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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전쟁,

대구 전쟁


글. 신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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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벌인 참새와의 전쟁


1958년 1월의 어느 날,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간부들은 국가 주석인 마오쩌둥의 소집 명령에 따라 광시성의 도시인 난닝으로 모여들었다. 회의장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는데, 마오쩌둥이 아주 좋아한다는 뱀과 사향고양이 요리였다. 이 요리는 ‘용호투(龍虎鬪))’ 즉 ‘용과 호랑이의 싸움’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에게 용은 뱀, 호랑이는 고양이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음식 이름에 용과 호랑이가 들어가면 뱀과 고양이 요리로 보면 된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간부들은 이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거의 먹지 못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혼자 맛있게 그 음식을 다 먹어치웠다.

마오쩌둥은 식사를 하기 전에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는 1953년부터 국가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성공리에 마쳤소. 앞으로 우리나라는 3년 안에 영국,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아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될 것이오. 그렇게 하려면 철강 생산을 높여야 하오. 전국 농촌의 모든 집 뒤뜰에는 작은 용광로를 설치해 쇠를 만들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생산량을 크게 늘린다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철을 들여오지 않아도 될 것이오. 나는 국가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제2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이 계획을 ‘대약진 운동’이라고 부르겠소. 우리 다 같이 힘을 합쳐 열심히 일해 봅시다.”

마오쩌둥은 영국·미국 등의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대약진 운동을 시작했다. 인민 공사를 통해 마을마다 작은 용광로를 설치해 철을 생산해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하고 말았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데다 만들어진 철의 질이 형편없어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농촌의 젊은이들이 용광로에서 철을 만드는 일에만 매달리느라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제때 추수하지 못해 곡식들은 들판에서 썩어갔다. 그 여파로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져 전국에서 3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대약진 운동’ 중에는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참새와의 전쟁도 벌였다.
1955년 어느 농민이 중국 공산당 중앙당으로 “참새 등쌀에 농사짓기 힘들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12년 안에 전국에 있는 참새·쥐·파리·모기를 없애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4해(害)’로 규정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마오쩌둥이 회의를 하면서 “‘4해’를 없애야 인민들이
살 수 있다. 내년 봄에는 이 일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라”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둥이 참새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1958년 4월 19일 베이징 시는 ‘참새 섬멸 총지휘부’를 세워 참새 섬멸 작전을 시작했다. 베이징 시민 300만 명을 동원하여 모든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일제히 세숫대야·꽹과리·징을 쳐대고 폭죽을 터뜨렸다. 자동차들은 모두 경적을 울렸다. 그런가 하면 길가에는 붉은 기를 든 사람들을 세워 놓았으며, 나무마다 허수아비를 세웠다. 참새가 높이 날지 못하고 멀리가지 않으며, 소리를 두려워하고 붉은 것에는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약점을 노린 치밀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참새들은 앉을 곳이 없어 공중을 헤매다가 지쳐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참새 섬멸 총지휘부는 참새를 소탕하기 위해 830개 지역에 독약이 든 과자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그리고 200개 지역에는 참새 전문 사냥꾼을 배치해 놓았다.

이런 모든 작전에 힘입어 베이징 시는 참새와의 전쟁 첫날에 참새 8만 3249마리를 해치웠다. 참새 섬멸 작전은 3일 동안 계속되었다. 베이징 시는 참새 40만 마리를 소탕하여 참새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참새 섬멸 작전은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1958년 한 해 동안 모두 2억 1000만 마리의 참새가 목숨을 잃었다. 이제 중국에서 참새는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참새를 소탕하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듬해 봄 전국의 농촌과 도시에 해충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참새는 해충을 많이 잡아먹는데, 천적인 참새가 거의 사라졌으니 해충들이 들끓는 것은 당연했다. 해충들은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혔다. 수확도 하기 전에 곡식을 모두 먹어치웠으니 농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였다. 전국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천만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은 참새와의 전쟁을 중단했다. 그리고 ‘4해’에서 참새를 빼고 대신 바퀴벌레를 넣었다.

중국을 한동안 들썩이게 했던 참새 섬멸 작전은 참새들과 사람들의 목숨만 앗아간 채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문화대혁명 때는 중국에서

많은 개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면서요?”


문화대혁명은 1966년 시작되어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까지 계속된 급진적 대중 운동이다. 중국에서는 10년 동안의 이 시기를 ‘혼돈의 시대’로 보고 있다.

