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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물 양성을 주장한

샘골 여성‘ 최용신’


글.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사진제공. 안산시 최용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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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골교회 교우들과(1934년, 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최용신)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조선의 부강을 꿈꾸었고, 신인물 양성을 위해 여성과 어린이의 교육에 힘을 실었던 여성지도자, 최용신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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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소설 <상록수>의 그녀, 최용신!

그 시대 청년은 조국이 우선이었다. 일신의 영달보다 가슴 속 뜨거운 열망을 담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오직 조국 독립을 염원했다. 영화 ‘동주’에서 비추어지는 청년의 모습에서 어렴풋하게 조국과 청년의 연결고리에 대한 기억을 선명하게 한다.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인 최용신도 바로 그 시대 청년이었다. 암울했던 환경속에서도 삶의 가치가 무엇이며 희망의 씨앗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1934년 어느 날. 최용신은 비통한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그 시대 문명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농촌에 뛰어들어 문맹퇴치와 의식 개혁을 주도했건만, 샘골강습소에 YWCA의 지원이 중단된다는 소식은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당시 이상적인 농촌운동의 모델을 찾기 위해 고국을 떠나 일본 고배여자신학교에 입학해 있던 터라 글로써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한탄하며 써내려가는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 하거늘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우리에게 무슨 발전이 있으며 늘어감이 있겠습니까. 도시의 여러분이여! 당신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스럽고 얼마나 안락하십니까. 여러분 중에는 하루 저녁 오락비와 한 벌 옷값으로 몇 백원을 쓰신다 하옵거늘 우리 농촌의 어린이들은 자라기에 배가 고프고 배움에 목이 마릅니다. 뜻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 주소서”라고 후원을 하소연하는 순간에도 고국을 향한 그리움은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1932년을 기점으로 일본총독부는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다. 생활개선사업을 명목으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며 농촌진흥운동을 확대해갈수록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농촌계몽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최용신이 몸담았던 시골마을 샘골에도 농촌개혁을 위한 YWCA의 지원금이 줄었고 이어 중단소식이 전해졌다. 최용신의 자기희생과 헌신으로 펼쳐온
농촌계몽운동의 산실, 시골마을 샘골의 희망의 씨앗은 그렇게 꺼져가고 있었다.

조선 여성의 패기

최용신은 1909년 8월 12일, 부친 최창희(崔昌熙)와 모친 김씨 사이에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는 교육 사업에 매진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했고, 부친은 1920년 미의회한국방문단이 방문했을 때 한국독립의지를 전달하려 한 이유로 체포되었다. 조부에 이어 부친까지 항일구국활동에 투신했던 집안의 영향으로 최용신은 조국 독립에 헌신하는 선구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더욱이 최용신이 태어난 강원도 원산은 외국 문물의 유입이 빈번하고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된 곳이었기 때문에 신문물과 기독교 사상의 수용이 용이했다. 그 선상에서 최용신은 교육의 기회와 선진화된 문물을 습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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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기념관 정면
 

시원스런 이목구비에 강한 의지로 농촌계몽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빛낸 최용신. 때로는 자비로우면서도 엄격한 면모가 빛난 의지의 여성이었다. 그는 개화의 손길이 깊이 닿지 못했던 농촌에 무지와 싸움을 선언했고,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문맹퇴치와 여성 계몽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농촌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당시 재화와 용역, 소득의 원천이었던 농업에서 희망의 끈을 찾고, 그 소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발동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세계적인 농업국인 ‘덴마크의 이상적 농촌 운동’처럼 한국적 농촌 모델을 찾아가는 것이 숙원이라 생각했던 그의 삶에는 조선 여성의 패기가 담겨있다.


YWCA 농촌운동에서 브나로드 운동까지


1928년 4월 1일자 조선일보에는 ‘새봄마저 교문 나서는 재원들-원산 루씨학교의 특출한 네규수’가 소개되었다.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의 졸업생 취재에서 언급된 최용신의 기사에는 그의 확고한 소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략) 그들 가운데는 장차 음악과 문학에 성공할 소질을 가졌고 또한 이 방면에 노력하는 두 규수가 있으니 즉 전자는 박현숙 양이요, 후자는 최용신 양이다. (중략) 최 양은 농촌여성 교육문제에 많은 연구를 하는 중이니 그가 언제든지 글을 쓰면 ‘조선의 여성운동은 농촌에서부터 일으키자’ ‘먼저 문맹퇴치운동에 노력하자’ 이것이 내용의 중심이 된다 한다. 그럼으로 그는 농촌문제에 대한 서적을 탐독하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였다 한다. (생략)

-조선일보 1928년 4월 1일자


YWCA의 농촌지도사업과 농촌활동의 실습은 그의 일생을 바꾸어놓고 말았다.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이었던 그 시절. 일제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고 있었던 조선의 농민들. 그들은 힘없는 조선의 현실을 대변했기에 최용신은 조선의 희망을 찾기 위한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조선기독교 청년학생의 사명’과 ‘조국의 당면한 현실’에 대해 청년들과 고민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침없이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브나로드 운동가’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그는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했고, 농촌개혁과 문맹퇴치에 열정을 쏟아내는 지극한 농촌계몽운동가로 거듭났다. 시골마을 샘골에서 조선의 희망이 피어나다 최용신은 1931년 10월.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천곡(泉谷) 샘골 마을을 찾았다. 1907년 홍원삼, 홍순호 목사가 설립한 샘골교회에 농촌지도사로 파견된 그는 농촌개혁을 위해 뛰어든 여성지식인 가운데 있었다. 먼저 문맹퇴치를 위한 공부반을 운영하여 한글, 산술, 재봉, 수예, 가사, 노래, 성서 공부뿐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일련의 활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교육의 기회로부터 소외되었던 여성과 어린이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파악하고 문맹퇴치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는 교육을 통한 신(新)인물 양성 즉 인재양성을 통한 농촌계몽을 꿈꾸고 또 꾸었다. 조선민중의 계몽을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농촌계몽 사업이 확산될수록 일제는 철저한 탄압의 테두리에 넣기 시작했다. 일본총독부는 샘골강습소의 교습내용을 감시하고 활동을 통제하는 등 지식인들을 몰아붙였다. 갖은 감시와 방해공작 속에 그 타개책을 찾기 위해 최용신은 일본 코베 여자신학교에 진학해 선진화된 농촌계몽운동의 해법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조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YWCA 연합회의 지원이 중단되면서 샘골마을의 재정적인 어려움은 더해만 갔다. 그렇게 꺼져가는 샘골의 기적을 바라보며 절망에 몸서리쳤던 그는 투병생활을 거듭하다가 1935년 1월 23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작은 시골마을 ‘샘골’에서 피어난 조선의 희망. 그 싹을 틔웠던 한 여성지도자 ‘최용신’을 보노라면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힘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나라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