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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소재 어진박물관
왕의 초상화, 조선왕실의 위엄을 그리다
 
글/사진 신정미 사진제공 어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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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고 한다. 어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실제 인물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태조어진(太祖御眞)은 한양과 외부 주요도시에도 봉안됐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세종실록>에 보면 “진전(眞殿)을 두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태조를 경모하여 오래도록 잊지 않게 함”이며 “고려가 태조 진전을 평양과 서북면에 두니 배반한 사람들도 태조를 사모하기가 부모와 같이 하고 태조의 진영(眞影)을 받들고 섬으로 피해 들어갔다가 마침내 능히 수복했으니, 지금도 백성들로 하여금 경모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다행치 않으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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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실Ⅰ
 
 
조선 왕실의 본향이자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

태조 이성계가 세운 나라 조선(1392~1910)의 뿌리 전주. 이곳이 왕실의 본향이 된 것은 통일신라 문성왕(재위 839~857) 때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이 살면서부터이다.
 
전주(全州)의 옛 지명 완산은 완산칠봉(完山七峰)에서 유래한 것으로 경덕왕 16년(757)에 한자식으로 바뀌면서 전주로 개명됐다. 전주는 통일신라 신문왕 때 전북권역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후삼국시대 36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후백제의 왕도였다. 고려시대는 전주목이었다. 고려 전기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전주목(全州牧)의 ‘전(全)’자와 나주목(羅州牧)의 ‘나’(羅)자를 합쳐 전라도(全羅道)라 했다. 조선 개국으로 임금의 본관인 어향(御鄕)이 된 전주는 완산유수부로 그 지위가 격상됐다. 조선 초기부터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는 오늘날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제주도까지 포괄했던 전라도의 중심지였고, 호남제일성으로 전라도의 으뜸도시였다.
 
조선시대 왕들은 자신의 뿌리가 된 전주를 역사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전주는 왕과 왕실 자손의 태를 묻는 길지로 택해졌고, 국가의 중요한 기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세웠다.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 시조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 시조의 묘역인 조경단을 정비하고 대대로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할 때도,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고자 할 때도 전주는 그 어느 곳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 됐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 역시 왕실본향으로서 전주의 위상을 인식하고 이를 지키고자 했다. 태조어진을 전주에 모시기를 요청한 것도, 전란에서 어진과 실록을 온전히 지켜낸 것도, 왕실 유적을 정비할 때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도 이 지역사람들이었다. 조선시대 전주는 왕실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지켰던 역사적 공간이었다.
 
 
태조어진과 관련 유물의 영구 보존 위해 건립

어진박물관은 시립박물관으로서 ‘태조어진 전주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기념해 2010년 11월 경기전 경내에 개관했다. 개관한 이래 전주시는 수행단체를 공모해서 운영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3년을 맡아 운영했고, 현재는 전주문화사랑회에서 수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태조어진과 어진봉안 관련 유물을 안전하게 영구 보존하기 위해 건립된 국내 유일의 어진 전문박물관이다. 태조 어진이 유일본이듯 신연, 향정자를 비롯해 어진 봉안과 관련한 의식구들도 현존하는 유일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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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실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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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선 
 
 
또한 어진을 봉안하고 보존한 역사를 담아 경기전의 가치를 소개하는 데도 목적을 두고 있다. 어진박물관은 현재 경기전 관련 문화유산을 현장에서 동시에 보고 접할 수 있는 체험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역사회의 평생학습센터이자 역사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건물은 경기전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지상 1층, 지하 1층 총 1193.71㎡ 규모로, 전시실은 어진실Ⅰ·Ⅱ를 비롯해 역사실, 가마실, 기획전시실 총 5개관으로 구성돼 있다. 한옥으로 된 지상 1층의 어진실Ⅰ은 태조어진을 전시하는 공간이고, 나머지 전시실은 특이하게도 모두 지하에 배치돼 있다.

어진실Ⅰ에는 현존하는 국내 유일본 태조어진과 그에 관련된 일월오봉도, 용선과 봉선, 홍개 등의 의식구를 전시하고 있다. 원래 다른 왕들의 어진도 어진실Ⅰ에 같이 있었는데 태조 어진이 국보로 승격되면서 2012년에 리노베이션을 해서 현재 어진실Ⅰ,Ⅱ로 나눠 따로 모시고 있다. 어진실Ⅱ는 새로 모사한 세종과 정조, 영조와 철종, 고종과 순종 어진까지 6분의 어진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정신세계까지 담아내야 하는 역대 왕들의 어진제작
 
조선시대 어진은 국왕 생존시에 그린 도사, 왕이 돌아가신 후에 그리는 추사, 기존의 어진을 본떠 그리는 모사 등 3종류로 나눠 제작했다. 제작과정은 먼저 이를 담당할 도감을 설치하고 화원을 선발한다. 화원이 정해지면 밑그림을 그리고 배채법으로 채색을 한다. 다 그려지면 장황(표구)을 하고 표제(누구의 어진)를 쓴 후 진전에 봉안한다. 매 단계마다 왕과 대신들의 심사과정을 거치고 길일길시를 택해 진행했다. 털끝 하나라도 똑같지 않으면 초상화가 아니라고 했고, 초상화에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내야 한다고 했다. 어진을 비롯해 한국초상화 제작기법에서 독특한 것은 화면 뒷면에서 안료를 칠하는 배채법이다. 뒷면에 칠해진 안료가 얇은 비단 화면을 통해 색채를 드러내는 만큼 은은하고 깊은 색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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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실
 
 
조선시대 왕들은 거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조선초에는 생전에 그리지 못한 경우 다음 왕대에 그렸다. 태종은 생시에 어진이 제작됐지만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 자신의 어진을 없애라고 했다. 그러나 아들 세종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보존해 두었다. 인종은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결국 제작되지 못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쫓겨난 왕으로 어진제작 여부를 알 수 없다. 또 조선중기의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 제작에 대한 기록이 없다. 숙종 이후부터는 어진제작이 활발해져 여러 본을 동시에 제작하기도 했다. 영조는 매 10년마다 어진을 그리려고 했으며 정조 역시 3번이나 다양한 복장으로 어진을 제작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진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 차례 전란으로 소실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도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 창고에 불이나 상당수가 불에 타고 말았다.
 

