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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서계동

푸른 언덕배기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글, 사진. 김일녀



서계동 언덕배기가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로 넘실댔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이들이 태어나서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찾아가는 것일까. 그리움 실린 힘찬 S자 꼬리질은 이끼 끼어 검게 변한 축대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길어진 여정 때문인지 제 고유의 빛깔을 잃고 희미해져버린 모습이다. 깊은 바닷속 같은 낡고 검어진 축대에 물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은 아직 먼 것인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애잔함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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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성당 순교성지
 



중림동, 서계동, 청파동에는 유독 원주민이 많이 살고 있으며 대를 이어 사는 집도 많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이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듯, 높은 축대를 따라 작품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물고기들도 고향을 찾아 헤엄쳐 가는 길일 게다.

우리나라 천추교의 씨앗이 된 터
우선 가까이에 역사·문화적으로 볼거리가 많은 중림동부터 둘러봤다. 중림동은 중구의 서쪽 끝에 위치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중림시장 초입에 있는 약현성당. 1892년(고종 29년)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벽돌조 서양식 교회 건축물로, 건물 전체가 붉은 벽돌로 정교하게 지어졌다. 반원아치형 창문과 지붕에 난 삼각형 창과 종탑 등이 이국적이다. 약현은 이곳에 약초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성당이 세워진 이유는 한국인 최초로 중국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의 집이 인접해 있고,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이들이 순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100여 명이 처형당했으며, 이 중 44명은 ‘성인’ 칭호를 받았다. 성당 한쪽에 서소문순교성지전시관이 있어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896년에는 한국 땅에서 최초로 사제서품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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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기정기념관 2. 손기정기념관 내부 마라톤화 3. 손기정
 



역사의 흐름 따라 중림동 둘러보기情
약현성당에서 한국경제신문사까지 중림시장이 선다. 중림동 어시장이라고도 불렸을 만큼 지금도 시장을 지나가면 비릿한 냄새가 나고, 수산물 식당이 많다. 하지만 새벽에 장이 서기 때문에 낮에는 한산하기만 하다. 서울 3대 난전 중 하나인 칠패시장이 있던 자리로 마포, 서강 등지에서 들어온 어물이나 곡물 등이 집결했던 곳이다.

약현성당 정문 건너편으로는 ‘서소문 역사공원’이 한창 세워지고 있다. 원래 천주교 성지인 서소문근린공원이 있던 자리다. 이곳이 순교성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416년(태종 16) <태종실록>에 따르면 예조에서 “사람을 동대문 밖에서 사형하는 것은 실로 편치가 않은 일입니다. <서경>에 말하기를 ‘사(社, 지신 사당)에서 죽인다’고 했습니다. 社는 (궁궐에서 볼 때) 오른편에 있으니, 고제에 따라 서소문 외성 밑 10리인 양천 지방, 옛 공암 북쪽으로 다시 장소를 정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그대로 따랐다. 이때부터 서소문 밖 형장은 서울의 상징적인 형장이 됐다고 한다. 중구는 이곳을 약현성당~당고개성지~절두산성지~새남터로 이어지는 성지순례코스로 개발할 계획이다.

공원 옆에는 염천교 수제화거리가 자리하고 있다. 미군들의 전투화를 수선해 팔던 우리나라 최초의 수제화거리다. 하지만 거리라고 하기엔 다소 짧고, 도로변에 4층짜리 낡은 건물만 우두커니 서 있다. 최근 거리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은 한산한 분위기다.

수제화거리에서 만리동 쪽으로 가다 보면 손기정체육공원 안내판이 보인다. 공원 주변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때문에 4차선 도로 건너편 서계동 집들의 키가 더욱 낮아졌다. 고만고만하던 옆 동네 집들이 하루아침에 우뚝 솟아버렸으니, 서계동 속만 시끄럽다.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아파트에 터를 내주고 어디로 갔을까. 모두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공원만 그들과의 오래된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 듯 한적하기만 하다.


그는 기테이 손 (Kitei Son)으로 불렸다
공원 안에 손기정 기념관이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뜻을 기리고자, 손기정 선수의 모교인 양정의숙 건물(1918년 건립)을 리모델링해 손기정 탄생 100주년 되는 2012년 개관했다. 약현성당과 마찬가지로 건물 전체가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근처에 살면서도 처음 들여다 본 기념관은 오래된 외관과 달리 감각적이면서도 짜임새 있게 구성됐다.

