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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지에 수록된 조선세법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예도
 
 
 
 
중국 명나라의 무장들은 왜구의 침략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일본의 검술에 대항할 방법을 고심했다. 일본인들은 검술에 능해서 명나라 군대와 백병전이 벌어지면 명나라 군대에 궤멸적인 손상을 입히곤 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거쳐 모원의(茅元儀, 1594~1640)의 <무비지(武備誌)>의 편찬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모원의 <무비지>에는 당시의 중국에서 사라져버렸던 아주 오래되고 훌륭한 고대의 검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엔 검을 전투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당(唐) 태종은 검사천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법은 곧 전해지지 않았다. 남아있는 고서에 비결의 노래가 있지만 자세하지 않았다. 최근 그것을 지인을 통해서 조선에서 얻었고, 그 세법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었다. 거기서 중국에서 사라져 사방으로 찾았으니 일본의 <서경(尚書)>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茅子曰, 古之劍, 可施{於戰鬪, 故唐太宗有劍士千人, 今技法不傳. 斷簡殘編中, 有訣歌, 不詳其說. 近有好事者, 得之朝鮮, 其勢法俱備. 固知“中國失而求之四裔”, 獨西方之等韻, 日本之尙書也, 備載於左”
 
모원의는 중국의 검법들이 겉으로 화려하기만 할뿐 실전에 사용할 수 없는 검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검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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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출토된 비파형 동검과 간돌검 (부여 송국리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다가 지인을 통해 조선에서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고대의 검법을 얻게 되어 수록한 것이었다. 이 검법에 대해 모원의는 “당나라 때 사용되었던 검법”이 조선으로 건너가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검법의 이름을 “당나라 검법”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세법”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조선세법이 사실은 중국의 검법이 아닌 조선에서 전래되어왔던 검법임을 시인한 것임에 다름 아니지 않았을까?

조선세법은 정조 연간에 출간된 무예도보통지에 예도란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무비지의 조선세법 24세에 4개의 초식이 더해져 총 28개의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범례에는 예도(銳刀)에 대해 모원의의 조선세법과 조선에 전해져오는 검법을 취합해서 총보를 만들었다고 기록해놓았다.

“이미 모씨(茅氏)의 세법(勢法)으로 도보를 만들었는데 지금 연습하는 도보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금보(今譜)로 따로 총보(總譜)를 만들었다. 또 별도로 모(茅, 모원의)의 설해(說解)를 만들어서 이미 익힌 자로 하여금 배운 것을 폐하지 않게 하고, 익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근본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무예도보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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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형동검 혹은 한국형 동검과 쇠검(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모원의가 어렵게 중국에서 구한 조선세법은 조선에서 예도란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영조 연간의 <승정원일기>에는 고후점이란 무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도(銳刀)는 즉 고만흥(高萬興)의 아버지 후점(後漸)이 어느 곳에서 배웠는지 모르나, 그 기술이 매우 기이한 까닭에 다른 사람을 교육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예도는) 80여 인이 행하고 있습니다.(영조 10년(1734) 10월 8일. <승정원일기>)”

이처럼 조선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실전 검법(조선세법)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선후기까지도 전승되던 이 검법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고증과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간돌검(石劍)을 보고 생각에 잠겼던 적이 있다. 간돌검은 다른 나라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만주와 한국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의 칼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은 고조선의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고인돌에 부장되어 출토되는 간돌검을 보고 한반도의 역사에는 청동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대량의 고조선 청동검이 출토되면서 이 학설은 부정되었던 일이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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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두대도 천마총 출토
 
 
간돌검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칼 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시기 간돌검 한 자루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었던 것일까? 간돌검이 고인돌에서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의 지배자들이 사용한 칼이란 의미일 것이고, 이 칼은 아마 의식용 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갈아서 만든 칼이 지닌 뜻은 현대의 우리가 이해 못하는 엄청난 수련과 정제의 시간을 나타내는 상징일 것이다.

이 칼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세상을 바로잡는 지도자의 도구였을 것이다. 간돌검은 한 번 더 발달해서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검과 한국식 청동검으로 발전하고, 청동검은 철기시대로 전환되면서 환두대도로 또 한 번 진전한다.
 
세계역사상 자신만의 도검형태를 만들어내고 발달시킨 민족은 극히 드물다. 간돌검에서 청동검 환두대도까지의 발달과정을 보면 조선이란 나라는 ‘독특한 칼’의 문화를 가졌던 ‘칼의 나라’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는 셈이다.

무비지에 수록된 ‘조선세법’은 아마도 고조선의 검법이란 뜻이었을 것이고, 우리 민족의 무사들이 배우고 익혔던 검법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인돌에서 부장품으로 출토되던 간돌검과 비파형 동검은 혹시 우리 선조들이 조선 세법을 연마하던 바로 그 칼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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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문스님 |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How are you? 이순신> <우리 궁궐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