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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와 만났다. 올해는 특히 청마(靑馬)의 해라고 하니, 푸른 꿈(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해가 될 것이다. 만남이란 가능성이 있기에 좋다. 새로운 만남에 대해 상념하다 보니 올해 1월 30일로 서거 21주기를 맞는 한국 문학계의 대모(代母) 향정(香庭) 한무숙(韓戊淑) 소설가의 장편소설 ‘만남’이 생각난다. 더욱이 1986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작인 이 소설이 최근 체코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는 소식도 들은 뒤여서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한무숙문학관을 찾았다. 마침 눈이 내려 기와집의 고풍스러움이 한결 더했다.

한무숙 소설가의 장남인 김호기 관장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이나 가와바타 야스나리(Kawabata Yasnari) 같은 유명한 문인들이 와서 차를 마신 곳에서 특별한 커피를 대접 받으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병약한 몸에 엄격한 사대부가의 며느리의 역할을 감당하느라 몹시도 힘이 들었지만, 완전한 여성이 되기 위해 집안일에 충실하면서도 틈틈이 소설을 써서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많이 내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완전한 여성이라는 면에서는 그녀가 받은 신사임당상을 들 수 있겠다. 거기에 훌륭한 소설가로서의 면모는 데뷔작인 일본어로 쓴 장편 <등불 드는 여인>을 비롯하여 <역사는 흐른다>, <만남>을 들 수 있겠다. <역사는 흐른다>는 하와이대학 출판사에서 영역되어 출판되었고, <만남>은 폴란드, 미국, 프랑스, 체코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기자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교목(校牧, 100년을 훌쩍 넘긴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미션 스쿨로 목사님이 계심)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인간은 다섯 가지 만남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 먼저는 부모와의 만남이고, 친구(동성, 이성), 배우자, 그리고 맨 끝에 종교지도자와의 만남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님의 말씀이니 다섯 번째를 그렇게 했겠지만 20여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그렇다.

부모와의 만남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 누군가는 전생에서 가장 큰 빚을 진 사람을 자식으로 만난다고 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부모는 자식에게 평생 ‘문서 없는 종노릇’을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부모에게 자식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다. 이토록 어마어마하고 값진 만남이기에 부모와의 만남이 인간의 중요한 만남 중 1번이다.
 
‘품안의 자식’라고 어느 정도 손발에 힘이 생기면 시선을 밖으로 돌려 친구를 찾는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친구들과 또래 집단을 형성하고 어울리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행성(行星)에서 온 것처럼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남녀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기에 동성(同性)의 친구와 이성(異性)의 친구가 다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과연 이성(異性)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논외에 두기로 한다. 그 답은 생각하기에 따라 또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친구(벗,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동성 친구와 이성 친구가 주는 영향이나 깨우침은 그 출신 별(화성과 금성)의 거리만큼이나 다를 것이다. 그러니 이 둘이 인간의 중요한 만남 중 2, 3번이 된다.
 
배우자와의 만남 역시 중요하다. 아니 이것은 부모와의 만남처럼 중요하다.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라는 말에는 결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결혼은 혼자로서의 삶이 죽는 것이고 둘로서의 삶이 태어나는 일이다( 물론 이 둘의 만남으로 인해 수많은 새로운 만남도 생긴다). 결혼이 새로운 탄생이기에 배우자와의 만남은 부모와의 만남과 같이 중요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대부분의 경우에 결혼은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선택을 두고 현실에서도 또 현실을 모방했다는 드라마에서도 많은 일들이 얽히고설키게 된다. 배우자와의 만남은 인간의 중요한 만남중 4번이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종교지도자와의 만남이다. 종교지도자의 머리 위에는 종교가 있다. 그러니 종교(宗敎)와 그 종교의 본질(本質)에 다가갈 수 있도록 바르게 이끌어 주는 종교지도자와의 만남이 인간(인생)의 중요한 만남 중 맨 끝인 5번이자 가장 상위에 있는 만남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미션스쿨에 계신 목사님의 말씀이어서 종교가 들어갔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1900년대를 살다간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중 매슬로(Abraham H Maslow)란 사람이 있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설을 주도했다고 평가받는 그는 매슬로의 욕구단계설(Maslow'shierarchy of needs)을 주장했다. 인간욕구의 5단계설로도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은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위계상 다음 단
계에 있는 다른 욕구가 나타나서 그 충족을 요구하는 식으로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다섯 가지 욕구는 바로 생리→안전→소속→존경→자아실현이다.
 
