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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3·1운동 때 외국 선교사들이 본

한국인, 한국 문화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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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초기 선교사들 (1893)
(왼쪽부터) 월리엄 스왈렌 William Swallen,그라함 리 Garham Lee 사무엘 에이 모펫 Samuel A. Moff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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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번역위원으로 활동한 게일 목사(앞 줄 맨 오른쪽) 김청삼, 김명준, 이장직(뒷줄 왼쪽부터)
레이볼즈(W.D. Reynolds), 언더우드(H.G Underwood), 게일(J.S Gale) (앞줄 왼쪽부터), 1904년 평양.
 



3·1운동이 일어난 지 3주가 지났다. 한 일주일 잠잠하던 만세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들불처럼 더 널리 퍼져, 더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만세시위를 조기에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조선총독부는 당혹스러웠다. 3·1운동은 무지한 한국인들이 외국 선교사들의 꼬드김을 받아 일으킨 일시적인 ‘소동’으로 생각했었다.

군경의 강력한 탄압으로 얼마 가지 않아 종식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3월 셋째 주에 접어들면서 총독부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심각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만세시위는 물을 끼얹으면 일시 불꽃이 잦아들었다가 바람이 불면 낙엽 속 속불이 다시 살아나 무섭게 타오르는 산불처럼 한국의 속민심에 불이 붙어 꺼질 줄 모르고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3월 22일 조선총독부가 한국에 오래전부터 와 있던 외국 선교사들을 조선호텔로 초대하여 간담회를 가진 것은 이런 시점이었다. 처음 외국 선교사들이 배후에 있다고 의심했던 조선총독부는 의심대신 그들의 협조를 구하기로 했던 것 같다.

일본 측에서는 3·1운동 참여자들의 최종심인 고등법원 재판을 관장하는 와타나베 도루(渡邊暢, 고등법원 판사)를 회장으로 하여 가타야마(片山恒夫, 조선총독부 외사과 관리), 고부쿠(國分三亥, 사법부 장관, 고등법원 검사국 검사), 세키야(關屋貞三郞, 학무국장), 호시노(星野), 가와바타(川端), 야마가타(山縣五十雄, Seoul Press 발행인), 사카이도(坂井戶), 니와(丹羽淸次郞, 일본 YMCA 총무) 등 9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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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판사 Watanabe_Toru
 




외국인 선교사로는 웰치(Herbert Welch, 감리교 초대 감독, 1916~1928 재임), 애비슨(Oliver R. Avison, 미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세브란스 의전 교장), 모펫(Samuel A. Moffett,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장), 게일(James S. Gale, 연동교회 목사), 거딘(Joseph Lumpkin Gerdine, 대한성서공회 회장), 브로크만(Frank Marion Bro ckmanm YMCA 협동총무), 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 선천교회 목사), 하디(Robert A. Hardie, 남감리회 의료선교사, 기독교서회 총무), 노블(William A. Noble, 감리교 수원지방 감리사), 벙커(Balzell A. Bunker, 감리교 선교사)가 참석했다. 참석한 외국인들은 당시 20~30년 한국에 주재하며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총독부와의 모임이 알려지면 한국인들의 눈에 일제와 야합하는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했다. 다른 한편 일본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전하고 싶어 했다. 일본 측은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대신 솔직한 의견을 듣는 모양새를 갖추고자 했다. 대외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양측은 모임을 비공식 간담회로 하기로 했다.

