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국보급 고려시대 옥책
<부모은중경> 발견
 
글 박선혜 사진제공 소장자
 
 
02_411.jpg
 
 
 
03_180.jpg
 
크고 깊은 한량없는 부모 은혜 일깨워

<부모은중경>은 석가가 제자 아난에게 부모의 은혜를 설법한 불교경전이다. 천수백년 동양의 정신을 지배해온 불멸의 저술이며 불가의 성전(聖典)이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은 채 수미산(须彌山)을 백 천 번 돌더라도 다 갚을 수 없다는 글이 나온다. 아! 부모의 은혜에 대해 이처럼 뭉클하고 설득력 있는 명문장이 있을까.
 

게송(偈頌)-선시(禪詩) 하나를 들어 보자.
 

‘죽어서 이별이야 말할 것도 없고 / 살아서 생이별 또한 고통스러운 것 / 자식이 집 떠나 멀리 나가면 / 어머니의 마음 또한 타향이 집이라네 / 낮이나 밤이나 자식 뒤쫓는 마음 / 흐르는 눈물은 천 갈래인가 만 갈래인가 / 새끼를 사랑하는 어미원숭이 울음처럼 / 자식생각에 애간장이 녹아 나네….’

이 경전이 중국에서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는 천수백년 전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그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많이 보급됐으며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 와서도 왕실의 존중을 받았다.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사회에서 이 경전이 널리 유포된 것은 ‘효가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고 생각한 유교의 근본이념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 경을 읽으면서 부친 사도세자를 생각하고 통곡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경을 널리 읽히기 위해 화가 김홍도를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언해본을 간행토록 했다. 또 명을 내려 경기도 화산(華山)에 있는 용주사에 ‘부모은 중경’ 비를 세우도록 했다.

-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천지일보 ‘특별기고’ 서문 발췌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아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 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아 ”

-어머님 은혜 노래 中
 
 
 
 
 
 
 
 
04_186.jpg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뉴스가 아무렇지 않게 여겨져 버린,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외면하는 이 시대에 던지는 중요한 ‘경(經)’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고려 초기 광종 때 제작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옥책(玉冊)이 지난해 11월 천지일보 취재팀을 통해 민간인 소장자의 집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이 옥책이 희귀 유물이며,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입을 모았다.

<부모은중경>은 불교 경전의 하나다.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과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불교국가였던 고려보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많이 간행됐다. 고려말에 간행된 <부모은중경>은 몇 점뿐이어서 이번에 발견된 옥책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뜨겁다. 현존하는 옥책은 고려 말 조선시대 왕의 즉위나 책봉을 기념하는 장엄구로 남아 있고, 불경으로는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학계에 정식 보고된 것은 지난 2012년에 고려대 정광 교수에 의해 알려진 <월인석보(月印釋譜)>가 유일하다.

이번에 발견된 <부모은중경> 옥책 말미에는 ‘홍원사 준풍 3년 종(弘圓寺 峻豊三年 終, 고려광종 13년 962AD)’이라는 간기가 있다. 이는 ‘불일사 정통 십이년종(세종 29년 1447AD)’이라고 나오는 <월인석보>와 형식이 같음을 보여준다.
 
또 홀 모양의 옥을 다듬어 2개의 투공과 3개의 원문을 음각해 글자를 배치한 것도 월인석보와 비슷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부모은중경 옥책은 고려 초기에서 조선 초기 옥책의 형태와 계보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학계의 뜨거운 관심 “월인석보 이전 시대 것”

이번에 발견된 옥책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민간에 소장돼 있다가 천지일보 취재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소장자가 증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유물이다.

소장자는 “증조부께서 불심이 깊었던 분이었는데, 수집을 종종하셨다고 들었다. 어머니를 통해 전해 받을 당시 옥책 꾸러미는 가죽 가방 안에 있었다. 한지에 말아 있는 상태로 번호가 맞춰져 있었는데, 살펴보니 2번은 결실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옥책을 감싸고 있던 한지와 삼베 등 낡은 것을 정리하고 자칫 깨지기 쉬워 조심히 따로 보관해 놓았다.