마오쩌둥과 그의 처 강청을 포함한 측근들은 낡은 문화, 낡은 사상, 낡은 습관, 낡은 풍속을 없애야 한다며 이 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고등학생·대학생들로 이루어진 홍위병을 만들어 전면에 내세웠다. 홍위병들은 구습을 타파하고 부르주아적인 것을 뿌리 뽑는다며, 중국 고유 복장이나 서양식
양복을 입은 사람만 보아도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주었다. 심지어 개를 키우는 것이 부르주아적인 생활 방식이라며 개 주인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고 개를 잡아 죽였다. 이 때 많은 개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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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와 영국의 ‘대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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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는 유럽의 북서쪽 끝, 노르웨이와 그린란드 사이에 있는 북대서양의 섬나라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지만 인구는 31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이슬란드는 국토의 70%가 400m 이상인 불모지다. 천연 자원은 거의 없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은 국토의 1%밖에 안 된다. 하지만 섬나라답게 수산 자원이 풍부하여 어업으로 복지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이 나라는 수출품의 80% 이상이 수산물이며, 많은 사람들이 어업이나 수산물 가공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요 어종은 대구·청어·별빙어·해덕 등이다.
1950년대부터 아이슬란드는 대구의 어업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마찰을 빚었다. 급기야는 세 차례에 걸쳐 심각한 분쟁을 치렀는데, 이것이 바로 ‘대구 전쟁’이다.

아이슬란드는 자기네 나라 앞바다에 들어와 고기잡이를 하는 외국 어선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특히 현대식 장비를 갖춘 영국 트롤 어선들이 닥치는 대로 대구를 잡는 바람에 대구의 씨가 말라갔다. 그들이 잡아가는 대구의 어획량은 전체 어획량의 48%를 차지했다.

아이슬란드는 영국 어선들의 고기잡이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1958년 다른 나라 어선들은 아이슬란드 해안에서 12해리까지는 고기잡이를 못하도록 ‘어로 금지 구역’을 정했다.

영국은 발끈했다.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영국 어선들은 예전처럼 12해리 안에서 대구 잡이를 했다. 영국 군함들이 출동하여 영국 어선들을 보호했다. 이때 아이슬란드도 지지 않고 해양 경비정을 총동원했다. 그리하여 발포 사건이 일어나는 등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1958년 9월 1일부터 11월 12일까지 이어진 제1차 대구 전쟁은 다음에 또 문제가 생기면 헤이그의 국제사법 재판소에 넘기도록 하고 가까스로 끝났다. 이 일로 아이슬란드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12해리 영해 주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제2차 대구 전쟁은 14년 뒤인 1972년에 일어났다. 그해 9월 1일 아이슬란드가 영해를 12해리에서 50해리로 넓힌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영국은 당연히 반발했고, 제1차 대구 전쟁 때처럼 군함들이 출동하여 자기네 나라 어선들을 보호했다. 아이슬란드도 해양 경비정을 총동원하여 영국 군함들과 맞섰다.

이런 대치 상황은 해를 넘겨 1973년까지 이어졌다. 아이슬란드는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끊었고, 자기네 나라에 있는 나토 공군 기지를 폐쇄하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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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에게는 아이슬란드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서방 국가들은 영국에게 압력을 넣어 아이슬란드 영해에서 영국 군함들을 철수시키도록 했다. 그리고 50해리 안에서 영국 어선들이 고기잡이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제3차 대구 전쟁은 1975년에 일어났다. 아이슬란드가 영해를 50해리에서 200해리로 넓힌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번에도 두 나라 해군 간에 앞서와 비슷한 대치 상황이 되었지만, 아이슬란드 영해에서 영국이 200해리 밖으로 군함과 어선을 철수시킴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영국이 아이슬란드의 200해리 영해 요구를 받아들여 두 나라 사이에 어업 협정이 맺어졌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200해리 어업권’이 전 세계에 통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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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는 ‘얼음의 나라’이면서 ‘화산의 나라’라면서요?”


‘아이슬란드’라는 이름은 ‘얼음 나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9세기경 이 섬에 첫발을 내딛은 노르웨이계 바이킹이 섬 어디를 둘러봐도 얼음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는 국토의 8분의 1이 빙하로 덮여 있다. 남동부에 있는 바트나 빙하는 얼마나 큰지 유럽대륙의 모든 빙하를 합친 면적과 비슷하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는 ‘얼음의 나라’이면서 ‘화산의 나라’이기도 하다. 아이슬란드에는 화산이 200개나 되고, 그 가운데 지금도 활동을 하는 화산이 30여 개나 된다.

아이슬란드 국민은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에 노르웨이·아일랜드·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수백 년 동안 덴마크의 지배를 받다가 1944년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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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배
시인, 역사 칼럼니스트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창주문학상, 소천문학상 등 수상
지은 책으로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
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등과 시집 <매미가 벗어
놓은 여름>, <햇빛 잘잘 끓는 날>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