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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발전사를 한눈에…
미래의 한국교육 ‘우리가 책임진다’는
자긍심의 발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역사교과서 소식을 들으면서 추억의 교과서도 볼 겸 교과서의 이모저모를 살피기 위해 찾은 교과서 박물관은 다른 박물관과는 다르게 교과서 생산 공장인 (주)미래엔(구 대한교과서, 2011년 4월 회사명 변경) 내부에 위치해 있었다.

국내 단일 공장이자 최고의 인쇄공장 건물 외부에는 ‘교과서는 국민교육의 경전’이라는 표어가 크게 각인돼있다. 교과서는 나라의 번영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기에 교육산업을 통해 2세 교육에 이바지해 온 (주)미래엔(MiraeN)의 소중한 결실이기도 하리라.
 
공장 쪽으로 가다가 왼쪽을 바라보면 창립자 우석 김기오 선생의 흉상과 함께 주변에 있는 국산 인테르주조기, 자동활판 인쇄기, 독일산 오프셋인쇄기, 일본산 자모조각기 등 굵직굵직한 인쇄기계들이 눈길을 끈다.
 
야외전시장의 인쇄기계들은 마치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 교과서 인쇄 출판의 역사와 함께 해온 산 증인임을 증거라도 하듯 당당하게 서있다.
 
(주)미래엔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2세 교육을 위한 사명감과 ‘교육입국(敎育立國)’ ‘실업교육(實業敎育)’ ‘출판보국(出版報國)’이라는 이념을 가지고 창업해 우리나라 교육 문화 발전과 그 역사를 같이해 왔다. 교과서박물관은 (주)미래엔의 역사와 함께 60년간 모은 자료를 중심으로 (주)국정교과서 터에 약 70억 정도를 투자해서 2003년 9월 24일 개관했다.

(주)미래엔의 자긍심으로 우리나라 교육 문화 발전사를 한눈에 살펴보고 미래의 한국교육을 책임진다는 인식하에 설립했다고 한다. 2004년 8월 충남 제1호 등록박물관으로 인정돼 충청남도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과서를 전문주제로 다루는 국내 유일의 교과서박물관이며 국외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은 3402㎡ 건물로 교과서전시관, 인쇄기계전시관, 홍보관, 기획전시관 등 4개의 관으로 구성돼 있고 그 외 휴게실, 세미나실, 수장고, 자료실, 기증도서실, 체험학습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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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출판 문화의 자랑스러운 유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교과서전시관은 한글관, 교과서의 어제와 오늘, 추억의 교실, 교과서 제작과정, 세계 교과서, 북한 교과서, 미래교과서 부문으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의 첫 입구,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한글관에는 영인본 〈월인천강지곡〉과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오국진 선생의 기증품인 월인천강지곡을 복각한 금속활자 판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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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지곡〉은 원래 상·중·하로 돼있었으나 현전하는 것으로는 (주)미래엔이 소장하고 있는 상권 1책과 국립도서관에 중권의 일부 낙장(落張)이 전해지고 있다.

세종의 사적에 의하면 조선 초기 실상사가 중창될 때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 이보(李補)가 시주한 물품 중에 세종이 직접 하사한 〈월인천강지곡〉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박물관의 특별시설에 보관돼 있는 진품 〈월인천강지곡〉 상권의 소장경위에 대해 교과서박물관 유학영 관장은 “1914년 봄 전북 부안 내소사 부근에 있는 실상사 본존불(목조)이 퇴락해서 소각할 때 그 복장품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처음 발견됐고, 그 후 내소사 백학명(白鶴鳴) 스님, 김성연(金性連) 스님, 담양 용화사 국묵담(菊黙潭) 스님을 거쳐 1961년 진기홍(陳錤洪) 전 광주체신청장이 입수 소장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며 “이것을 1972년 7월 당시 (주)대한교과서 김광수(金光洙)사장이 인수해 현재 (주)미래엔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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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월인천강지곡〉상권이 1963년 9월 2일 보물 398호로 지정됐는데 원본 그대로 월인천강지곡 담고 있는 원간이자 유일한 희귀본이어서 보물 차원이 아닌 국보급이라며, 교과서만 12만 점, 기타 교육도서로 10만 점이 되는 박물관 소장품 중에 가장 귀중한 자료로 1년에 1~2번씩 진본을 공개한다고 전했다.
 