물론 생리, 안전, 소속, 존경, 자아실현과 부모, 동성 친구, 이성 친구, 배우자, 종교(종교지도자)를 일대일로 연결 짓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자아실현을 하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그 수준이 천지(天地) 차이다. 그런 것처럼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과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인 것에만 머무는 사람의 삶은, 하늘에 속한 사람과 땅에 속한 사람이 걷는 길처럼 다르다고 하겠다.

한무숙의 장편소설 <만남>은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길을 당당히 걷는 것으로 자아실현을 이룬 초창기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와 박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그의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은 모두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한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전통 유교 사상 안에 있는 천명 의식과 천주교의 하느님 신앙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이해한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그 방대한 다산의 저서에는 표면상 어느 한구석에서도 서학 신봉자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다는 대학자 다산은 어디까지나 위대한 경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젊었을 때 저술한 『중용강의』를 보면 그의 상제 사상이 최고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천제에 대한 중국 고대의 경천(敬天) 외천(畏天) 사상에 근거를 두었다고는 하나 마테오 리치의 영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또 『만천유고』의 발문은 간결하나 그는 그 간결한 글 속에 자신의 서교에의 귀의와 신앙을 압축 요약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다산을 ‘외유내야(外儒內耶)’니 ‘주유종서(主儒從西)’이 하는 사람도 있고, 마테오 리치의 소위 보유론(補儒論)적인 적응주의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는 외유내야 같은 혼합주의자도 아니며, 마테오 리치처럼 서학의 우위적 입장에서 유교에 적응하려는 보유론자도 아니다. 경학에도 서학에도 완전히 통달해 있던 그에게는 이 상반되는 것 같은 두개의 사상은 양자택일이 불필요했을 것이다. 서학과 경학은 완전히 대등하게 그 안에서 만나고 공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달레가『한국천주교회사』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향리로 돌아간 후 다산은 손수 만든 괴로운 고대(苦帶)를 두르는 등 갖은 고
신 극기로 마치 사막의 은수사(隱修士)처럼 천주교인으로서 신앙과 종교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완전한 유교인으로서 유교 전통에 충실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 한무숙, <만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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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유교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치가들은 성리학적 전통에만 매달려 민생은 외면한 채 소모적인 논쟁만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산이 접한 서학(천주교)은 유교와 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은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어야 한다’는 실학적 입장과도 맞아 떨어졌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던 사람들은 볼 수 없었던 큰 세상을 천주교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 땅의 천주교는 피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다.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정조 때부터 시작했다. 정조 15년(1791)에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윤지충의 모친상 때 유교적인 전통을 거부하고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식 제례를 지낸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던 곳이어서 이들은 전주에서 처형되어 한국 천주교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천주교에 관대하여서 일이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집권 세력은 새로운 학문을 용납할 수 없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불순한 세력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모진 탄압을 가하였다. 특히 순조 1년(1801)에 있었던 신유박해(辛酉迫害)와 헌종 5년(1839)에 일어난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대표적이다.

먼저 신유박해는 벽파(辟派)가 시파(時派)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것이다. 갑작스럽게 승하한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11세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그간 숨을 죽이고 있던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대비는 벽파와 시파의 대립에서 벽파의 편에 섰던 사람이다. 급기야 순조 1년 대왕대비의 명으로 ‘사교(邪敎)와 사학(邪學)을 엄금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이를 계기로 벽
파는 시파 계통의 천주교도들에게 무차별적인 탄압을 가한다.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3형제도 이 때 체포된다. 정약종은 순교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 저런 일로 마재를 찾지 못했던 하상은 오랜만에 보는 숙부의 수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몰라보게 쇠약해진 다산은 생애의 고난과 과로가 한꺼번에 들이닥치기나 한 것처럼 착 까무러지도록 쇠약해 있었다. 그런 애처로운 숙부의 모습을 보고 슬픔 속에서도 하상은 그 슬픔 이상으로 어떤 의미를 느꼈다.
 
