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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이 찾아진 화성 향남 일대 유적


백제-마한 통합

역사의 ‘타임캡슐’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화성시청・한국문화유산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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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동관모 2. 금동식리(신발) 3. 금제 이식(귀고리) 4. 환두대도 (둥근 고리 칼자루)
 




도로 공사장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관
3년 전 경기도 화성 향남2지구 동서간선도로 고분 발굴 현장에서 뜻밖에도 삼국시대 금빛 찬란한 금동관(金銅冠)이 발견됐다. 고고학계는 눈이 번쩍 띄었다. 왜 화성에서 금동관이 찾아진 것일까, 또 화성은 고대사에서 어떤 곳이며 또 주인공들은 누구였을까….

전문가들을 흥분시킨 것은 금동관의 화려한 모양이었다. 찾아진 관모 외면에는 삼엽초화문(三葉草花文)이 투조되어 있었고 공주, 나주에서 이미 발견된 금동관들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 금관을 착용했던 지배층은 왕이었을까, 아니면 왕족이었을까.

공주, 나주 등지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같은 모양으로 미뤄볼 때 화성 금동관 주인공은 백제시대 사람이다. 학자들은 백제의 금동관 출현을 한성 후기인 4세기 말~5세기경으로 상정해 왔다. 한성기의 금동관모는 반원형 고깔 모양의 상투를 덮는 절풍형이다. 상부에는 긴 대롱에 반구형 장식이 달려있으며, 좌우 측면에는 새의 날개 모양을 한 장식을 갖추고 있다. 화성 금동관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화성 고분에서는 또 금동식리(金銅飾履, 신발), 금제이식(金製耳飾, 귀고리), 환두대도(環頭大刀, 둥근 고리 자루칼) 등 화려한 장신구가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이는 왕들이 치장하는 각종 금제 장신구들이다. 왕도가 아닌 지방에 이처럼 화려한 금장신구를 갖춘 지배층이 있었다는 것은 백제국의 위상을 재평가해야 하는 증거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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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성리토성 토루
 



화성은 본래 마한의 영토였다. 그러던 것이 북방에 서 내려온 온조의 백제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흡수되어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이 같은 금동제 일괄 유물은 백제 초기 마한과 백제의 통합, 지방관제 확립이 이루어진 백제의 역사를 입증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시기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로 추정된다.

화성은 뱃길로 대륙을 통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왕도 위례성 시기 백제는 서해 당성(唐城)을 통해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또 일본과도 교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성은 지금도 이런 역사적 바탕 아래 미래의 번영을 꿈꾸는 번영의 요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2㎞ 길성리 토성, ‘담로’ 치소인가
금동관이 출토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성리(吉城里)에 장대한 토성의 유구가 있다. 왜 ‘길성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길성은 우리말로 ‘길재’이며 좋은 땅 혹은 ‘길다(長)’는 뜻도 된다. 이 토성은 성벽 둘레가 2311m에 달하는 큰 규모의 유적이다. 한반도 고대 왕도에 있는 토성 규모와 맞먹는다. 신라 왕도 경주 반월성이 1.8㎞인 것을 감안하면 그 보다 더 큰 셈이다.

이 토성은 언제 축조되었으며 누가 사용했던 것일까. 1980년대 한신대박물관에서 길성리 토성 유구를 조사한 바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공장 건설 및 과수원 도로 개설 과정에서 완전히 절단된 성곽 내부와 성 안쪽 등지에서 막대한 양의 토기가 출토됐다.

토기는 기원전후 무렵부터 쓰인 경질무문토기였다.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제작돼 유통됐던 토기다. 성곽내부에서 경질무문토기가 출토된 한성도읍기 백제 성곽으로는 풍납토성과 이천 효양산성, 파주 고모리토성 등지가 지금까지 보고된 바 있다. 이로써 이 길성리 토성의 구축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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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성리토성에서 수습한 토기편
 