전시관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그 당시의 마라톤화였다. 하얀 천으로 만든 흰 양말처럼 보이는데 중간에 말발굽처럼 갈라진 모양이 낯설다. 손기정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16세에 중국 단둥의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차비가 없어 신의주에서 압록강 철교 그리고 단둥에 이르는 20여리 길을 매일 달려 출퇴근 했다. 가난은 그를 달리게 했다. 쉼 없이, 또 아무리 먼 거리라도 달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달리는 것은 돈이 한 푼도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후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며 마라톤에 소질을 보였고, 드디어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에서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마라톤 금메달을 딴 첫 번째 한국인이 됐다. 하지만 시상대에서 그의 이름은 ‘손기정’으로 호명되지 않았다. 일본식 이름인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불렸다. 전 세계가 바라보는 1등 자리에 섰음에도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고개는 숙인 채였다. 부상으로 받은 월계관수 화분은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개인의 우승은 오히려 큰 슬픔에 불과했다.

기념관을 돌아보고 나오기 직전, 손기정 선수가 한 마디 건냈다.
“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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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와 빌딩 속 제2의 고향 된 서계동
중림동에서 횡단보도나 육교만 건너면 서계동이다. 1970~90년대 지어진 나지막한 연립주택과 빌라가 언덕배기를 따라 파도를 치며 빼곡이 들어서 있다. 서울역 바로 앞쪽에 국군기무사령부 수송대(현 국립극단)가 있어서 그 담보다 높게 집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서계·청파동이 정면으로 보이는 서울역에서 바라보면 언덕을 따라 차곡차곡 쌓인 집들이 마치 파도가 물결쳐 오르는 모습 같이 보인다.

서계 제1경로당을 시작으로 청파 언덕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을 따라 길을 나섰다. 경로당 출입 조건은 ‘65세 미만.’ 빨간 글씨로 쓰인 문구가 새침스러워 보인다. 높은 축대 위 담장도 붉은 벽돌이고, 골목마다 들어선 다양한 연립주택도 대부분 붉은 벽돌을 입었다. 효창원로104나~마길 곳곳의 담장에는 다양한 생김새의 물고기들이 줄지어 간다. 어떤 녀석들은 멀리 태평양을 건너 온 것인지 비늘이 알록달록하다. 또 다른 녀석들은 급할 게 무어냐며 천천히 가다가 이곳에 적응한 것인지 하얗게 칠해진 담장과 똑같은 색을 띠고 행인들과 숨바꼭질을 한다. 그렇게 가다가 제집을 찾으면 거기 눌러 앉는다. 그리곤 삐뚤빼뚤 제 몸에 이름을 새겨 넣는다. 이 집은 내 집이라고. 물론 진짜 담장 너머 주인 이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골목이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풍경이 연출된다. 낡은 가스배관과 빗물받이통도 카메라 앵글 속에선 적절한 구도를 잡아주며 골목에 빠져들게 만든다. 간간이 마주치는 한옥의 기와지붕과 나무대문 등은 골목길에 정겨움을 더한다. 여기에 골목 구석구석을 감아 도는 감자 찌고 라면 끓이는 맛있는 냄새, 세탁소 옆에 널린 이불 빨래에서 나는 향기, 빨랫방망이 두드리는 집에서 나는 비누 냄새는 어린시절 비슷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마음을 토닥여주었다.

어느 한 막다른 골목에선 시야가 트이며 서계동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와 서울역 근처의 높은 빌딩들은 이곳을 상대적으로 더 이질적이게 만들었다. 골목은 계단과 계단으로 이어지며 서계동을 안내했다. 안쪽으로 구석구석 둘러볼수록 더 오래된 집들이 나타났다. 겉으로 보이는 서계동과 달리 속은 시간의 흐름에 뒤쳐져 있었다. 허물어지고 갈라진 집과 담장, 치우고 단장하기에는 이미 손 댈 수 없을 만큼 낡은 구석구석의 잔해들, 지붕 위로 난잡하게 널린 세간살이와 시야를 가린 수십 가닥의 전선 등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청파로길에 닿는다. 큰 길 양옆으로 난 사이사이 골목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어느 한 곳도 똑같은 모습이 없다. 햇볕조차 들지 않는 골목 계단은 이끼가 차지했다. 서계동엔 소규모로 운영되는 봉제공장들이 많은데, 봉제와 상관없는 간판을 달고 건물 곳곳에 들어앉아 밤이 늦도록 재봉틀을 돌린다. 사람 키 만한 짐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연신 골목을 오간다. 하지만 갈수록 재봉틀 소리는 잦아들고, 오토바이에 실리는 짐도 줄어들고 있다. 대신 최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스트하우스가 늘었다. 골목을 오가는 외국인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아마도 서울역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 때문인 듯하다.

서계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국립극단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공공 공연예술 단체로, 1950년 국립극장의 설립과 함께 전속 극단으로 창설됐다. 이곳은 원래 1981년부터 국방부의 기무사 수송대가 있던 자리인데, 2010년 국립극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하면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최근 기존 담장에 이어 건물 전체를 빨갛게 페인트칠했다. 사람들을 위협하던 담장 위 철조망도 없어진 지 오래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문화생활을 즐길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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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동 골목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