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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황제국’임을 상징한 ‘환구단’

제천(祭天) 의례 거행의 으뜸 장소


신위 모시고 하늘에 제사 올리는 신성한 곳

조선 세조 때 제도화 했다가 일시적으로 폐지


글/사진 박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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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 중 가운데 문을 통해 본 황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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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다시 세운 환구단(1911년, 한국풍속풍경사진첩)의 철거되기 전 모습 (사진 = 문화재청 제공)
 

   

지난달 5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의미 있는 유물을 공개해 화제가 됐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한 장소였던 ‘환구단(圜丘壇)’에서 나온 유물들이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황단(皇壇)’ ‘원구단(圜丘壇, 圓丘壇)’ ‘원단(圜壇, 圓壇)’이라고도 한다.

박물관은 소장해온 유물 중에서 제사와 관련 있는 황천상제(皇天上帝, 하늘 신), 황지기(皇地祇, 땅 신),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등의 신위를 황궁우(皇穹宇)에 봉안할 때 사용한 ‘신위병풍’과 각종 제기 등을 공개했다. 이들 유물은 환구단과 환구제에서 사용한 의례 용품임을 밝히고, 처음 공개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 있다.


광무 원년에 다시 세우다

우리나라의 제천(祭天,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 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됐다. 이후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발전, 제도화된 환구제(圜丘祭)는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년) 때부터 거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황제국’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이에 조선은 1456년(세조 2)에 일시적으로 제도화해 이듬해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1464년(세조 10)을 끝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를 중단했다.

이후 긴 세월이 흘러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이 대한제국의 수립을 준비하면서 1897년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인 남별궁 터에 단을 만들어(단지) 제국의 예법에 맞춰 환구단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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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추정 배치도로, 환구단이 있던 자리에 현재 조선호텔이 들어서 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황궁(현재의 덕수궁)과 마주 보는 자리에 지어졌다. 고종이 환구단을 다시 세우고 환구제를 복원한 것은 ‘중국과의 단절’ ‘자주독립국의 수립’을 상징한다.

고종은 1897년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환구단이 완공된 같은 해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 왕을 ‘황제’라고 칭하고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이에 1897년을 ‘광무 원년’이라 한다.

환구단의 설계는 당시 왕실 최고의 도편수였던 심의석(1854~1924년)이 했다.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는 환구단 완공 이후 1899년에 단지 내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축조됐다. 여기에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했으며,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철거 후 조선호텔 전신 세워 규모 축소
현재 황궁우·삼문·돌북만 남아

지난달 초, 직접 찾은 환구단 터(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1번지)의 모습은 외롭기 그지없었다. 높은 고층 건물 사이에 3층 8각 황궁우만이 외로이 남아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적 제157호 ‘환구단’임을 알리는 안내판 옆의 작은 문을 통해 황궁우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시간제한을 두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황궁우에 가까이 갈수록 신위를 봉안했던 곳이기에 엄숙함이 절로 느껴졌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환구단은 따로 있었다. 환구단 전체 규모는 꽤 컸다. 조선시대 때 환구단의 구조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단(壇) 주위를 6장(丈)으로 하고 단 위에 천황대제(天皇大帝)와 오방오제(五方五帝)의 신위를 봉안했다. 그러나 단상이 좁아 1411년(태종 11)에 확장해 단 주위를 7장으로 해 단으로 오르는 12층계를 만들고, 단 아래에는 3개의 토담(土壝)을 만들어 주위 담에는 4개의 문을 냈다. 그리고 단 남쪽에는 높이 1장 2척 창호방(窓戶方)의 요단(燎壇, 축문(祝文) 따위를 불사르는 곳)을 다시 쌓았고, 신주(神廚)와 재궁(齋宮)을 지어 면모를 새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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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8각 황궁우와 삼문(왼쪽) 전경. 삼문 뒤로 조선호텔이 보인다.
 



하지만 고종이 다시 세운 환구단(47p 사진 참고)은 1913년 일본에 의해 철거되고, 이듬해 그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규모가 축소됐다.

지금은 하늘 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8각 건물 ‘황궁우’와 돌로 만든 북 ‘석고’ 3개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 있다. 이들은 다시 말하자면, 환구단에 속한 부속물이다.

특히 ‘북’과 같이 생긴 석고(石鼓)는 1902년(광무 6)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세운 조형물이다.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돼 있다. 이 용무늬는 조선 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서 당시 최고의 조각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이기 때문일까. 남아 있는 황궁우, 삼문, 석고 등의 조각과 문양은 정교했다. 유수한 세월이 흘러 일부가 깨져버린 동물상, 어디에 사용됐는지 알 수 없는 건물 잔재들, 문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무늬를 조각하고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황궁우를 받치고 있는 계단을 포함해 삼문, 석고 등은 모두 화강암이 주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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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과 계단, 계단 중앙의 용 문양과 양쪽의 동물 석상이 위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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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 그 문 중 하나로 추정된다.
아치형으로, 문양과 벽돌 올림이 매우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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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된 환구단 건축물 재료로 추정되는 부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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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만든 북’인 석고 3개가 온전히 보존돼 있다.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했다. 몸통에 조각된 용 무늬는 조선 말기 걸작으로 평가된다.
 


신위병풍·환구축판 등 최초 공개



국립고궁박물관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된 환구단 유물 중에서 환구제에 사용한 ‘신위병풍’은 나무에 붉은 칠을 한 곡병(曲屛, 머릿병풍)이다.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만든 의례서인 ‘대한예전(大韓禮典)’ 속의 ‘신의(神扆)’ 도설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신위병풍에는 용·봉황·모란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각 모서리의 용머리 장식과 맞물린 부분을 보강하는 쇠붙이인 장석(裝錫)은 도금을 해 품격을 높인 것을 엿볼 수 있다.

‘환구축판(圜丘祝板)’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축판(祝板)은 환구제의 축문을 올려놓는 나무판이다. 붉은색으로 ‘구(丘)’ 자를 적어 넣은 제기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례를 행할 때 사용된 다양한 그릇과 도구다.

한편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에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촬영된 환구단의 사진과 현재의 사진을 비교해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헐리기 전 환구단의 참모습을 확인하고, 의궤에 실린 그림과 설명을 통해 환구단의 원형과 대한제국기 국가 의례였던 환구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