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조선의 명검
 
칼 이야기
 
근심을 잊지 못한 서슬,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칼
 
글 혜문
 
01.jpg
 
 
02.jpg
곽재우 장군의 사당 충익사(경남 의령군 의령읍)에 있는 곽재우 장군 기마도
 
 
너무 뛰어나고 용감했기 때문에 고통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임진왜란을 이겨낸 구국의 영웅 이순신처럼. 선조는 자신이 외교적 수완을 발휘, 명나라로부터 원군을 파병하도록 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누란과 같은 조국의 위기에 대해 칼을 뽑아들고 일어선 의병(義兵)들은 제대로 된 평가는 고사하고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김덕령이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권율의 막하에서 곽재우와 함께 혁혁한 군공을 세웠던 그는 반란군 이몽학의 난과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역모와 내통에 관한 모든 의혹은 조작된 것이었고, 실제로는 그가 너무 뛰어나고 용감했기 때문이었다. 외적을 방어하는 데는 무능했지만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투쟁에 능했던 썩은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임진왜란이 끝나기도 전부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수들을 음흉하게 하나하나 제거해가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노량해 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의 전설이 되다

곽재우(郭再祐, 1552~1617)는 본래 경상도 명문가 후예였다. 그는 남명 조식의 외손사위였고, 의주 목사를 역임했던 부친이 중국 사신으로 가게 되어 1578년(선조 11)에는 중국 연경에도 다녀올 정도였다. 이때 중국에서 구해온 비단은 의병을 일으킬 때 만든 홍의(紅衣)의 옷감이 되었다. 그의 불행은 놀랍게도 과거에 합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곽재우는 32세 때인 1585년(선조 18) 별시에서 제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는데, 그가 써낸 답안이 문제가 되어 합격이 취소되고 만다. 당시의 시험 문제는 ‘당태종이 여러 위(衛)의 장졸들에게 전정(殿庭)에서 활쏘기를 가르쳤다’는 ‘당태종 교사 전정론(唐太宗敎射殿庭論)’이었는데, 임금이 문무를 겸전해야 한다고 적어낸 그의 답안이 ‘문약한 선조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어, 이른바 ‘시휘(時諱)’에 걸린 것이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사대부 최고의 꿈인 출사(出仕)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셈이다. 그 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의령 동쪽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근처 둔지(遯池)에 정자를 짓고 낚시질을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03.jpg
천연기념물 제493호 의령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 느티나무). 수령 520여 년 높이는 15m, 둘레는 7m이다.
 
 
천연기념물 제493호로 지정된 ‘의령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느티나무)’는 북을 매달아 놓고쳤다는 뜻이다. 임진왜란(1592) 때 곽재우 장군이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이 처음으로 일어난 곳이라 할 수 있고, 해마다 열리는 의병제전 행사를 위한 성화가 이곳에서 채화되고 있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40세,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열흘도 안 된 4월 22일에 고향인 의령현 세간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기의는 호남·호서의 의병보다는 한 달, 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부대보다는 50일 정도 빠른 최초의 의병이었다. 처음에 그의 부대는 노비 10여 명으로 출발했지만 양반들을 설득해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불어났고, 그의 의병은 2000명 정도로 유지되었다(1593년(선조 26) 1월 11일). 그러나 그의 의병활동도 순탄치 않았다. 일본군 때문이 아니라 조정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물자가 부족했던 그의 부대는 관군이 도망가 비어있던 초계성(草溪城)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해 사용했는데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 그들을 토적(土賊, 지방에서 일어난 도둑떼)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긴 곽재우 부대는 그 뒤 의령을 거점으로 현풍·영산(靈山. 지금 창녕)·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 우선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鼎巖津, 경남 의령 소재. 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의 나루)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육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조선군이 이긴 최초의 전투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뒤이어 10월에는 왜란 초반의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전투였던 제1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했다. 그들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교란해 승전에 기여했다.

곽재우는 일본군과의 전투에는 연이어 승전했지만 조정과 부패한 관리들과의 싸움에서 무너져갔다. 첫 사례는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粹)와의 갈등이었다. 1592년 6월 김수가 패전하자 곽재우는 그를 패장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도 곽재우가 역심을 품었다고 맞섰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선조는 “곽재우가 김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자신의 병력을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1592년 8월 7일)”라고 물었고, 나아가 “이 사람이 함부로 감사를 죽이려고 하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연려실기술」 권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곽재우는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다른 장수들과 마찰을 빚었다. 곽재우는 “백전백승의 군졸들을 어찌 차마 죽을 곳으로 데려가겠소. 고립된 성은 지킬 수 없소”라며 출전을 거부했다. 군사에게 피해를 주는, 지는 싸움은 할 수 없다는 병법의 원칙을 지킨 고육책이었다. 진주성 전투는 결국 조선군의 대패로 끝난 것으로 모두 곽재우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은 곽재우의 자세는 상당한 반발을 가져왔다.
 
