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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명성황후라고요?”
흰색 두건을 한 여인을
둘러싼 논란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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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전 인물이 아니건만 베일에 싸인 주인공이 있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지근거리에 있었단 인물들의 증언조차 신빙성을 잃기 일쑤다. 그녀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발견됐다며 시끌벅적했다가, 신빙성이 없어 또 조용히 사그라 진다. 역사는 그녀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바로 명성황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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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명성황후라며 세간에 나온 사진은 4장 정도로 추려진다. 최근에 명성황후 추정 초상화라며 공개된 것은 지난 8월 중순 다보성갤러리를 통해서다. 당시 다보성갤러리는 광복 72주년을 기념한 특별전에서 한 초상화를 공개하며 명성황후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사진 속 인물은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르고 하얀 옷을 입은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다. 다보성갤러리 측은 명성황후 추정 근거로 초상화 뒷면에 적힌 ‘부인초상(婦人肖像)’이라는 한자와 적외선 촬영결과 이 글씨 앞에 ‘민씨(閔氏)’라는 한자가 훼손됐다는 점 그리고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한 신발과 옷이 고급이라는 점 등을 들었다. 더불어 이 초상화가 같은 일본식 표구 족자를 한 명성황후 살해범으로 알려진 미우라 고로(1846~1926)의 글씨 작품과 한 세트로 전해온다는 것을 추정 근거로 내세웠다.

물론 학계 일부에서는 왕비의 초상화라고 하기엔 옷과 용모가 너무 초라하다며 명성황후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없다는 반론을 내놓기도 해이에 대한 진위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보성갤러리 측은 그림 속 인물이 평상복 차림인 이유에 대해 러시아 공사인 웨베르가 본국 보고서에 “1895년 9월 27일, 민왕비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왕의 법령을 내렸다”고 적은 것을 근거로 평상복 차림의 초상화가 존재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명성황후 추정 초상화가 나올 때마다 관련 학계에서는 그 진위 논란이 일고 있지만, 무슨 영문에서인지 자기의 얼굴을 사진이나 초상화로 남기는 것을 꺼려했던 명성황후였기에 어쩌면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흰 두건, 당시 일반 서민도 사용
먼저 민왕비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법령을 내렸기에 평상복 차림의 초상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살펴보면, 평소에도 자신의 얼굴을 남기기를 꺼려했던 명성황후가 평상복 차림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강요된 초상화가 아니라면 말이다.

무엇보다 이번에 공개된 초상화를 두고 왕족 후손인 박보림(90, 전 운현궁 관리자) 씨는 “모자(흰색 두건)나 의자가 그 당시에 볼 수 없는 것이고, 특히 모자는 일반인이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해 명성황후 초상화 쪽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이에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8장의 사진을 본지에 공개하며 이 같은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정성길 명예박물관장은 “초상화에 등장한 흰 두건은 당시 서민들이 일반적으로 둘렀던 것과 같다”며 “하얀 두건을 일반인이 쓸 수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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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명예박물관장이 제공한 사진들을 보면 하나같이 흰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여인들을 볼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누구라도 쓸 수 있는 두건이었으며, 매듭을 묶는 방법도 초상화에 나온 것과 거의 흡사하다. 일반인은 쓸 수 없는 것이 아닌 일반인도 쓸 수 있는 당시의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며느리 부(婦) 아닌 지아비 부(夫)로 썼어야
명성황후 초상화가 아니라는 두 번째 근거로 정성길 명예박물관장은 초상화 뒤에 적인 ‘민씨부인 초상화’를 들었다. 만약 이 초상화를 일본이 명성황후를 격하시킬 의도로 그렸다면 ‘민씨’가 아닌 ‘민비’라고 적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정 관장은 “당시 초상화 뒤에 성씨를 붙여 ‘박씨부인’ ‘정씨부인’ 등으로 제목을 붙였다”며 “단지‘민씨부인 초상화’라고 적혀 있다는 이유로, 당시 서민들이 쓰던 흰 두건을 두른 평상복 차림의 여인을 명성황후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자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민씨를 민비로 본다는 것 자체도 큰 오산이지만 명성황후를 ‘민비’로 격하해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잘못된 사고방식”이라며 “언론과 학계가 이런 부분에 있어 더 무심하다”고 꼬집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06년 모 매체 미국 특파원이 명성황후로 추정된다며 한 사진을 공개했고, 국내 대다수의 언론들이 그 진위여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도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물론 명성황후 초상화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이를 바로잡은 이가 바로 정성길 관장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진은 이미 1989년 정 관장이 ‘정경부인’으로 공개한 바 있던 사진과 똑같아 결국 관련 학계가 사과발표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관련 사진은 정 관장이 독일에서 구한 것으로 여기서 정경부인이란 관직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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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일반 서민 여성들도 머리에 흰 두건을 썼음을 알 수 있는 사진
3. 2006년 모 매체를 통해 명성황후 추정 인물로 공개된 사진. 이미 1989년 ‘정경부인’으로 공개된 바 있는 사진이다.
 



이번에도 비슷한 사건이 터지자 정 관장은 “지성인들이 정확한 근거와 고증도 없이 명성황후 초상화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며 “후손들에게 잘못된 역사는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책임감으로 사진을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명성황후(1895. 10. 8)가 일본 자객에 의해 원한을 품고 돌아가셨는데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일부러 흰색 두건을 쓰게 함으로써 왕비를 격하시킬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나 같으면 머리를 웅장하게 그렸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마지막으로 정 관장은 초상화 뒤에 적힌 ‘부인초상(婦人肖像)’에서 ‘부’자가 보통 시집간 부인을 의미하는 며느리 ‘부(婦)’자로 쓰인 것을 지적했다. 계급이 높은 사람의 부인이라면 지아비 ‘부(夫)’자를 써 ‘부인(夫人)’으로 표기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그 모습조차 제대로 아는 이가 없지만, 그래도 그가 한 나라의 국모로 이 땅에 살다 갔다는 것은 모두가 기억할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한 또 어느 해, 어느 때엔가 명성황후 추정 초상화나 사진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가짜가 많다는 것은 그 어디엔가 진짜가 있다는 말이다. 언젠가 우리 앞에 명성황후의 진짜 초상화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막연한 기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