그는 교구 설정과 탁덕 영입에 드디어 성공한 기쁨을 전한 후 한참을 주저하다가, “이젠 탁덕을 모셨으니 성사(聖事)도 받을 수 있습니다.” 침중하게 말했다. (중략) 전날보다 더 수척해 보이는 다산의 얼굴에는 성사 준비로 상 위에 백포가 덮이고 중앙에 봉안된 십자가 고상(苦像) 양편에 촛불이 켜지고 그 앞에 성수(聖水) 그릇과 성수채와 봉성체함이 놓인 후 탁덕이 중백의(中白衣)를 입고 자색 영대(領帶)를 걸 동안 불안과 공포가 서려 점점 더 창백해 가서 무사히 성사를 끝마칠 것 같지도 않았으나 탁덕이 성호를 긋고 성수를 찍어 방과 꿇어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며, “이 집에 평화-”하고 다시 성호를 그었을 때부터 차차 평온을 되찾아 갔다.
 
하상의 복사(服事)를 받으면서 유신부는 침착하고 경건하게 성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나전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다산의 가슴은 뜨거운 감동으로 떨렸다.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기구와 의식은 시종 경건하게 정중하게 계속되었다. 이윽고 탁덕이 가만히 세 교우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은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고명(告命)의 차례가 온 것이다. 다산은 위대한 한학자이지만 중국말을 할 줄은 모른다. 방안에 두 사람만이 남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었다. 필담으로 생애의 죄를 고하려는 것이다.
 
그가 고백한 죄과는 아무도 모른다. 천주만이 아는 영원한 비밀이다. 고명을 듣고 탁덕은 훈계와 보속을 필담으로 주었다. ‘갈봐리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달게 받아라.’ 이는 모든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속이었으나 다산은 이 말에 무한한 위안과 감사를 느꼈다.
 
천주의 인자함이 저리게 느껴져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는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죄가 깨끗하게 제거됨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양심을 괴롭혔던 배교의 죄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을 느꼈다. 천주교인으로서는 물론 경학자로서도 그는 오상(五常)을 저버린 죄인이라는 의식이 항시 그를 괴롭혔었다. 진정한 경학자라면 결코 어겨서는 안 되는 의(義)와 신(信)을 저버렸던 것이 마음에 박힌 가시처럼 아팠었다.
 
이제 그는 고통이 보속이 되는 오묘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구원이었다. 실로 그 숱한 기막힌 고통으로 하여 그의 보속은 완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후 다산의 얼굴은 밝아지고 준엄했던 표정도 사라져 증손자들과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같이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

- 한무숙, <만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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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 역시 겉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였으나 안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에게서 권력을 빼앗으려는 벽파(辟派)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1834년에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역시 수렴청정을 통해 정사에 개입한다. 정국은 순원왕후의 오빠인 김유근(안동 김씨)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천주교 세례까지 받은 인물이라서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그러다가 김유근이 은퇴하고 난 후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으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고 이것이 기해박해이다. 이때 다산의 조카인 정하상(정약종의 아들)도 순교한다.
 
 
기해년의 대교난은 여유당 뒤의 다산의 무덤과 강 건너 배알리의 약종의 무덤에 뿌리를 박고 푸른 하늘에 걸렸던 무지개의 아름다움이 아직 마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도 전인 다산의 사후 3년째 되는 해에 일어났다.
 
그 동안 하상은 여전히 교회 재건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홉 번에 걸친 고되고 험난한 연행길, 교우들의 지도와 단합과 구휼 자선 사업 등으로 앉을 틈조차 없었다. 그러한 열의와 노고로 갑오년(1834)에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를 영입하고, 이어 병신년(1836)에는 최초의 서양인 신부 모방을, 다음 해에는 샤스탕 신부를, 그 이듬해에는 제2대 조선 교구 주교 앵베르를 차례로 맞아들였다.
 
조선 교구는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시파에 속해 있었던 까닭으로 천주교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이 세 프랑스 성직자와 정하상 등의 열절 교우들을 중심으로 날로 교세를 뻗어 가 모방 신부 입국시에 6,000명이던 교우 수는 기해년(1839)년 초에는 9,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력은 날로 쇠미해 가고 있었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헌종을 위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헌종의 조모 대왕대비 순원왕후를 보필하고 있던 그의 오라버니 김유근(金逌根)이 말조차 못하는 중병으로 마침내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정권은 당시 오직 한 사람의 재상이 었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지연은 몹시 천주교를 적대시한 사람이었다.
 