글마루 취재팀은 지난 7월 초 이 토성을 답사했다. 토성으로 진입하는 차량도로에서부터 백제 토기가 산란했고, 그 이전 마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붉은 색의 와질 토기도 발견했다. 토루를 이용해 가족묘를 쓴 둑 모양의 긴 유구는 백제 이른 시기에 축조됐을 것으로 보인다. 잡석이나 할석을 넣지 않고 흙만 다져 쌓은 것이었다. 이 지점으로부터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의 토루도 정연히 남아 있었다. 토루 밖은 고준(高峻)하여 적들이 침입하는 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 지점에서는 할석을 흙에 박은 판축 흔적이 나타났다. 수습된 토기편을 보면 본래 마한인들이 살았을 구릉에 백제의 새로운 세력이 확대된 토성을 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길성리 토성 주위로 광범위한 마을이 조성됐고 황구지천(黃口池川)을 중심으로 한 경작지는 이들에게 풍부한 경제력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금관이 출토된 향남리는 길성리 토성에서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금동관의 주인공은 길성리 토성을 다스렸던 백제 최고의 행정관 담로(擔魯)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길성리를 비롯한 일대는 많은 공장이 들어서 있어 유적의 완전 보존이 어려운 실정이다. 확대된 학술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백제 근초고왕, 가장 강성했던 영주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국력이 가장 강성했다. 재미있게도 왕은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 왕도는 어디였을까. 이 문제는 또 숙제로 남는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백제는 충청・전라도에 이르는 마한 구 영역과 말갈이 내려와 살던 강원・황해도의 일부 영토를 차지하며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왕은 또 고구려의 남평양을 공격, 고국원왕을 죽여 기세를 꺾었으며 왕도 한성을 굳건하게 했다.

이 시기 백제는 남쪽 마한의 거점에 지방관인 담로를 배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담로는 왕족이나 귀족을 현지에 파견하여 관리한 중앙집권적 통치 제도다. 담로는 원래 백제어 ‘다라’ ‘드르’의 음차(音借)로써 ‘성(城)’을 의미한다.

중국 고대 사서인 <양서(梁書)> 백제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22개의 담로가 있었다’라고 기록돼있다. 백제왕이 신하를 왕이나 후(侯)에 봉한 기사와 연관시켜 봉건영지(封建領地)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담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계속 시행됐으나, 백제의 사비천도 전후 지방조직을 5방(方) 1군제(郡制)로 정비하면서 이에 흡수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길성리 토성의 경우도 이 시기 확립된 담로제도에 의해 한성에서 파견된 왕족이 다스렸을 치소로 추정하는 것이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통전(通典)>에는 ‘동진(東晋) 시대에 백제가 북평(北平, 베이징)과 유성(柳城, 중국 랴오닝 성)을 영유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양서(梁書)>에는 ‘백제가 요서와 진평을 차지하여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백제의 국력이 바다 건너 중국 대륙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은 매우 주목되는 점이다.

근초고왕은 문예중흥에도 힘써 고흥(高興)에게 백제의 사적을 정리하여 <서기(書記)>를 편찬토록 했다. 박사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비롯한 경(經)과 사(史)를 전해주었다. 만약 왕인박사가 한자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그만큼 늦어졌을 게다. 백제 근초고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새로워져야 하는점이 여기에 있다. 일본 아스카 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데 공헌한 왕인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소상히 기록됐다.

백제는 또 일본에 철기 제련 기술을 가르쳤다. 일본의 철기 수입국이 바로 백제였다. 일본 석상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된 칠지도(七支刀)도 근초고왕 시기 왜 왕에게 전해진 유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화성은 마한 땅
화성은 마한의 고지(故址)다. 이 지역 고대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도 마한 3개국이 화성에 있었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원양국’은 지금의 충북 청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어 보다 확대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다른 사료에는 원양국이 ‘애양국(愛襄國)’으로 표기돼 있어 청주 부모산(애양산 혹은 아양산) 지역의 대규모 마한 백제 초기 유적을 유력한 후보지로 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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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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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성리토성 인근 논과 저수지
 


