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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가 귀여운 것은 사실 생존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엄마의 젖을 찾아 물 수도 없고, 젖은 기저귀를 새것으로 바꿀 수도 없기에 최대한 귀여워야 엄마가 그 고단함을 이겨내면서 자신을 돌봐 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송아지나 망아지는 어미의 태(胎)에서 떨어지고 얼마 안 있어서 제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젖을 찾아 빤다. 그 성장 속도도 빠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래봤자 짐승은 짐승의 일을 할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꼼짝 없이 누워만 있던 아이가 어느 순간 뒤집기를 하고, 기어 다니다가 두 발로 선다. 발에 힘이 붙으면서 걷게 되고 어느덧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개구쟁이가 된다. 이때부터는 못하는 말이 없고 못하는 동작이 없다. 어느덧 지력도 발달하여 글자를 익히게 되고 머리도 몸도 성숙한 독립체가 되어간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울음보를 지닌 갓난아기에서 시작된 인간의 성장을 생각하다보니 이제는 울음(눈물)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 바탕에는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있다. 여기 눈물에 주목한 시인이 있다. 바로 민족시인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이다.
 
홍사용은 1900년 5월 17일(음력)에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용수리에서 출생했고, 본적지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492번지인데 이곳은 남양 홍씨들이 모여 사는 씨족 마을이었다고 한다. 사실 노작은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 아니라 용인과 화성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의 외아들이었다. 그는 생후 백일 만에 대한제국통정대부 육군헌병 부위였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 재동(齋洞)으로 이사했으나, 1907년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돌모루로 돌아온다. 이후 부친을 여의고 1916년에 홀로 상경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하여 1919년 3·1운동 때 시위학생의 선두에 섰다가 체포되었으나, 풀려나 그해 6월에 다시 낙향한다.
 
노작의 이력을 잠시 살펴보더라도 그가 항일정신이 투철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물려받은 재물을 바탕으로 해서 순수 문예동인지인 〈백조(白潮)〉가 태어나고 이어지는데 막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백조(白潮)〉는 1922년 1월부터 1923년 9월까지 총 3호가 나왔다. 홍사용, 나도향, 박종화, 이상화, 현진건 등이 동인이었는데 당시 가장 활발한 시 창작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작은 먼저 창간호에 권두시(卷頭詩)인 ‘白潮는 흐르는데 별하나 나하나’를 비롯하여 ‘꿈이면은?’, ‘통발’, ‘푸른 강물에 물놀이 치는 것은’, ‘漁父의 跡’ 등을 발표했다. 이것이 노작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2호(1922년 5월)에 시 ‘봄은 가더이다’ 등을 발표했고, 3호에는 시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 ‘墓場-커다란 무덤을 껴안고’와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만’,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백조(白潮)>의 탄생과 운영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노작이었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시집 한 권을 내지 않아서 사후에야 유고시집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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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문학사적으로 어떠했던가? 근대시가 출발했다는 1910년대를 지나 기미년에 있었던 3·1운동이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끝나자 감상적 낭만주의가 일어나게 된다. <백조(白潮)> 동인을 중심으로 한 192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 낭만주의에 대해 ‘프랑스 상징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
도 프랑스 상징파의 시나 시론의 깊이에 이르지 못하고 주관과 감성을 기조로 한 환몽(幻夢)과 비애의 눈물과 감상성을 띠게 되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홍사용은 맹목적인 서구화를 따르지 않고 전통적인 맥락에서 시를 창작하고, 시를 통해 민족적인 이념을 실천하였다. 전자는 민요 조시인 ‘봄은 가더이다’를 통해, 후자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봄은 가더이다……
“거져 믿어라……”
봄이나 꽃이나 눈물이나 슬픔이나
온갖 세상(世上)을, 거저나 믿을까?
에라 믿어라, 더구나 믿을 수 없다는
젊은이들의 풋사랑을……

봄은 오더니만, 그리고 또 가더이다
꽃은 피더니만, 그리고또 지더이다

님아 님아 울지 말어라
봄은 가고 꽃도 지는데
여기에 시들은 이내 몸을
왜 꼬드겨 울리려 하느냐
님은 웃더니만, 그리고 또 울더이다

울기는 울어도 남따라 운다는
그 설움인 줄은, 알지 말아라
그래도 또, 웃지도 못하는 내 간장(肝臟)이로다
그러나 어리다, 연정아(軟情兒)의 속이여
꽃이 날 위해 피었으랴? 그렇지 않으면
꽃이 날 위해 진다더냐? 그렇지 않으면
핀다고 좋아서, 날뛸 인 누구며
진다고 서러워, 못살 인 누군고

“시절이 좋다” 떠들어대는
봄 나들이 소리도, 을씨년스럽다.
 
