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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가치, 아는 만큼 보인다
나의 가치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사람 만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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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이야기는 하늘 끝에 닿으려 한 인간의 교만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바벨탑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신이 되려 하거나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 신화의 세계에서도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바람에 불행을 자초한 어리석은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손재주 좋은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가 그중 하나다. 아버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너무 높이 날아오르는 바람에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내려 그만 떨어져 죽고 말았던 아들이다. 아버지의 간곡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기로는 파에톤도 마찬가지였다. 불효막심한 파에톤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태양 이륜 마차를 몰고 날아올랐다가 하늘과 땅을 모조리 태워먹고 만다. 보다 못한 제우스가 벼락을 던졌고, 파에톤은 머리에 불을 붙인 채 떨어져 죽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자식이라고 했다. 조심성 없고 철없는, 거기에다 교만하기까지 한 아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천하제일의 손재주를 가진 다이달로스도, 태양의 신 아폴론도 애지중지하는 아들이었지만, 어찌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비단 우리들끼리만 하는 말이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신화에서는 파에톤과 이카로스와 함께 분수를 모르고 경거망동하는 바람에 신세를 망친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한다. 벨레로폰이다. 그가 파에톤과 이카로스처럼 분수를 모르고 건방을 떤 것은 맞지만 그들과 다른 것은 그가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영웅이란 괴물을 때려잡는, 보통 인간들과 차원이 다른 인물이다. 헤라클레스도 영웅이고, 반인반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은 테세우스도 영웅이다. 벨레로폰도 영웅의 무리에 속하지만, 그 끝은 좋지 않았다. 분수를 모르고 까불었기 때문이다.

영웅 벨레로폰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살인죄를 저지른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동생을 죽인 죄다. 동생을 죽인 뒤 도망을 간 게 아르고스였고, 거기서 프로이토스 왕의 보호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프로이토스 왕의 아내 스테네보이아가 그만 벨레로폰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스테네보이아는 벨레로폰을 유혹했다. 그러나 유혹이 먹혀들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왕비는 벨레로폰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뒤집어 씌웠다. 화가 난 프로이토스 왕은 벨레로폰을 장인에게 보냈다.

그 장인이 이오바테스 왕이었다. 그를 만나러 갈 때 벨레로폰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프로이토스가 장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편지를 열어보니, 벨레로폰을 죽여 달라고 쓰여 있었다. 벨레로폰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사형 집행 영장을 들고 간 것이다. 여기서 ‘벨레로폰의 편지’라는 말이 나왔다. 전하러 온 당사자에게 불리한 편지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이런 기가 막힐 일이 종종 생긴다. 영국의 시인에드워드 영(Edward Young)은 <밤의 명상(Night Thoughts)>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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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부정하는 맹목적인 자는,
벨레로폰이여, 그대 같이 자기에 대한 고발장을 전하는 자다.
제 몸에 제 스스로 선고를 내리는 자다.


이오바테스 왕은 당황했다. 손님을 죽이자니 도리가 아니고, 그렇다고 사위의 청을 거절하자니 그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고민 끝에, 이오바테스 왕은 묘안을 짜냈다. 마침 그 나라에 괴물이 하나 있으니, 그놈을 벨레로폰이 죽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괴물도 죽이고 벨레로폰도 없앨 수 있는 일거양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괴물이라는 게 키마이라라는 놈인데, 몸통의 앞쪽은 사자와 산양을 합친 모양이고, 꽁무니에는 용꼬리가 달려 있었다. 이놈이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벨레로폰은 영웅이었으나, 막상 괴물과 맞서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 예언자를 찾아가 방법을 물으니 아테나 신전에 가면 묘수가 나올 것이라 했다. 과연 아테나 신전에서 하룻밤 묵으니 꿈에 아테나 신이 나타나 황금 고삐를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꿈에서 깨고 보니 손에는 황금 고삐가 쥐어져 있었다.

황금 고삐를 들고 꿈에서 아테나 신이 알려준 우물을 찾아가니, 과연 페가소스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페가소스는 날개 달린 말, 천마(天馬)였다. 어느 누구도 감히 길들일 수 없었던 페가소스였으나 벨레로폰을 보자 스스로 다가와 고개를 내밀었다. 벨레로폰은 페가소스를 타고 달려가 단숨에 괴물의 목을 베었다.

벨레로폰마저 죽어 없어지기를 바랐던 이오바테스 왕은 난감했다. 괴물이 죽은 것은 좋은 일이나, 벨레로폰이 살아남은 것은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래, 이오바테스 왕은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거듭 시련을 주었으나 벨레로폰은 그 모든 것을 다 이겨냈다. 그에게는 하늘을 나는 페가소스가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었던지, 이오바테스 왕은 벨레로폰을 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베렐로폰은 과연 영웅이었다. 헤라클레스가 그랬듯이, 모든 시련을 이겨냈다는 것은 신의 보살핌을 받는 영웅이라는 뜻이다.

교만이 문제였다. 벨레로폰은 우쭐대며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신들이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마침 벨레로폰이 페가소스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다. 제우스가 옳다구나 하며 ‘등에’ 한마리를 풀어 날려 보냈다. ‘등에’는 날개를 앵앵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라 페가소스의 엉덩이에 따끔하게 침을 놓았다. 페가소스가 놀라 온몸을 뒤틀었고, 그 바람에 벨레로폰이 땅으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다행히 죽지는 않고, 절름발이에 장님이 되었다. 영웅이었으니 죽지는 않았던 것이다.

주인 잃은 페가소스도 가난한 농부에게 팔려가 마차나 쟁기를 끄는 신세가 되었다. 주인은 천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느 날 지나가는 젊은이가 말을 한 번 타 보자 부탁하여 올라타니, 페가소스가 날개를 파닥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여기까지가 영웅 벨레로폰과 천마 페가소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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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든 연장이든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제 아무리 타고난 재주가 있고 인품이 훌륭해도, 알아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달리 하는 말이 아니다.

이오바테스 왕은 영웅 벨레로폰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영웅이라는 걸 진작 알아봤더라면 처음부터 제대로 활용했을 것이다. 괴물을 죽이고 벨레로폰도 함께 죽어 없어지기를 바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영웅의 대접을 해주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천마 페가소스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도 길들이지 못하는 말이었으나, 아테나 신의 뜻에 따라 순순히 벨레로폰에게 고개를 숙이고 복종했다. 하늘을 나는 천마에게는 쟁기를 끄는 것보다는 영웅을 태우고 괴물을 무찌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페가소스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주인을 잃고 짐마차나 쟁기를 끄는 신세가 됐을 때 낙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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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도 페가소스 같은 신세들이 부지기수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운이 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세상 살 맛이 사라지고 기가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는 인물을 만나느냐 여부가 운명을 결정짓는다. 사회에서도 그러하고 가정에서도 역시 그렇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그러니 날 알아봐 줄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내가 찾아 나서든, 우연히 동쪽에서 찾아온 귀인이든, 아무튼 나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만약 그대가 지금 주인 잃고 쟁기나 끄는 페가소스 같은 처지라면, 날 알아보는 새 주인을 찾아 나설 일이다. 그리하여 길 가던 젊은이를 태운 페가소스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듯, 그렇게 다시 비상해 볼 일이다. 그리고 그대가 설사 다시 하늘을 훨훨 날아다닐 만큼 팔자가 폈다 하더라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 영웅 벨레로폰이 결국 불행해지고 만 것은 교만했기 때문이다.



05.jpg  전경우 |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