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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왕국의 부활’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
동양 最古 천문 관측대 첨성대


글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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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전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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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입구
 




삼국사기(김부식, 1145년경) 신라 시조 혁거세가 갑자년(서기전 57)에 개국하고 국호를 신라로 하였다. 파사왕 22년(서기 101)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 하였는데 둘레가 1023보였다.

경주 톨게이트를 지나다 보면 신라인의 미소가 반겨준다. 조용한 도로를 지나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는 분황사를 찾았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때 지어진 왕실 사찰이다. 신라시대 최초의 석탑으로 꼽히는 모전석(국보 제30호)이 있는 곳.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석탑이다.

1층 몸체 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다. 감실 양쪽 문 사이로 불상이 보이고, 불전 문을 지키는 인왕상이 돋을새김 되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위에는 우람한 네마리의 석 사자가 석탑을 지킨다. 그 주위에는 연등을 형형색색으로 매달았다. 소원이 많은 사람들이나 불자들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석탑 주위를 돌며 기도한다. 그렇게 석탑 주위는 항상 분주했다.

석탑 옆에는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 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여져 있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을 새겼다. 비석은 고려 숙종 6년(1101) 8월에 내린 조사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된다.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이 애석하여 왕이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운 것이다. 받침돌 상단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이라 새긴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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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우물
 




호국용이 살았다는 신라시대 우물

누군가 범종을 울렸는지 은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갑자기 조용해진다. 이때 고요함을 깨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 우물이다!” 같은 또래 아이들이 우르르 우물 주위로 몰려든다. 처음 보는 우물인지 아이들은 우물 안을 한참 들여다본다. 우물 옆에는 ‘호국룡변어정’이라는 신라시대 우물이라고 기록했다. 우물 틀의 외부 높이는 70㎝, 8각 내부는 원형이다. 불교의 팔정도와 우물 안의 사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체(四聖諦)를 뜻한다.

우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 원성왕 11년(795) 당나라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난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 자신들은 동지 청지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라고 말한다.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에게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 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며 구해달라 호소한다. 왕은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물고기를 다시 빼앗고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살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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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여래입상
 



조선 영조 50년에 제작된 ‘약사여래입상’

경주의 가을이 깊어 가는지 보광전 옆 감나무 잎사귀가 힘없이 떨어진다. 가지 사이에 주홍색 감이 주렁주렁 열려 손만 내밀면 닿는다. 사람들은 보광전을 왕래하며 기도한다. 그 앞을 지날 때 금색의 불상이 보였다. 둥글고 낮은 상투 모양에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 대의를 입고 왼손에 건칠제(乾漆製) 약그릇을 든 모습. 큰 눈을 반쯤 내리고 아래쪽을 쳐다본다. 마치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조선 영조 50년(1774)에 제작된 약사여래입상(문화재자료 제319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라는 붉은 글씨가 있다. 불상은 대의 사이에 화형을 접고 띠를 두른 군의가 U자형으로 층단을 이뤄 더욱 장대해 보인다. 대좌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판석을 대신했다. 불상 앞에 놓인 석제 불단은 사천왕상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신석을 받침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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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전의 모습
 




동양의 천문 관측대 ‘첨성대’

경주의 역사와 문화는 신라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는 변화에 능동적이며 외부세력에 열려있는 국가였다. 다양한 문화를 소화하고 과학과 기술을 숭상했다. 대표적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 첨성대(국보 제31호)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첨성대 주위에 향토해설사들이 신라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신라 덕흥왕 이후 26대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리고 한반도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덕여왕.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재위(632~647)에 만들어졌다. 화강석을 가공하여 조성한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올렸다. 그 위에 장대석을 우물정자형으로 축조하여 정상부에서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됐다. 해설사의 말을 듣는 동안 비단벌레전기자동차가 앙증맞게도 지나간다. 때때로 첨성대 주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는 지킴이가 있다. 뛰는 진동으로 첨성대가 조금씩 기울어가기 때문이다.

