서 용기와 힘을 주는 쯩 자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쯩 자매가 세상을 떠난 뒤 베트남에서는 핫몬 마을에 사당을 지어, 해마다 2월 6일에 쯩 자매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베트남 곳곳에는 쯩 자매를 추모하는 사당이 많이있다. 하노이의 전쟁 박물관에는 쯩 자매 전시관이 있으며, 베트남에서는 쯩 자매를 기념하는 우표·동상·연극·노래·문학 작품 등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