그는 새로이 세도가로 대두한 헌종의 외척 풍양 조씨를 등에 업고 적극적으로 천주교 박해에 나섰고, 왕의 외조인 풍양 조씨 조만영은 그 아우 조인영과 더불어 안동 김씨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그러한 그를 철저히 이용하기로 하였다. 마치 신유년(1801)에 당시의 어린 왕 순조를 수렴청정으로 보필하던 정순왕후가 시파를 섬멸하는 수단으로 천주교 박해의 대옥사를 일으켰듯이 기해교 난 역시 세도 다툼에 말미암은 희생이었던 것이다.
 
- 한무숙, <만남> 중에서 -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주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 이해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한없이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았을까?
 

다산은 바람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지금 그것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다. 뉘라서 초여름의 훈풍을 청람이라 불렀던가. 녹색의 향기를 싣고 어지럽게 방향을 바꾸며 불고 있다. 강 건너에서 불어왔다간 강 건너로 불어 간다. 강 건너는 배알리, 셋째 형 약종이 묻혀 있는 곳이다. 기옥(羈獄)이며 삼구(三仇)의 하나인 육신을 벗어난 지 오래인 영혼이지만 때로는 돌아와 핏줄인 자기를 찾아오고자 하는 것인가. 언제나 그리웁고 사랑하는 향리의 향기로운 계절 속에서 다산은 차라리 마음이 비창하다. 잠시 잦던 바람이 또 불기 시작했다. 눈 아래 강기슭의 수양버들 가지가 어지럽게 흩어진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엉키며 흔들린다. 바람이 잦다 일었다 하는 것은 자연의 기상 현상이지만 새삼 신비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문득 권진사의 여식 마리아가 포청에서 문초를 받았을 때 했더라는 말이 상기되었다. 관장이 천주학 신자를 문초할 때 으레 상투적으로 쓰는 순서로 천주를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마리아는, “시굴 사람들이 임금님을 뵙지 못했다구 임금님 계신 것을 믿지 않습니까? 저는 천지만물을 보고 이것들을 만드신 지고의 임금님, 지고의 아버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관장이 버럭 화를 내며, “저 요망한 것이 망령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매우 쳐라.” 애처롭게도 마리아는 혹형을 받았단다. 그래도 그녀는 조용히, 그러면서 단호하게 “아무도 바람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하오나 저 나뭇가지를 보십시요. 저렇게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바람이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천주는 엄연히 계시옵고 저는 뵙지 못하는 천주를 굳세게 믿습니다”하고는 기진하여 눈을 감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도 초여름, 포청 뜰에 서 있는 단 한 그루의 느티나무 가지가 푸른 바람에 마구
흔들리고 있었더란다.
- 한무숙, <만남> 중에서 -
 

논술에서 말하는 오류 중에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라는 것이 있다. 이는 ‘어떤 주장이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추론하거나, 반박되지 않았기 때문에 참이라고 추론할 때 발생하는 오류’인데 예를 들어서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이 없기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피고인이 무죄라는 증거가 없으므로 유죄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에서 중요한 것은 검증할 수 없거나 검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대상의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았다고(눈에 보이지 않는다고)해서 그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무신론자들이 신(神)의 존재에 대해 부정할 때 자신은 신을 못 보았기에 신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신의 눈에만 의지하는 자여, 당장 가서 수돗물을 한 컵 받아보라. 그 물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과연 아무 것도 그 안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가? 환경부 자료에 의하면 수돗물 한 컵에는 4종의 미생물, 11종의 무기물질, 17종의 유기물질, 10종의 소독제 및 16종의 심미적영향물질이 들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컵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이야기를 다시 인생에서 중요한 다섯 번째 만남으로 가져가 보자. 종교지도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道)을 알려주는 존재다. 그러기에 그는 밝은 영적인 눈(靈眼)을 가져야 하겠다. 하지만 작금의 세태를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종교지도자가 오히려 범인(凡人)보다 더 형이하학적인 경우가 수없이 많다. 쉽게 말해 진리가 아니라 돈이나 권세를 위해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믿는다고 하는 종교
의 경전(經典)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속 시원히 말해주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영안(靈眼)이 감긴 소경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성경(聖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 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태복음 15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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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맹(全盲)은 아니나 극도의 약시(弱視)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사회적 맹인은 어렴풋이 색(色)을 분별한다. 그러나 영원한 암흑 속에 잠겨 사는 맹인은 색채를 모른다.
 
