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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3대 신비

만어사 경석 기념물 제528호, 표충비각 유형문화재 제15호,

얼음골 결빙 천연기념물 제224호


글/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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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옥소리가 나는 만어사 경석

국도와 고속도로를 따라 가파른 언덕 깊은 산속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산길을 숨 가쁘게 오르다 보면 만어사가 자리하고 있다. 만어사는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 해발 670m 정상에 위치한다. 만어사에 들어서자 대웅전 마당에는 스님의 염불소리가 울려 퍼지고 희한하게 널려있는 돌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고려 명종 10년(1180) 보림이라는 고승이 창건한 만어사에는 수많은 바위들이 너덜겅을 이루고 있다. 이 바위들은 이곳에 살던 사악한 독룡들과 동해바다의 수많은 고기들이 부처님이 펼친 불법의 오계(五戒)를 받고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 바위들을 두드리면 경쇠 소리가 난다하여 신비함을 체험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바위들을 두드리며 종소리와 쇳소리, 옥소리가 나는 것 같냐며 서로 들어보라고 권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상대가 묻지 않아도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불러서 종소리가 맞느냐며 몇 번이고 되묻는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소리에 집중하는 동안 만어사 경석 사이에 숨어있던 작은 다람쥐들이 바위 틈에서 고개를 내밀고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종소리 나는 만어사의 경석은 만어사가 있는 계곡을 따라 수많은 바위들이 일제히 머리를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지각스님은 “일만 만(萬)자에 고기 어(魚)자를 사용하는 만어사에는 물고기 일만 마리가 돌이 되어 서 있다”며 저 멀리 햇살에 미세하게 반짝이는 낙동강을 가리켰다. “낙동강에 있던 일만 마리의 물고기가 바다에서 산으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등산복을 입은 한 남자는 만어사 경석을 두드리며 그와 함께 온 일행에게 이곳의 돌은 전부 일정하지 않고 다른 소리를 낸다며 일일 만어사 가이드를 자청했다.

만어산에 있는 만어사는 고대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갖가지 신비한 전설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부터 기우제단이 있어 신라왕의 공불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어산불영(漁山佛影) 조(條)에 이르기를 만어산은 옛날 자성산(慈成山)이라 하였는데, 인근 아라국에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살고 있는 독룡(毒龍)과 만어산에 살면서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녀(羅刹女) 다섯이 서로 왕래하면서 사귀었다. 이들이 만날 때마다 뇌우와 우박을 일으키고 4년 동안 비가 내리는 바람에 농민들은 땀을 흘려 지어 놓은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이에 가락국 수로 왕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여 불법(佛法)의 오계(五戒)를 받게 하니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 동해의 용과 수많은 물고기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가 부처님의 설법에 감응하여 모두 돌로 변하였다고 하며, 그 중에 용이 변한 바위에서는 부처의 영상이 비치고, 물고기들이 변한 바위에서는 종과 경쇠 소리가 난다. 또 동국여지승람 택리지에 따르면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목숨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의 신통한 스님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이 있는 곳이라 일러줬다. 왕자가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 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왕자가 머물러 쉰 곳이 바로 이곳 만어사라고 한다. 그 뒤에 왕자는 큰 미륵돌로 바뀌었고 수 많은 고기들은 크고 작은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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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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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비각과 사명대사 비석에 흐르는 땀
 



나라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 흘리는 표충비

만어사에서 불과 30분 거리에 자리한 표충비각. 표충비각으로 들어가는 오래된 한옥대문을 열자 앙상한 나뭇가지에 참새들만이 노래를 부르며 지저귀고 인적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표충비 앞에는 300년 된 밀양 무안리 향나무가 보인다. 진한 푸른색을 띠고 큰 우산을 펼쳐 세워놓은 것과 같은 모습을 간직한 나뭇가지의 펼침이 독특하다. 향나무는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가 사명대사의 표충비를 이곳에 세우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향나무는 300년이라는 세월동안 표충비각과 함께 했다. 향나무는 그동안 무엇을 봤을까? 또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표충비각 앞에는 1894년 갑오동란부터 2011년 11월까지 땀을 흘린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다만 그 이후에는 정치적, 종교적인 문제로 기록을 생략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무찌르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왜군에게 끌려간 3000명의 조선 포로를 귀환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운 사명당(四溟堂) 유정(1544~1610)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2년에 남붕선사에 의해 건립됐다.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는 380㎝, 비신의 높이는 275㎝, 너비 38㎝, 두께 56㎝에 이르는 장중한 비(碑)이다. 이 비석은 일반 비석과 달리 비석의 몸체를 검은색 대리석으로, 받침돌과 머릿돌을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옆면과 뒷면에는 표충사의 내력과 함께 사명당을 비롯하여 서산대사 휴정(1520~1604)과 기허대사 영규(~1592)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사명대사의 비문의 문장은 이의현이 짓고, 김진상이 글자를 썼으며, 맨 위 전서체의 머리 글씨는 유척기가 썼다. 서산대사에 대한 비문의 문장은 이우신이 짓고, 윤득화가 글자를 썼으며, 전서체의 글씨는 조명교가 썼다. 또 비석의 양면에는 표충사 사적비와 함께 비석설립에 관계된 사람들의 명단이 실려 있다. 표충사 사적비는 이덕수가 짓고, 서명균이 글자를 썼으며, 조명교가 맨 위의 전서를 썼다. 이 비석은 국가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알려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비를 신성시 하고 있다. 신비한 것은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다 하여 그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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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골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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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골 결빙지
 
 

얼음골 결빙지

가마솥을 걸어놓은 아궁이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기암절벽과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는 가마볼협곡 바로 옆에는 밀양의 3대 신비 중 하나인 얼음골이 있다. 구름다리를 지나 밀양 남면리 얼음골이라고 적힌 푯말을 지나면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다. 얼음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보니 온통 커다란 바위와 돌들이 반겨준다. 역시 얼음골이라서 그런지 금세 온몸이 싸늘했다. 밀양천황사 석불비로자나불좌상을 지나면 또 다시 수많은 돌밭이 계단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눈 앞에는 흰 눈꽃이 보인다. 최근 경남에는 눈이 오지 않았는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바위마다 온통 눈꽃이 피고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신비한 풍경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아보니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얼음골이 피부로 느껴진다. 바위 틈에는 김이 올라오고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신비하다. 신비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해발 1189m의 재약산(천황산) 북쪽 중턱 해발 600m 지점에 있는 얼음골, 수많은 바위들이 너덜겅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3월 초순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삼복더위가 시작되는 7월 중순까지 이어지다가 처서가 지나면 바위 틈새의 냉기가 점점 줄어들고 겨울철에는 오히려 더운 김이 나오는 신비로운 이상기온 지대이다. 밀양 얼음골은 대기 기온이 높을수록 바위 틈새의 냉기가 더욱 차가워진다. 30도를 오르내리는 삼복더위가 한창일 때에도 바위 틈새에서 나오는 냉기가 0~2도 정도이며 계곡을 흐르는 물도 4~8도를 유지하여 계곡 물에 손발을 담그고 있기 힘들 정도이다. 이런 이유로 이 계곡은 ‘밀양의 신비’라고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