산(山)에 가자 물에 가자
그리고 또 어데로……
“봄에 놀아난 호드기 소리를
마디마디 꺾지를 마소.
잡아 뜯어라, 시원치 않은 꽃가지"
들 바구니 나물꾼 소리도
눈물은 그것도 눈물이더라

바람이 소리없이 지나갈 때는
우리도 자취없이 만날 때였다
청(請)치도 않는, 너털웃음을
누구는 일부러 웃더라마는
내가 어리석어 말도 못할 제
훨훨 벗어버리는, 분홍(粉紅) 치마는
“봄바람이 몹시 분다” 핑계이더라.

이게 사람인가 꿈인가
꿈이 아니면 사랑이리라.
사랑도 꿈도 아니면, 아지랑이인가요.
허물어진 돌무더기에, 아지랑이인게지요.
그것도 아니라, 내가 속앗음이로다.
동무야, 비웃지 마라.
아차, 꺾어서 시들었다고
내가 차마, 꺾기야 하였으랴마는

어여쁜 그 꽃을, 아끼어 준들
흉보지 마라, 꽃이나 나를
안타까운 마음에, 부여안았지

그러나 그는, 꺾지 않아도
저절로 스러지는 제 버릇이라네.
아- 그런들 그 꽃이 차마
차마, 졌기야 하였으랴만
무디인 내 눈에 눈물이 어리어
아마도, 아니 보이던 게로다

아- 그러나, 봄은 오더니만, 그리고 또 가더이다.

                                - 봄은 가더이다, 〈백조(白潮)〉2호, 19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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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가더이다’와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소재가 있으니 바로 눈물이다. 사실 당시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국의 현실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나라를 빼앗겨서 이민족의 노예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수필가 유달영은 슬픔에 대해 ‘슬픔은, 아니 슬픔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영혼을 정화(淨化)하고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 아닐까? 예수 자신이 한없이 비애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인류의 가슴을 덮은 검은 하늘을 어떻게 개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공자(孔子)도 석가(釋迦)도
다 그런 분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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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대한 개성적이고 주관적인 관점과 태도가 돋보이는 글이다. 옳은 말이다. 끼니를 이을 쌀이 없어 굶어본 사람만이 굶주림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에게 보릿고개 이야기를 하면 “쌀이 없으면 라면 끓여먹으면 된다”는 답변을 한다는 말이 단순한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예수(JESUS)는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인데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罪)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버린 죄인(罪人)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졌다. (요한복음 1장 29절)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공자(孔子)는 숙량흘(叔梁紇)의 아들로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다. 본래 송나라 귀족이었지만 공자의 가까운 선조 대에 노나라에 피난을 오게 되었고 거기서 성씨를 공으로 바꾸게 되었다. 공자는 노나라의 예악 문화에 영향을 받아 유가(儒家)를 일으켰고 그 가르침은 2천여 년 동안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또 어떤가? 자료를 찾아보면 그는 기원전 563년 정도에 태어났는데 성(姓)은 고타마(Gautama)이고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이다. 석가모니란 석가족(釋迦族)에서 나온 성자(聖者)라는 뜻으로 왕족(王族)의 태자(太子)로 출생하여 결혼하고 아들까지 있었지만, 인생문제에 깊이 괴로워하다가, 29세에 출가하여 수행(修行)하였고 35세 때 크게 깨달음을 얻고(大悟成道), 각지에서 교화(敎化)를 실시하였으며, 80세 때 입적(入寂)하였다고 한다.
 
세계 3대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분들은 모두 한결같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관심을 두었다. 시야를 넓혀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야 공감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이다.

홍사용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전체가 8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연에서는 상처받은 눈물의 왕인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2~3연에서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우는 과거의 왕이 나온다. 4~7연에서는 죽음을 인식하고 슬픔을 내면화한 과거 소년시절의 왕이 등장한다. 끝으로 8연에서는 눈물의 왕인 현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확인한다. 이에 대한 평가를 보면 ‘병적이고 퇴폐적인 성향의 정서 저변에는 일종의 민족적 울분과 시적 서정성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설움과 비통함을 오롯이 담은 것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지마는, 그것은 ‘으아!’ 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발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 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흗날 밤, 맨재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러웁게 놀리더이다. 모가지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 나는 왕이로소이다, 〈백조(白潮)〉3호, 1923.9-

홍사용은 우리나라 신극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먼저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이었던 ‘토월회’에서 활동했다.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을 번역하고 번안했으며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1924년 1월에 있었던 3회 공연에서는 ‘灰色(회색)의 꿈’이란 작품을 번역하고 연출하기도 했
다. 당시의 희곡들이 남녀 간의 애정, 가정불화 등을 다룬데반해 홍사용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아픔을 다루면서 일제에 저항하였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 등과 함께 극단 <산유화회(山有花會)>를 만들어 자신이 쓴 희곡인 ‘鄕土心’을 창립공연작품으로 올렸고, 이후 번역 작품을 올렸다. 또 1930년에는 홍해성, 최승일과 신흥극단을조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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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서슬이 퍼렇던 시기에 친일 성향의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던 노작은 1939년에 일제의 강요로 희곡 ‘金玉均傳(김옥균전)’을 시작했지만 결국 붓을 꺾고 만다.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민족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1947년 향년 48세를 일기로 타계해 고향인 돌모루에 묻
혔다.
 