이 책은 한국문화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선정돼 국내외에 그 우월한 전통을 알리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91년 9월 대한민국이 유엔에 가입할 때, 정부는 〈월인천강지곡〉을 인쇄한 판틀(복각한 금속활자 인쇄판형)과 영인본을 유엔에 기증한 바 있다.
 
유 관장은 “〈월인천강지곡〉의 가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두 가지로 말한다면 세종대왕이 직접 쓰신 최초의 한글전용글로 한글을 크게 쓰고, 한자를 작은 글씨로 토를 달아 썼다는 것과 최초의 한글 활자를 금속활자로 썼다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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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국정교과서 〈바둑이와 철수〉
고난과 역경 속에도 살아남은 시대별 교과서

마침 기획전시관에서는 ‘아름다운 선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현재 10주년 기념 기증기탁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는데 전시실에 김민수 교수 기증 자료인 주시경 선생 자필이력서가 있었다. 옛날에 썼던 이력서인데도 반듯하게 쓴 글씨에다 보관도 깨끗하게 잘 돼있었다. 그 옆에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0월 5일 문교부에서 발행한 최초의 국정교과서 <바둑이와 철수>가 보인다. 이날을 기념해 ‘교과서의 날’로 정했다는데 이 때 비로소 자음·모음의 조합방식이 아닌 단어와 문장을 통해 문자와 언어를 학습하는 국어 ‘문자교육’의 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이, 철수가 등장해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텔링으로 흥미를 끈다는 게 돋보였고, 열악한 인쇄환경 속에서도 부분적으로 컬러인쇄를 한 것으로 보아 그만큼 교육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교과서의 어제와 오늘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서당에서 배우던 서적에서부터 교과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개화기 교과서, 일제강점기에서 3년간 미군정 당시의 교과서, 교수요목기(1948~1953)라고 해서 6·25전란 당시에 썼던 전시교과서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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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박물관 전문주 학예사는 “〈조선어독본〉이 우리나라 말과 글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책인데 그나마 선택과목으로 바뀌다가 교실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고, 조선총독부에서 우리나라 통치수단으로 일본인이 역사책 〈조선사〉를 만들어 가르쳤는데 그때 단군조선이 없어지고 단군신화로 만들어졌다”며 “그 때 배웠던 분들 중 유학자였던 이병도 씨가 〈조선사〉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1945년 11월 해방 이후 최초의 교과서 〈한글 첫걸음〉은 종이도 없었지만 일본인들이 활자를 전부 태워버려서 없어진 활자를 힘들게 모아 3개월 걸려 만들어서 그 당시 학생뿐 아니라 성인까지 120만부 정도를 돌렸다”고 전했다.
 
또 “6·25 전시에도 학생들을 가르쳐야 해서 어렵게 전시 교과서가 나옵니다. 부산에 조그마한 암자 하나를 빌려서 당시 최현배씨가 편수국장으로 있고 편수관 6명(과학, 국어, 셈본(수학), 사회 전공자)이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그 만드는 과정은 (주)대한교과서가 해군들의 도움으로 인쇄기계를 인천에서 부산으로 옮겨서 만들었다”며 “<국군과 유엔군은 어떻게 싸워 왔나?〉 등 임시교과서가 특별하게 나왔는데 전 세계적으로 전쟁무기로 해서 교과서를 만든 나라는 우리나라밖에없다”고 언급했다.

이어 “〈국어〉〈셈본〉〈사회생활〉〈과학〉 등 네 과목 책들도 당시의 인쇄 사정과 종이의 형편을 고려하여 전 학년 분량의 약 1/4을 내기로 하고 세 번에 나누어서 나머지 3/4을 마저 펴냈던 특별한 책”이라고 덧붙였다.
 
60년이 다 되어온 이 책을 이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6·25 전쟁 당시에도 보관해서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로 굉장히 귀한 책이다. 그리고 종이가 없었던 1950년 6·25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 씨가 운크라(UNKRA, 국제연합한국재건위원단)에서 종이를 얻어와 찍어낸 교과서에는 운크라에서 종이지원을 해주었다고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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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교실에서 학창시절을 회상하다

1954년에 시작된 1차교육과정기부터 5년 정도의 주기로 교육과정을 바꿔 시행한 이래 이어진 7차교육과정기까지의 교과서, 그 이후부터는 차수를 붙이지 않고 개정한 연도별로 필요에 따라서 2008교육과정, 2012교육과정 등으로 부르는 낯익은 현재 교과서, 그중 저시력 학생을 위해 일반 교과서를 150% 확대 제작한 교과서, 시각장애학생을 위한 점자 교과서 등 특수교과서까지를 총망라해 소장·전시하고 있다.