‘모수국’으로 보는 견해는 어문학적으로 화성이 고구려 시기 ‘매홀(買忽)’로 불렸기 때문이다. 모수국(牟水國)의 모(牟)가 중국 측의 표기라면, 매홀군(買忽郡)의 매(買)는 우리 측의 표기다. 즉 ‘모홀’ ‘모곡’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마한은 어떤 나라였을까. 중국 측 사서 <마한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마한은 산과 바다 사이에 거(居)하고, 성곽이 없다. 무릇 작은 나라가 56개국이다. 큰 나라는 만호를 거느리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를 거느린다. 각각 거수(渠帥)가 있다. 풍속은 그 기강이 흐리고, 꿇어 앉아 절하는 예는 없다. 소와 말을 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쌓아 올리는 것으로 장사지낸다. 풍속에 금은 비단을 중히 여기지 않고, 옥구슬을 귀히 여긴다. 옥구슬을 사용하여 옷에 꿰매고, 머리를 장식하고, 귀걸이를 한다. 남자는 머리에 상투를 드러내놓고, 옷은 베옷에 솜을 넣었다. 풀을 엮어 신을 신고, 성질은 용감하고 사납다. 나라에 조역이 있어 성을 쌓고 해자(垓子)를 파는 일이 일어나면 용감하고 강한 어린 소년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로 꿰어 지팡이에 줄을 묶어 종일 힘을 들여 소리치지만 아파하지 않는다. 활과 방패, 창과 망루를 사용하고 비록 전쟁 때 공격하더라도 서로 굴복함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기록을 보면 마한은 처음에 성을 쌓지 않고 강이나 바다에 연한 언덕(丘陵)에 혼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성이나 목책(木柵)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철기로 무장한 북방계통의 세력이 내려오기 시작한 후부터로 상정된다. 그 세력이 고구려 개국 초기 왕권 다툼에서 밀린 소서노와 온조, 비류 집단이었다.

고구려에서 망명한 이들은 처음에는 마한 연맹체의 한 구성원이었다. 백제라는 이름은 마한 54개국 중 하나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백제는 마한 동북방 땅 일부를 얻어 나라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온조는 처음 마한 종주국인 목지국(目支國, 지금의 천안으로 비정)에 신록(神鹿)을 보내거나 전쟁 포로를 바치는 등 조공의 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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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성 발굴 현장
 



공격적인 온조는 군비를 확장하여 주위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했다. 온조왕대 마한과의 충돌과 점령 기사는 이 같은 사실을 입증시켜준다. 그 후 영주 근초고왕대에는 세력 범위를 경기도 유역에서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했다. 위례성 백제 치자들은 왕도에서 가까운 화성의 중요성을 감안, 길성리 등지에 대규모 성을 쌓고 담로를 배치해 이 지역을 통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길성리 백제 세력은 5세기 후반 장수왕대 개로왕의 전사 이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이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이로부터 약 90년 후 신라 진흥왕의 한강유역 진출 시기, 이 지역은 나・제 간 치열한 접전지역이 됐으며 결국은 신라에 병합됐다. 길성리와 인근 많은 토성과 고분들이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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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당성 발굴 현장 3. 당성에서 수습한 토기편 4. 당성 발굴현장에서 수습한 ‘館’자 와편
 



실크로드의 관문 ‘당성’
사적으로 지정된 ‘당성’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에 축조된 석성이다. 백제 시기부터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루트의 관문이었다. 얼마 전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성 동문지에서 명문 기와 40여 점을 비롯해 백제토기 10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명문 기와에는 ‘당(唐)’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당항성의 ‘당(唐)’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번 발굴 결과로 당성이 백제의 당항성일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특히 많은 양이 찾아진 백제 토기는 당성이 백제 시대부터 사용됐음을 보여주는 첫 유물이다. 또 신라시대 유물인 ‘본피모(本彼謨)’ 글씨가 찍혀진 와편도 나왔다. ‘본피부’는 신라 6부의 하나로, 신라 6부 세력이 이주하여 당성 축조에 관여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물이다. 신라 왕도와 멀리 떨어진 지방 유적에서 신라 6부명 와편이 발견된 것은 청주 상당성 남문 아래에서 ‘사탁부(沙啄部)’ 글씨 기와가 찾아진 이후 두 번째 사례다. 청주는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된 곳으로, 이 유물을 통해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다.

글마루 취재팀은 동문지로 추정되는 지점의 절개된 백제・신라 와편 더미에서 우연히 ‘館’명 와편을 수습했다. 명문은 굵은 정자체로 양각됐으며 붉은 색깔로 모래가 많이 섞인 것이었다. 이 명문와편은 이곳에 사신이나 정부 관리들이 묵었을 ‘동관(東館)’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백제 시대 당성은 한때 고구려에 복속되기도 했으나 신라가 차지한 이후에는 대규모 성으로 확장됐다. 그리고 고려~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요지로 활용됐으며 수차례에 걸쳐 보축이 이뤄져 오늘에 이른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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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전곡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