회장 와타나베(Watanabe) 판사가 모임의 목적을 설명하며 시작했다. 와타나베는 일본이 선의로 모든 일을 해 왔으며 압제 같은 것은 없었음을 강조
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한국 국민들의 복지라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이 나라의 초목은 모두 벌채되어 산이 민둥산이 되어버렸습니다. (중략) 전체 면적의 2분의 1 이상이 벌채되었습니다. 교육 쪽으로는 학교가 사실상 없었습니다. 소위 학교라는 것들은 중국 고전을 가르치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인들의 지위를 떨어뜨렸으나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 선의로 모든 일을 했습니다. 정부의 압제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될 때 이 불평등을 고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정책을 옹호하는 와타나베 판사의 서두에 대해 연동교회 게일(Gale) 목사가 말했다. 게일 목사는 한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성경을 한
국어로, <구운몽>과 같은 한국 고전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한글학자 주시경과 함께 한어연구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3·1운동이 나기 전까지는 “한국인들은 수동적이고 생존하고 있는 인종들 가운데 가장 고루하고 고대적인 인종이며, 해파리 같이 무골의 중국문화에 빠진 사대주의자들”이라고 했
다. 그런 생각이 3·1운동을 보고 난 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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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분명 일본인들의 통치로 인해 물질적으로 많은 혜택을 입었고, 이에 대해서는 감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상당히 유리(遊離)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한국인들이 누리고 있는 이 세상은 제가 속한 세상과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30년 동안 저는 그 속에 편입되려고 노력해 왔지만 지금까지도 저는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한국인의 세계는 고대의 현실 세계이며, 저는 그 세계에 대해 더 알게 될수록 더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제가 속한 세상보다 한층 더 복잡하게 돌아가고, 여러 가지 일과 이상을 통해 한 인간이 그 자신이 되게 하는 세상으로 제가 속한 서구와는 상당히 다르며, 또한 일본인과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 문명에 어울리는 방식을 택해야 하며, 한국인들에게 이질적인 무언가를 강요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기반 위에 쌓아 올리려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인의 이런 정신적 세계로 가는 열쇠가 바로 문제의 해결책으로 가는 열쇠입니다. 육체는 편할지 모르지만 마음의 안식이 없다면 한국인들에게는 육체적 안식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

아마도 게일 목사는 한국인들이 중시하는 인륜 도덕, 자연과 인간의 공존 등 서구나 일본보다 더 문명적인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통치는 한국의 문화적인 특성을 고려하여 그에 어울리는 문명적 방식으로 해야 하고, 강압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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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렉산터 하디 선교사
 



이어서 모펫 박사도 한국인들이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것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으며, 나아가 ‘남루한 무명 바지저고리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한국인들의 높은 문명성과 빛나는 정신문화’를 일본이 알아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한국에서 30년을 살아 왔으며, 한국인 친구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공감합니다. 한국인들의 아주 친한 친구이자 그들을 찬양하는 한 사람으로서 말합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교육은 이것과 괘를 같이 해 한국인들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정의이며, 한국인에게 있어 정의는 물질적인 어떤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에게 정의를 주면 그들은 그 가치를 알고 감사히 받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도덕적, 정신적 측면의 문명은 중국과 같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인간으로서 대우받는 것을 감사하며 신체적인 안락보다 인격과 가치를 훨씬 더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디(Hardie) 박사는 이러한 문명적인 한국인을 통치하는 데 있어 공정하고 인간적인 통치가 결여되어 있고, 무력으로 강제하는 통치로써는 한국인들의 충성을 얻을 수 없음을 지적했다.

“저는 한국인들을 매우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지난 몇 년간 그들이 이룬 인격적인 발전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발전은 일본인들과 선교사들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중략) 저는 이 나라의 발전을 기뻐했고, 경제적 번영과 향상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이런 물질적 발전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감정은 대체적으로 이런 발전이 전적으로 자신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자신들이 열등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위압적인 억압을 당하는 한 이런 혜택들은 결코 만족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인격적인 성장에 비례하여 분노감도 증가했고, 이제 우리는 그 표출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그들이 느끼기에 인종 차별이라는 고의적이고 강압적인 형식에 반대하는 반항과 불신과 불만이 쌓여 있다가 처음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무력으로 한국인들을 제국에 충성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어내야만 합니다. 그 마음으로 가는 길은 몸이나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정신에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신임을 얻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손으로 이룬 과업을 스스로 망치지 말도록 합시다.”

한국인을 오래 접촉해온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가진 정신문화가 매우 높으며, 정의를 사랑하고 문명적인 접근이 아니면 한국인들의 승복을 받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런 외국 선교사들의 한국인에 대한 긍정적인 발언이 이어지자 일본인 관리들은 불편해졌다. 그들은 변명하며 어떻게 하든지 선교사들의 협조를 받고 싶어서 선교사들이 협조할 의향이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정책은 정당하며,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반역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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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호텔
 


총독부 학무국장 세키야(Sekiya)는 “정부에서 한국인들의 생각을 무시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고의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들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라고 변명하면서 “정신적인 가치에 치중하여 물질적 생산과 발전을 등한히 하며, 지나치게 형식에 구애되는 한국인들의 단점을 뿌리 뽑으려 하니 협력하기 바란다”고 협조를 강요했다.

가타야마(Katayama)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합병으로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된 한국의 국민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반역적인 행동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는 일본 관리들에게 자유, 정의, 인도와 인류평등 같은 보편주의적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