노작 탄생 110주년이 되던 2010년, 묘소 밑인 노작공원(근린공원)에 그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노작홍사용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2층건물인데 1층에는 다목적실인 산유화극장을 비롯하여 수장고, ‘청산백운’이라 이름 붙여진 작은 도서관, 제1전시실, 사무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제2전시실, ‘크다란 집의 찬 밤’이라 명명된 강의실, ‘백조’라는 이름의 북카페테리아와 야외테라스가 있다. 전시실과 복도 등을 이용해서 노작의 친필 기록, 가계도 족자, 사진, 유고작품집, 단행본, 문예지, 논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중 기자에게 특히 인상 깊은 것이 있었는데 먼저는 1층의청산백운과 2층의 북카페테리아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곳에서 ‘노老노NO카페’의 실버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시민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면서 다양한 책을 편하게 보고 있었다. 또 시설도 시설이지만 이덕규 관장님 이하 관계자들이 문학관을 화성시의 정서가 녹아 흐르는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삼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 역사의 암흑기였던 일제강점기가 끝난 것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분한 마음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우선 전쟁터에 끌려가 꽃다운 청춘을 짓밟힌 소녀들이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세상을 뜨고 있는데도 범죄자들은 여전히 그런 사실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있다. 인정은커녕 한술 더 떠서 스스로 군대를 따라다녔다고 하니 정녕 하늘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이에 그 뻔뻔함을 질타하는 행사들이 국내외에서 이어지고 있다. 1992년 1월 8일부터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되었던 수요시위가 지난달로 22주년을 맞이했다. 또 지난달 미국의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 준수를 촉구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서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경남 거제에 세워졌으며,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만화축제인 ‘2014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한국만화기획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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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상황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시간만 보내는 저의(底意)를 알만하다. 하지만 앉아있던 소녀상이 일어섰으니 입을 열어 부도덕함을 질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이미 22년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노골적인 역사 왜곡과 독도에 대한 도발, 그리고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하면서,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세계를 향해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해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등 현재 진행형인 저들의 악행(惡行)을 일일이 열거하기엔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그이를 찾아서 해 저문 나라에, 커다란 거리에 나아갔었더니 지나가는 나그네의 꼬임수에 흔하게 싸게 파는 궂은 설움을 멋없이 이렇게 사 가졌노라. 옛 느낌을 소스라쳐 애마르는 한숨 모든 일을 탓하여 무엇하리요, 때묻은 치맛자락 흐느적거리고 빛 바래인 그림자 무너진 봄 꿈, 미치인 지어미의 노래에 섞어서 그날이 마음 아픈 오월 열하루. 봄아, 가는 봄은 기별도 없이 꽃피던 그 봄은 기별도 없이, 진달래꽃 피거든 오라더니만, 봄이나
사랑이나 마음이나 돌아가는 그 봄은 기별도 없이…… 진실과눈물은 누구의 말이던고, 시방도 나는 이렇게 섧거든, 그적에 애끊이던 그이의 눈물은 얼마나…… 붉었으료, 하염없이 돌아가던 언덕, 긴 한숨 부리던 머나먼 벌판, 눈물에 젖어서 잡풀만 싹이 더 우거졌는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오고가는 산새 가슴이 아프다 “뻐뻑꾹” 그이가 깨끗하게 닦아주고 가던 내 맘의 어루쇠[鐘]는 녹이 슬어서 기꺼우나 슬프나 비추이던 얼굴, 다시는 그림자도 볼 수 없으니, 아 그날은 병들은 나의 살림, 마음 아픈 오월 열하루, 나는 이제껏 그이를 찾아서 어두운 이 나라에 헤매이 노라.

                              - 해 저문 나라에, 〈개벽(開闢)〉37호, 1923.7-
 

여전히 저들에게 우리나라가 ‘해 저문 나라’로 보이는가. 당치 않다. 오늘 서쪽으로 진 해는 내일 다시 동쪽에서 떠오른다. 우리나라는 해 뜨는 동방의 나라이다. 이 어찌 저 하늘에 떠 있는 해만 두고 하는 말일 것인가? 해가 만물에게 빛을 주고 생명을 주듯이 우리에게는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높은 문화와 재료가 있다.
 
눈물의 왕에게는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이지만, 평화의 왕에게는 ‘이 세상 어느 곳이든지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모두 그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