중간 실명자로서 빛과 색채와 형태를 본 일이 있는 사람도 실명 후 오래된 맹인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색채는 모르는 사이에 극히 주관적인 것이 되고 만다. 보았던 기억은 선명하나 오랜 세월을 보지 못한 그 황활하고 보배롭고 신비로우며 신성(神聖)한 색채의 환상은 서서히 바뀌어져서 느끼고, 만지고, 듣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실지로 있으면서 있을 수 없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맹인에 있어서는 색채는 보는 것이 아니고 듣는 것이고 만지는 것이며 느끼는 것이다.
 
맹인의 색채는 언어(言語)이며 음(音)이기도 하다. 빨간색은 정열이며 C장조(長調)의 미(mi)다. 높고 맑은 음은 백색이고, 무겁고 낮고 탁하고 불쾌한 음은 까만 색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촉이 거칠고 딱딱한 석고(石膏)는 아무리 흰색이라고 일러 주어도 맹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맹인에게는 흰 석고가 까만색인 것이다. (중략) 실명 후 오래 된 맹인은 일상생활에 그리 지장이 없다.
 
오래 함께 살아오면 아내도 잠시 남편이 맹인이라는 것을 잊을 때가 있다. 언젠가 박노인은 결이 좋은 나무에 반질반질 까만 칠을 한 작은 함을 맡긴 일이 있다. 얼마 후 박노인이 말했다. “언젠가 맡긴 그 예쁜 하얀 함 가지고 와.” “하얀 함이라뇨?” “왜 그 빨간 보에 싼 작은 함 말야.” “까만 함은 맡았어두 하얀 함은 몰라요.” “아니 하얀 함이야. 아주 예쁜 거지.” 교동 아주머니는 다투다 말고 맡았던 남보에 싼 함을 내다주었다. 그러자 박노인은 함을 어루만지며, “사람 고집두, 맡아 놓구 아니라기는.” 했던 것이다. 아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 사람은 맹인이었구나…….” 맹인에게 있어 매끄럽고 고운 것은 ‘흰빛’이고, 그 까만 함은 매끄럽고 반질반질했다. 빨간 보는 느낌이고, 남색 보에 함은 쌓여 있었다.
 
- 한무숙, <어둠에 갇힌 불꽃들> 중에서 -
 

자신의 눈이 감긴 사실도 모른 채(경서의 참뜻도 모른 채) 그저 느낌으로 ‘이것은 이럴 것이다’라고 추측하다가 이윽고 그 추측이 신념이 되어 진리로 믿고서 누군가가 사실(진리)을 알려주어도 여전히 눈 감고 귀 막으며 들으려고 하지 않고 우기는 존재와, <어둠에 갇힌 불꽃들>에 등장하는 박노인은 닮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지 이것만이 아니다.
 

멈칫멈칫하고 있는데 노인이 경상 위에 놓인 화류나무 토막을 들었다. 힘없이 보이는 하얀 고운 손으로 귓가에서 토막을 흔들자 찰칵찰칵 소리가 났다. 서너 번 흔든 후 손을 내려 토막 속에 들었던 가는 댓가지를 꺼낸다. 이윽고 노인은 또 조그만 화류통을 귓가에서 흔들고 댓가지를 또 하나 빼냈다. 이렇게 세 번 한 후, 통은 도로 경상 위에 얹고 댓가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댓가지에는 마디가 있는 모양이었다. 병호는 침을 삼키고 노인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젊은이 이런 것 처음 보는 모양이군. 신기할 건 없어. 이게 산통(算筒)이라는 게야. 왜 산통깬단 말 있지않나. 산통을 깬다? 볼일을 다 봤다는 거지.”

- 한무숙, <어둠에 갇힌 불꽃들> 중에서 -
 

신약성경의 맨 끝인 요한계시록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성이 나온다. 그런데 그 성에 들어가는 존재와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 이중 점 치는 자(술객)는 성 밖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점이 무엇일지는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장 15절)

인간과 종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지난 몇 달간 시국(時局)문제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종교계가 생각난다. 그중 천주교가 가장 먼저였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잘못된 것은 잘못 되었다고 용감하게 말하는 그들에게서 어둠과 함께하지 못하는 빛의 밝은 면을 본다. 암흑 속에서는 성냥불 하나도 밝게 보이는 법이다. 나는 비록 약하고 내가 가진 빛은 그리 밝지 못하나 나로 인해 내 주변은 조금이라도 더 밝아질 것이고 나와 같은 존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어둠은 점점 물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빛을 가진 존재가 빛을 가진 또 다른 존재를 만날때 악(惡)을 이기고 선(善)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만남이 중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