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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품은 조선의 여인, 윤희순


글 사진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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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도 나라를 위해서 일어나자고 외쳤다. 엄격한 유교가정에서
집안일만 하고 문 밖 출입이 없던 당시 여자들에게 이와 같은 외침은
크나큰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외당선생삼세록-행장> 중에서 -





조선의 여인은 왜 붓과 무기를 들었을까

여인의 목선을 에워싼 동정 깃과 섶. 그 옆에 놓인 가느다란 고름과 도련을 잇는 배래가 끝동에 머물때면 여인의 맵시는 한껏 드러난다. 조선시대 여인의 단아한 한복에 쪽진 머리, 그 시대 양반가 여인의 모습이다. 그들이 단아함을 던지고 조국을 가슴에 품기 시작한 이유. 그것은 나라사랑이었다.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유입된 해외 문물과 외부 종교는 집안에 머물러 있던 여성들을 집 밖으로 이끌었다. 특히나 근대화의 물결 속에 스며있었던 자유, 평등, 존중의 키워드와 마주했지만 조선의 현실은 외세 침략의 현실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양반가 여성의 손에는 붓과 무기가 쥐어졌다.

일제강점기 거대한 세계 질서의 흐름 속에 암울해져가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했던 이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항일 구국 운동의 대열에 들어섰다. ‘조국 수호’를 외쳤던 이들 중에 여성도 자리했다. 강원 춘천 지역에서 여성의병단체를 이끌었던 의병장 윤희순(尹熙順, 1860~1935). 그녀는 의병 운동
의 한 자락에서 여성의 존재를 알렸던 대표적인 여성 인물이자, 독립운동의 정신적 근간인 의병운동을 시작으로 40여 년간 구국운동을 실천한 여성독립운동가였다.

해주윤씨 집안의 윤익상과 덕수장씨의 장녀로 태어나 16세에 고흥유씨 집안의 유제원과 혼인을 했는데, 시댁은 위정척사운동과 활발한 의병활동으로 다수의 의병장이 배출된 투철한 애국 집안이었다. 의군도총재 유인석을 비롯해서 의병장이자 시아버지인 유홍석은 집안에 머물렀던 조선의 여인
이 구국 운동에 앞장서는 의병장,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시대는 인물을 만들고 인물은 시대를 바꾼다고 했던가. 비록 여성이었지만 윤희순이 남녀의 구분을 넘어서서 구국 운동을 실천하며 강직한 인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이유, 그 원동력은 가정 환경에 닿아 있다.

1895년. 그 해 조국의 절박함은 조선 여인의 가슴에 조국애가 피어나게 했다. 일본 자객에 의해 조선의 국모가 무참히 시해된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저항하는 의병 운동을 지켜보며 ‘지금 여인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라가 위급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떠올
렸던 윤희순.


   



그녀는 조국의 현실을 마주하며 용솟음치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붓 끝에 담아냈다. 일본 대장을 향해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으로 당당하게 경고성 발언을 격문으로 쏟아낸 결실, <왜놈 대장보거라>는 일본 대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어 시대의 절박함을 민중과 나누며 쏟아내었던 <
안사람 의병가> <왜놈 앞잡이들아> <안사람 의병가 노래> <병정 노래> 등 16편의 저작 가사에는 조선 여인의 나라 사랑이 스며있다.

‘나라 없이 살 수 있나’ 조선의 여인, 독립운동가로 일어서다

“아버님, 저도 의병에 나서겠습니다. 함께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시아버지를 향해 의병 참여를 간곡히 외쳤던 윤희순은 여성도 의병 항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나도 가자 나라 없이 살 수 있나 죽더라도 나가 보세. 왜놈들을 잡아다가 살을 갈고 뼈를 갈아도 한이 안 풀리는데 우리 청년들이 가만있을 쏘냐 나가 보세 의병하러…’ 라고 침잠된 구국 의지를 가사로 저작하여 지역민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윤희순의 의병 가사. 그래서였을까. 춘천 지역에는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단체 ‘안사람 의병단’이 자발적으로 구성되면서 그 선봉장에 윤희순이 섰다. 군수물자 조달
및 보급, 첩보 활동, 정보 수집, 부상병 간호, 화약과 무기 제작 등에 이르기까지 직접 무기를 들고 항일투쟁 활동의 대열에 섰던 양반가 여성. 그들의 모습은 단아함을 넘어서서 강인함으로 무장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애국으로 뭉쳤으니 고혼(孤魂)이 된들 무엇이 무서우랴. 의리(義理)로 죽는 것은 대장부(大丈夫)의 도리(道理)거늘 죽음으로 뭉쳤으니 죽음으로 충신 되자.
- 윤희순 저작 가사 <병정노래> -


하지만 1910년 8월 26일.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바쳐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쳤지만 치욕적인 한일병탄 소식이 전해지며 비통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국권피탈로 무너진 희망. 그들은 그 불씨를 틔우기 위해 국내에서 압록강을 건너 타국에서 독립 운동을 준비했다. 불모지의 땅을 개척하고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가며 독립 운동을 준비했던 이들. 그것은 조국을 잃은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리운 고향을 그리며 서러움에 북받쳤던 이들의 심정을 가사로 표현하여 달래고자 했던 윤희순의 가사에는 나라 잃은 설움이 절절히 배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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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동상
 




나라잃은 설움이란 이렇듯이 서러울까 어느때나 고향갈까 죽은고혼 고향갈까
까막까치 밥이될까 어느짐승 밥이될까 어느사람 만져줄까 나라잃은 설움이란
하루살면 살았거늘 어이이리 서러우랴 둘도없는 목숨하나 나라찾자 하는의병
장하기도 장하도다 이역만리 타국땅에 남겨둔건 눈물이라 슬프고도 슬프도다
- 윤희순 저작 가사 <신세타령> -


윤희순은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항일인재를 양성하는 학교 ‘노학당(老學堂)’을 건립하며 다시금 지도자로 일어섰다. 그녀의 의지가 빛을 발하는 그곳에는 의병정신에 배태된 충(忠), 효(孝), 의(義)가 ‘항일, 애국, 분발, 향상’을 추구하는 애국정신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작은 규모의 항일인재 양성기관이었지만 노학당에서는 50여 명의 항일인재가 배출되었고, 일제의 탄압으로 1915년 폐교되었다. 이후 조선독립단, 조선독립단학교, 가족부대 활동으로 무장투쟁 운동의 대열에 들어선 윤희순과 그 가족들. 중국인을 향해 일본에 저항하자고 소리 높였던 윤희순의 연설은 현지인의 뇌리에도 선명한 기억을 남겼다.

“천번을 넘어지면 만 번을 일어서겠습니다. 한 민족의 원수를 갚고 우리 가족의 원수를 갚고 조선의 국권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오직 조국독립을 염원했던 그녀는 ‘해주윤씨일생록’을 남긴 채 1935년 8월에 생을 마감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독립운동가의 행적과 같이 조국 광복의 결실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국권을 찾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투쟁의 역사이자 희망을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의 끊임없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들 속에서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었던 조선의 여성, 윤희순은 조국을 위해 붓과 무기를 드는 순간에도 조국을 가슴에 품었던 한국의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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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유제원 선생과 윤희순 의사의 합장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