표준영정 세종·정조 어진, 현존하는 태조, 영조, 철종 어진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왕의 초상화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 어진뿐이다. 세종과 정조 어진은 남아있지 않아서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습과 그 후손들의 골격을 토대로 후대에 그린 표준영정(국가공인영정)이다.
 
한글을 창제한 조선 최고의 성인군주인 세종은 유교정치의 기틀 확립과 각종 제도 정비 및 문화와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현재 세종어진은 실제 용안을 알 수 없어 김기창 화백이 추정해 그린 것으로 1973년 국가표준영정으로 공인됐다. 이곳 어진실Ⅱ의 세종어진은 표준영정을 김영철 화백이 모사한 것이다.

정조는 사도세자 아들로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한 군주이다.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탕평정치를 전개해 붕당의 폐단을 해소했다. 왕권을 강화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큰 포부를 갖고 화성을 축조해 천도를 시도하기도 했다. 현재 정조어진도 실제 용안을 알 수 없어 이길범 화백이 추정해 그린 것으로 1989년 국가표준영정으로 공인됐다. 여기 어진실Ⅱ의 정조어진은 표준영정을 영인(影印)한 것이다.

영조는 31세에 왕위에 올라 83세까지 살았던 최장수 왕으로(왕위 재위기간 52년) 탕평책 전개, 균역법 시행, 청계천 준설등 조선후기 부흥을 이끈 군주이다. 외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경기전 북쪽의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에 창건한 것이다. 현존하는 영조어진(보물 932호)은 1900년에 조석진·채용신 등이 모사한 반신상이다. 영조 51세(1744년)때 사대부 화가 조영석 등이 그린 어진을 모사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여기 어진실Ⅱ의 영조어진은 반신상 진본을 김영철 화백이 전신상으로 모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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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시실에 전시된 조선왕조실록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돼 왕위에 올랐다.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했다. 철종어진은 철종 12년(1861) 이한철·조중묵 등이 그린 것이다. 융복(군복) 차림이며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보기드문 손의 형태를 볼 수 있고 용모에 순수한 인품이 반영돼 있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시켰다가 1954년 부산 보관 창고에 불이나 오른쪽 화폭의 1/3쯤 소실돼 국립고궁박물관(보물 1492호)에 소장하고 있다. 여기 어진실Ⅱ의 철종어진은 복원된 어진을 영인한 것이다.
 

태조어진을 그린 권오창 화백의 모사본 고종황제·순종황제 어진

신정왕후(조대비)는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고 그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했다. 그가 고종황제이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했다.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문제가 돼 폐위됐다. 1919년 승하했으며 고종 독살설은 3·1운동의 계기가 됐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므로 이전의 조선왕들과 달리 황제복인 황룡포 차림이다.

순종황제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 황제로 즉위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일제에 의해 ‘이왕(李王)’으로 강등되는 등 수모를 겪다가 1926년 승하했다. 순종 장례날인 6월 10일을 기해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면류관을 쓰고 십이장복을 입은 대례복 차림. 장복(곤복)은 의례를 행할 때 착용하는 것으로 황제는 십이장복, 왕은 구장복이다 십이장복이란 명칭은 옷에 들어가는 문양의 수가 12가지라는 뜻이다. 여기 어진실Ⅱ의 고종황제 어진과 순종황제 어진은 2001년 권오창 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어진이다.

<조선왕조실록> 복본 400년 만의 재탄생

기획전시실에서는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4차 복본화사업 완료를 기념하는 특별전시회가 2월 26일부터 지난달 11일까지 ‘조선왕조 500년 천년한지에 담다’라는 제목으로 전시됐다. 구성은 선조·광해·인조 실록 복본을 중심으로 전시됐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같은 시대, 다른 역사)이 편찬된 배경, 전 실록을 통틀어 유일하게 전해지는 중·초본 광해군 일기, 인조반정과 인조 실록의 역사적 배경 등을 관람객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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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실
 
 
전주시와 문화체육관광부는 2007년부터 <조선왕조실록>복본화 사업에 착수해 2012년 전주사고본 실록(태조~명종) 614책을 복본 완료했다. 2013년부터는 태백산사고본을 토대로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3대 실록 복본화사업을 진행했다.

실록복본화 사업은 한지를 전통기법으로 떠서 첨단 인쇄기술(프린트기법)을 이용해 조선시대의 실록과 같은 형태로 재간행하는 것이다. 실록복본화는 우리 민족의 뛰어난 기록문화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고 문화유산 복원지로서 우리 종이 한지의 수요를 창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실록 복본은 현재 우리의 뛰어난 기록문화전통을 알리는 국내외 전시회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또한 한지의 전통 제작기법을 이어가고 질 좋은 한지를 생산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 17만 2천여 일의 역사를 기록한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역사서이다. 태조실록을 비롯해 각 왕대별 실록을 통칭하여 일컫는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에 의해 편찬돼 조선왕조실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실록은 왕이 죽고 난 후 간행된다. 또한
공정성이 빼어나 국왕도 선대의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으며 신하들이 국왕을 견제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1973년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그 내용이 방대하고 상세해서 태백산본 실록의 경우 분량이 848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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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모사도감의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