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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완판본문화관에서 만난

활자 이야기


글, 사진. 김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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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글자(책)와 가장 친한(?) 존재가 바로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3학년 여고생들과 함께 독일에서 온귀한 손님(구텐베르크 박물관의 유물)을 만나러 전주 완판본문화관으로 갔다.

‘업은 애기 3년 찾는다’는 말은 어떤 것을 지척에 두고도 그것을 거기 두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 허둥댈 때 쓰는 말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현대인의 건망증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 같다.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 더나아가서 오히려 잊어버리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경우에는 건망증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와 반대로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린다면 정말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메모이다. ‘총력불여둔필(聰力不如鈍筆)’이라는 말도 있다. 제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서툴게나마 적어놓은 것보다는 낫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망각의 동물인 인간에게 문자는 꼭 필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시대나 지역을 뛰어 넘어서)과 소통하거나,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전주는 기록 문화의 성지(聖地)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전란에서도 지켜낸 곳이고, 조선 후기에는 완판본(完板本)을 찍어낸 곳이기도 하다. 완판본이란 판매를 목적으로 찍어낸 책을 일컫는다. 책을 사서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정신적・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것이고, 의식 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비옥한 호남평야의 각종 농산물과 서해의 수산물이 모이고, 그에 따라 사람이 모여든 호남의 중심 도시(湖南第一城) 전주. 그래서 조선후기 출판문화의 황금기를 이끈 것이 바로 완판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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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완판본을 널리 알리고 21세기 전북의 새로운 출판문화를 개척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완판본문화관에서 ‘독일 구텐베르크 박물관 유물 특별전’이라는 문자와 관련된 의미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1450년경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42행의 구텐베르크 성서를 제작했다. 그 이전에는 사람이 일일이 필사(筆寫)해야 했으므로 책으로 만들어지는 성서의 양이 극히 적었을 것이다. 드디어 금속활자가 만들어지면서 보급되는 성서가 많아졌다.

성서(성경)는 신(神)의 뜻이 담긴 글이다. 성경을 일부 종교지도자만이 갖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은 성경을 볼 수 없기에 성경에 없는 내용을 말해도 그 말이 성경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지도자가 지어낸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 덕분에 많은 사람이 성경을 가질 수 있었고, 종교지도자가 하는 말이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기독교계에서 큰 문제가 되었던 ‘면죄부’가 성경에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기에 루터의 주장에 동조하였고 그 숫자가 많았기에 종교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자 자체는 별 의미가 없고, 문자가 모여서 단어를 이루고, 단어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 단락을 이루어야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글을 읽는 독자는 이런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더욱이 어떤 단어나 표현 안에 다른것을 감추어 놓았다면 단순하게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담고 있는 실질적인 뜻을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글자와 거기에 담긴 뜻의 관계는 현상과 본질로도 이해할 수 있다.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현상만 보고 판단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가령 A라는 원인으로 몸에 병이 생겼는데(실제로는 A라는 병인데), 그 증상이 B라는 병과 같다 하여 B를 치료하는 방법만을 동원하면서 시간을 끌다가는 치료에 필요한 적기를 놓쳐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난 현상과 본질도 이러한데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느끼고, 그 존재의 뜻을 파악할 때는 어떨 것인가? 약 500년 전 구텐베르크가 찍어낸 성경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어떤 작가는 ‘하도 집안이 가난해 읽을 책이 없어서 거리의 간판, 과수원에서 열매를 감싸놓은 신문지를 읽고 또 읽었노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런 시절을 겪은 세대도 있는데, 지금은 읽을 것이 넘치고 넘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오히려 깊이 읽기를 거부하고 기피하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

평소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문제를 푸느라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앞두고 모처럼 망중한(忙中閑)으로 ‘독일 구텐베르크 박물관 유물 특별전’을 관람하고, 구텐베르크 당시에 금속활자로 성서를 인쇄하던 방식 그대로 요한복음 1장을 인쇄해보는 체험도 했다. 종이 한 장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최소 5단계를 거쳐야 하고, 또 나무로 된 무거운 손잡이를 돌려야 하는 등 많은 시간과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학생들이 이후에 넘기게 되는 책장의 무게가 이전보다 가벼워졌다면 그것은 아마도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일부 특수층의 전유물에서 해방시켜 대중의 눈을 뜨게 했고, 자신들이 책을 읽는 행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자신들의 상황이 오히려 큰 축복이라는 것에 감사함을 느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