정남쪽 석단에는 아래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가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되어있다. 이곳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 규모는 밑면의 지름이 5.17m, 높이가 약 9m이며 지대석 한 변의 길이가 5.35m이다. 신라시대 석조물로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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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국보 제31호)
 




김알지 탄생 알리는 계림, 섬처럼 떠 있는 내물왕릉

목화밭 옆에는 계림길이라는 푯말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울창한 숲에 멀리 보이는 내물왕릉이 떠있는 섬처럼 보인다.

계림(사적 제19호)은 첨성대와 월성사이에 위치해 있다.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곳. 토담으로 지어진 나무대문을 열면 작은 정자가 보인다.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을 새겼다.

신라 탈해왕의 호공이 이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는다.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자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린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하여 성을 김,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 구림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으로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다.

숲속에는 몸체가 두꺼운 고목들이 혼자 서있기 어려워 받침대를 세웠다. 좁은 외길을 따라 가다보면 내물왕릉(사적 제188호)이 눈앞에 펼쳐진다. 능은 신라 제17대 내물왕 재위(356~402)를 모신 곳으로 대릉원 남쪽에 있다. 밑 둘레는 약 68m, 높이 약 5.5m 지름 약 22m 정도로 을 둥글게 쌓은 원형봉토분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왕릉의 분봉은 단단하고 안정적인 느낌이다. 주변의 노송과도 매우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봉분 아래쪽에는 호석으로 추정되는 자연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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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사적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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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왕릉
 



김 씨로 두 번째 왕위에 오른 내물왕. 이후 김 씨 성에 의하여 독점적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왕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며 외교와 국방에 힘썼고 고대국가의 체제를 확립했다. 삼국유사에는 내물왕릉이 “첨성대 서남에 있다”고 기록했다.

‘석탈해’와 열병에서 시달린 백성을 구한 ‘석빙고’

계림 숲을 나와 나무다리를 건너면 탁 트인 길을 맞이한다. 에스자로 굽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언덕빼기가 나오는데,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월성이다. 이곳은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해서 신월성, 월성이라 불렀다. 조선시대는 반월성이라 불렀고,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했다. 현재 제16호 경주 월성성곽은 무너진 돌만 남아 있다.

파사왕 22년에 성을 쌓아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으며, 그 이후로 신라 역대 왕들의 거처가 됐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석탈해가 어릴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한다. 남해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를 사위로 삼는다. 이후 석탈해는 나중에 신라 4대왕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월성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을 길게 자리하고 있는 얼음 창고 석빙고(보물 제66호)가 있다. 석실은 직사각형으로 1000여 개의 돌이 쓰였다. 천장 외부는 봉토의 형상을 하고 있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구멍이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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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모양의 석빙고내부
 



석빙고는 영조 때 조명겸이라는 사람이 왕명을 받아 만들었다. 영조는 밤마다 잠행을 나가 백성들을 살폈고, 여름이 되면 백성들이 열병에 시달리는 것을 알게 된다. 석빙고를 지은 것은 겨울에 얼음을 보관해 두었다가 여름이 되면 일정량의 얼음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기 위함이다. 빙고가 있는 곳은 공통점이 있다. 주로 강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한다. 얼음을 만들기 위해 강과 가까운 곳에 빙고를 지은 것이다. 강이 멀리 있으면 가져오다 얼음이 녹기 때문이다.

월성 남쪽에는 남천 ‘미리내’라는 강이 있다. 강에서 얼음이 얼면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내부 천정은 무지개 모양으로 바닥의 경사는 15도 정도다. 이렇게 만든 것은 자체적으로 냉기가 발생하지 않으면 얼음은 물로 바뀌기 때문이다. 석빙고는 오늘날로 말하면 아이스박스와 같은 역할을 했다. 출입구는 남쪽에 있고 계단을 통하여 출입하게 된다.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 숭정 기원후 ‘재신유추팔월 이기개축’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영조 17년(1741)에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옆에 있는 석비에는 경주부윤 조명겸이 얼음 창고를 돌로 만들었다가 3년 만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된 곳에 석빙고 옛터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