옥책 발견 당시 천지일보(2014. 12. 1) 단독 기사에서 정광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고려 초기 옥책 <부모은중경>을 확인한 결과 서체, 금니 등 제작수법, 자획의 뭉쳐진 녹소들을 비롯한 불경의 품격이 세종대 만들어진 옥책 월인석보와 같은 형태를 보인다. 옥책의 계보를 알려주는 계기가 된 값진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은 글씨가 보인다. 앞으로 고려 초기의 요(遼)시대 자전(字典)인 용감수경(龍龕手鏡)에서의 확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우방 전 경주박물관장(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는 옥책 자료로, 진품으로 보인다. 왕실에서 사용한 유물 같다”고 말했다. 이어 “매우 희귀해 문화재급으로 평가되며, 서지학 분야의 연구가 뒷받침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부모은중경> 옥책이 간행된 홍원사는 고려 왕도 개경에 있던 원찰로, 고려사에 수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유물의 발견으로 고려사 기록(제13대 선종 1049~1094년)보다 100여 년 앞서 창사(創寺, 절이 세워짐)됐음을 알려준다.

중국 도자기 분야 전문가인 김희일 홍산문화도자박물 관장은 “중국 박물관을 통해 오랫동안 옥책을 찾아봐도 이번에 발견된 월인석보나 부모은중경 같은 형태의 옥책은 찾지 못했다”며 “부모은중경은 매우 귀중한 유물로 보이며, 무엇보다도 월인석보 옥책의 앞선 시대 계보를 찾았다는 데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지났어도 옥에 새긴 ‘금니’ 흔적 완연해 <부모은중경>은 왕도 개경에서 가까운 황해도 해주에서 나오는 수암옥을 홀(笏)처럼 다듬어 1㎝정도 크기의 글씨로 수천 자가 되는 부모은중경 전문을 새긴 것이다.
 
확대경으로 볼 경우 글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금니(金泥) 흔적이 완연하다. 붉은 녹이 슬어있는 글씨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글씨는 신라~고려 초에 유행했던 구성궁체와 닮았다. 이는 신라 후기 최치원이 짓고 직접 쓴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신라진성여왕 원년 887AD),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 비문(고려 광종 19년 965AD)의 글씨와 비슷하다.

<부모은중경> 옥책은 옥을 장방형 홀 모양으로 다듬어 상·하단에 2개의 투공과 3개씩의 원문을 배치했다.
 
여기에 각 면마다 해서체와 행서체를 혼용해 세로로 4행씩 음각했다. 뒷면에는 3단으로 구름무늬를 음각하는 등 모두 27매(2번 결실)로 수천 자에 달하는 부모은 중경 전문을 각자하는 방대함을 보여준다. 중국산이 아닌 고려시대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수암옥을 이용해 음각한 것도 가치가 있다.
 
 
05.jpg
부모은중경 금니 확대
 
 
06_700.jpg
 
 
옥책의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 부모은중경과 차이를 보인다. 고려 말 목판본인 보물 제705호 부모은중경(고려 우왕 4년 1378AD, 리움미술관 소장)과 조선 전기에 간행된 보물 제902호 부모은중경(아단재단 소장), 보물 제1125호 부모은중경(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충북도유형 문화재 제224호 불설대보부모은중경(조선 태종 1407AD)에 간행된 내용과 차이가 있으며, 조선시대 불경에 나오지 않는 ‘구(俱)’ ‘이(爾)’ ‘개(个)’ 글자가 있다.
 
 
 
07_600.jpg
 
 
 
함께 발견된 불경 옥책 <예불대참회문>
 
부모은중경 옥책과 함께 금문(金文)으로 쓴 <예불대참회문(禮佛大懺悔文, 크기 4.5×25㎝)> 옥책 25매도 함께 발견됐다. 학계는 예불대참회문에 대해 ‘전서(篆書) 이전에 유행했던 금문’으로 평가하고 있다.

박영진 교수는 “예불대참회문에 나오는 글씨도 품격이 있다. 전서 이전의 금문으로 불경에 금문을 사용한 유례없는 유물로 고려시대 불경 연구의 희귀자료”라고 극찬했다.
 
예불대참회문에는 ‘가희(남송 이종) 3년(고려 고종 26년 1239AD)’이라는 명기가 보이며, 부모은중경보다는 크기가 약간 작다. 뒷면에는 한 마리의 용으로 추정되는 무늬가 있다.

예불대참회문은 예부터 불가에서 보현보살의 행원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해 방대한 화엄경에서 따로 분리시켜 이 한품을 별도 책으로 간행, 유포시킨 책이다.

선종에서는 이 불경을 저녁마다 외우면서 108배의 절을 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조선시대에 와서 한문본으로 널리 유통됐으며, 언해본도 자주 간행됐다. 대표적인 언해본으로는1630년(인조 8)의 간행처 미상의 1권 본과, 1760년(영조 36)에 은진(恩津) 쌍계사(雙磎寺)에서 간행한 2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1630년 본에는 혜원(慧苑)의 발(跋)이 있고, 1760년 본은 조관(慥冠)·상언(尙彦)·해원(海源)·유일(有一) 등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