추억의 교실에서는 1960~1970년대의 교실풍경을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아 옛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곳이다. 옛날 나무로 만든 책·걸상에 몽당연필, 콩나물 교실에 검정고무신,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반공교육이 승공교육으로 바뀌고 동년 12월 5일 발표된 〈국민교육헌장〉을 분단별로 외던 일, 교실 한쪽의 낡은 풍금과 난로 주변에 겹겹이 쌓아놓은 도시락 사건까지 지나간 학창시절을 한편의 드라마로 보는 듯하다.

많지는 않지만 인정교과서, 대여교과서 체제여서 교과서 표지가 두꺼운 외국교과서와 사진촬영도 금물인 북한교과서도 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사정이 열악해서 교과서 한 권당4~5명 정도가 본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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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박물관은 북한 교과서를 취급할 수 있는 ‘특수자료취급인가’ 기관으로 전시품목들은 허가를 받아 전시하며 연구차 논문 때문에 열람할 때는 누가 어디를 봤는지의 기록이 1년에 한 번씩 일괄 보고할 정도로 관리하고 있다.
 
미래교과서에는 (주)미래엔 교과서의 옛날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대교체 1기에 나왔던 국정교과서, 부산 피난시절에 최초로 찍어냈던 교과서, 실업계책 판매가 어렵던 시절에 문교부의 요청으로 찍었던 <누에치기>, <거름주기> 등 유일한 소장품인 실업계교과서, 올해 2014년 고등 학교에 사용할 검정을 통과한 검정교과서, 인정교과서, 전자교과서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다. 또 하나 인쇄물인 책을 옛날활판으로 인쇄할 때 기계들이 현재 인쇄기계전시관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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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영 박물관장…교과서라는 문화콘텐츠로
교육연구에 기여할 터
 
한글날 행사 때 제23회 세종문화상 교육부문을 수상한 교과서박물관 유학영 관장은 전 교육과학기술부 인문과학편수관으로 재직하면서 교과서를 관리를 해왔던 것이 인연이 돼 2011년 제 4대 미래엔 교과서박물관장으로 취임해서 많은 일을 해오고 있다. 교육계의 경력이 화려한 그는 전에 해왔던 일에 맞게 귀중한 자료를 관리할 수 있는 일 자체가 보람있는 일이라며 앞으로의 계획은 교과서 전문 박물관으로서 충실하게 수집한 자료를 훼손하지 않고 문화콘텐츠로 잘 보존, 유지해나가면서 교육연구에 기여하겠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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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관장은 (주)미래엔의 국정교과서 인쇄 기여도에 대해 “검인정 교과서를 많이 출판했고, 특히 실업계 교과서 번각인쇄를 많이 했으며 전에는 정부출현 국영기업인 (주)국정교과서에서 교과서인쇄를 모두 맡아 했었지만 1998년 (주)국정교과서 민영화 당시 그 회사를 인수한 이후 국정교과서를 5년 동안 전부 번각인쇄를 했다”며 “5년이 지난 후부터 국정교과서의 약 50% 정도는 (주)미래엔에서 번각인쇄를 하고 나머지는 다른 여타의 교과서 출판회사에서 인쇄를 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상황이 지속이 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역사교과서에 관련해서 그는 “교육대상자인 초·중·고등학생들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균형을 가진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며 “역사교육은 나라의 정체성을 세우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역사교과서는 마땅히 국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을 밝혔다. 이어 “그렇게 해서 다양한 사람을 아우르는 집필진이 이뤄져야겠고 나라에서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정체성에 혼란을 이루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수학이나 과학 같은 객관적인 교과서는 검정으로 해도 되지만, 중·고등학교 국어나 윤리 등의 주관적인 교과서도 국정으로 해야 한다”며 “마음을 의식화하는 음악이나 미술도 개성이 강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검정으로 해야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 예로 6·25가 났을 때 북한군이 침입을 해서 제일 먼저 동네 어린애들을 모아 가지고 ‘장백산 줄기 줄기니’ ‘붉은 깃발이니’ 등 노래를 가르쳐 의식화시키는 일을 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