 
 
04.jpg
곽재우 환도.(길이 86㎝, 너비 3㎝, 자루길이 16㎝)
 
04.jpg
 
05.jpg
망우정 현판 곽재우 장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선조를 비롯한 권력층들은 곽재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활약에 대해 조정은 물론이고 백성 중에도 아는 이가 많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36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김세겸(金世濂)은 “<일본국사(日本國史)>에 임진년에 그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해 온 사실을 상세히 기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여러 장수 중 오직 선생의 성명만이 기재돼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풀리지 않은 관직의 길, 세상을 잊고 은거

곽재우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았지만 선조와 정부로부터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41세 때 의병의 공로로 유곡 찰방에 임명된 이래 1616년까지 24년간 29회의 다양한 관직에 제수됐다. 그중 15회는 출사했고, 14회는 관직 자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출사했던 15회도 실제로는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사직하거나, 부임했다가 바로 사직하곤 했다.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년의 곽재우는 은자(隱者)의 삶을 살았다. 1602년(선조 35)에 현풍으로 돌아온 뒤 익힌 밥을 멀리하고 솔잎만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산 창암(滄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공신도감에서는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참으로 그의 공로”라면서 공신 책봉을 건의했지만, 선조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장수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가 왜적을 막은 것은 양(羊)을 몰아 호랑이와 싸운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이 수전에서 세운 공로가 으뜸이고, 그밖에는 권율의 행주전투와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기대에 부응했으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했다. 그 중에 잘했다는 사람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1603년 2월 12일).” 결국 곽재우는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그 뒤 1605년(선조 38) 2월에 그는 동지중추부사·한성부 우윤(종2품)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두 달 만에 병으로 사직한 뒤 줄곧 망우정에서 지냈다. 1607년 1월에는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방문해 함께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노년에 접어든 56세 때의 일이었다. 해평(海平)부원군으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당시의 주요한 대신인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그가 곡기를 끊은 까닭을 이렇게 짚었다. “곽재우가 솔잎만 먹는 까닭을 도술을 닦으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김덕령이 뛰어난 용력으로도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죽자 자신도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이것을 핑계로 세상을 도피하려는 것이라고 한다(1608년 8월 13일).”
 
세상의 불의를 베고자 했던 곽재우의 칼

곽재우는 세상을 개혁할 의지를 갖지 못한 임금에게 “전하는 신의 말을 쓰지 않으면서 신의 몸만 이용하려 한다(殿下不用臣言 而欲用臣身者). 이는 신을 관직으로 묶어 다른 여러 신하처럼 부리기만 하려는 것이다. 전하는 여러 신하를 개와 말처럼 여긴다(殿下視群臣如犬馬). 그런데도 신까지 그 가운데로 몰아넣으려고 하고 있다”고 질타했고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시옵소서(伏願殿下勿復召臣焉)”라고 선언했다.
전란을 겪고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투쟁과 당쟁만을 일삼는 조정에 대한 기개 넘친 일갈이었다.
 
 
06.jpg
보물 제671호 곽재우 유물 일괄(郭再祐 遺物 一括).
장검(長劍, 길이 86㎝, 너비 3㎝, 자루길이 16㎝), 마구(馬具) 1점, 포도연(葡萄硯, 가로 21㎝, 세로 3.5㎝), 사자철인(獅子鐵印, 높이 3
㎝, 지름 3.5㎝), 화초문백자팔각대접(花草紋白磁八角大碟, 높이 6.5㎝, 입지름 21.5㎝, 밑거름 12.5㎝), 갓끈(4종, 길이 75㎝, 25㎝,
165㎝, 168㎝). 보물 제671호.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충익사(忠翼祠) 소장.
곽재우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그가 사용했다고 전하는 장검과 마구 그리고 평소에 쓰던 벼루·연적·철인·갓끈 등의 일괄품이다.
 
 
 
07.jpg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충익공망우곽재우유허비 (忠翼公忘憂堂郭再祐遺墟碑)
망우정 뒷편에 서 있는 비는 의병을 일으켰던 공의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고을의 유림들이 세워놓은 것으로, 받침돌 위로 비몸
을 세운 간결한 구조에 비 윗변의 양끝을 비스듬히 다듬은 모습이다.
 
07.jpg
 
 
망우당집에 실린 ‘임금이 부르는 명령이 있었음(有召命, 유소명)’이란 시(詩)에는 현실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현실을 잊지도 못하는 곽재우의 비분강개가 그려져 있다.

“몸을 편안히 하려니 군신(君臣)의 의(義)를 저버릴까 두렵고, 세상을 구하려니 날개가 난 신선이 되기 어렵네(安身恐負君臣義 濟世難爲羽化仙).”

망우당에 은거하면서도 끝끝내 세상에 대한 근심을 버리지 못한 곽재우의 근심은 언제쯤 가실 수 있을까? 세월이 흘러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우리 현실에 마음이 무겁다. 우연한 기회에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되었던 홍의장군 곽재우의 환도 진품을 보았을 때, 아직 가시지 않은 서슬에 뭔가 마음이 울컥했다. 나 역시 출가한 승려의 신분으로 세상에 대한 근심을 다 끊어내지 못함이었을까? 아니면 임진왜란이 지난 지 400년이 지났어도 선조 당시의 무능과 부패를 가셔내지 못했기 때문일까? 난세가 되면 영웅이 나온다고 하는데, 세상의 불의를 베어버릴 시퍼런 저 칼을 다시 쓸 만한 곽재우같은 인물이 언제 다시 이 땅에 출현할 수 있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05.jpg
혜문스님 |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How are you? 이순신> <우리 궁궐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