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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목사(1)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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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 제2대 의장 손정도와 통합임시정부 출범 기념 사진(1919. 9. 17)
 


손정도 목사 서거 90주년
1931년 2월 19일 오후 12시 중국 길림성 시내 동양병원에서 손정도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손정도는 목사이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임시정부의 통합자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제정자였다. 그는 북한 김일성이 “생명의 은인”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추앙하고 흠모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장남은 손원일인데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번 2월은 손정도 목사 서거 90주년 되는 해이다.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손정도의 52년 생애의 자취는 평안도 평양과 강서군 증산, 진남포, 서울과 전남 진도, 중국 산해관, 북경·상해·길림과 하얼빈에 걸쳐 있다.

그는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조직되어 역사적인 제1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을 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틀 뒤 제1회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던 이동녕 선생이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대리하여 국무총리를 맡기 위해 의정원 의장직을 사임하자 손정
도 목사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됐다. 그 다음달 5월에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상해에 도착하자 손정도 의정원 의장은 안창호와 힘을 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멋진 청사를 마련하고 9월 11일 연해주 동포들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와 국내의 한성정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을 이루어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출범시키고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제정하는 주역이 되었다. 그는 고향 강서의 선배인 도산 안창호의 든든한 동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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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목사
 


또한 손정도 목사는 이화학당 유관순 열사의 담임 목사였다. 손정도 목사가 정동교회 담임으로 온 것은 충청도 시골의 어린 유관순이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으로 유학을 왔던 1915년 4월 그 즈음이었다. 그때로부터 유관순 열사가 고등과 1학년 때인 1918년 5월까지 3년 동안 정동교회에서 시무했다. 정동교회는 이화학당 여학생들과 배재학당 남학생들이 참석하는 교회였다. 열정적이며 신앙 깊은 손정도 목사의 설교는 남녀 학생들의 가슴에 신앙의 불길과 민족의식의 뼈대를 형성하게 했다. 손정도 목사가 봉사하던 기간에 정동교회는 국내 최대 개신교회로 성장했다.

1918년 7월 9일 손정도 목사는 정동교회 담임직에 휴직원을 제출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였다. 그는 짐짓 평양으로 이주하고 의친왕의 망명운동을 추진했다. 1919년 2월에는 3·1운동의 준비를 도운 후 중국으로 비밀리에 탈출하여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회격인 임시의정원의 지도적 인물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만주 길림에서 숨을 거둔 손정도 목사에게는 무덤으로 쓸 한 평 땅이 없었다. 그해 6월 11일 개성의 북부교회에서 감리교 연회가 열렸는데 연회 중에 손정도 목사 추도회를 열었다. 배형식 감리사는 “손정도 목사가 길림에서 서거했는데, 목사의 유해를 묻을 곳을 구하지 못해 아직도 관이 노상에 안치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즉석에서 헌금을 걷었다. 그 돈으로 길림성 밖 북산 언덕에 묘지를 마련하여 11월 25일 안장식을 했다.

출생과 성장
손정도 목사의 고향은 평양 서쪽 바닷가인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오수리) 마을이다. 강서군은 도산 안창호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1882년 7월 26일 손형준과 오신도 사이에 장남이자 장손으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부농이었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양반집 장손으로서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출세하여 집안을 빛내기 위해 어려서부터 한문 글공부를 했다.

1895년 13살 때 어른들의 주선으로 인근 증산면 부암리의 자신보다 10살이 많은 박씨집안 용락의 장녀와 결혼했다. 후에 남편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아내 이름을 신일(信一)이라 지었다. 여성들은 제대로 된 이름도갖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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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3. 17 도산 안창호 생일 기념 사진을 찍은 손정도(오른쪽)와 도산 안창호
(출처: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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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
 


기독교로의 개종
1902년 1월 나이 스물이 되던 그해, 결혼 7년만에 첫딸 진실을 낳았다. 그 후 어느 날 손정도는 상투에 갓을 쓰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평양으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치른다던 과거시험은 치르지 않고 느닷없이 상투를 자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평양까지 100리 길, 겨울 해가 짧아 도중에 어느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야 했다. 그집은 조씨 성을 가진 기독교 교역자의 집이었다. 조씨는 이 청년에게 서구 문화와 기독교 교리를 이야기했다. 신문명에 대한 동경이 마음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었던 청년 손 정도는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온몸에 감전된 듯 한 전율을 느꼈다. 이튿날 조씨는 청년의 상투를 잘랐다. 청년은 그 길로 평양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름 있는 유학자 집안에서 집안과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서양 종교를 받아들이다니. 부친과 집안 어른들의 설득 반, 협박과 탄압 반이 이어졌다.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향 마을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손정도가 무어 목사를 대동하고 집으로 와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부숴버렸다. 집안에서 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자식’이 되었다. 결국 한밤중에 속옷 바람으로 쫓겨났다. 갈 데가 없었던 그는 눈 덮인 산에서 밤새며 기도하다 실신했다. 인근 주민이 발견하여 목숨을 구했다.

학업과 가정 생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손정도는 평양 무어 선교사 집을 찾아갔다. 무어 선교사는 손정도를 자신의 어학 선생 겸 가사 도우미로 고용했다. 손정도는 평양 경창리 남산재 언덕에 있던 선교부 안 무어 선교사 집에서 일을 도우며 남산재 교회에 출석했다.

평양에 올 때에는 신식 교육에 대한 열망을 품고 왔었다. 1905년 4월 남산현교회 청년회에서 청년학교를 설립했다. 손정도는 청년학교에서 꿈에 그리던 신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으로 연합숭실중학교가 설립되었다. 손정도는 연합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했다.

고향에는 아내가 남아 딸을 키우며 시집살이를 감당하고 있었다. 아내는 ‘개화꾼’ ‘야소교인’으로 배척되고 있는 남편을 따라 자신도 개종할 것을 결심했다. 이듬해 아내는 딸 진실을 업고 평양으로 나와 만수대 언덕 하수구리 40번지에 신접살림 같은 살림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교사 집에서 받는 돈으로 생활이 안 되자 부인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로부터 남편이 목회하는 만주 길림에서 가정을 합치던 1925년까지 20년 동안 아내는 평양 기휼병원에서 빨래와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평양 대부흥운동과 거듭남
1908년 손정도는 숭실중학교 4년 과정을 마치고 제5회로 졸업하고 숭실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결심하여 숭실대학을 그만 두고 감리교 협성성경학원(후에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손정도가 숭실중학교 최상급반에서 공부하던 1907년은 여러모로 운명의 해였다. 대한제국은 2년 전 을사조약으로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거기다 그해에는 헤이그 밀사 파견, 고종황제 강제 퇴위, 군대해산, 의병의 봉기 등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착역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열차와 같았다. 다른한편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와 신민회 운동을 시작했다. 신민회 운동은 ‘황제가 잃어버린 나라를 국민이 나서 찾자’는 운동이었다. 또한 국민이 되찾는 나라는 과거의 ‘황제가 주인인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신민회의 독립운동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이자 새로운 국민의 나라 건국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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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휼병원 초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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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 관인. 1919년부터 사용. 홍진 후손이 보관
 


개신교계에서도 1907년은 역사적인 해였다. 시국의 불안을 피해 모여 들었던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 회개와 개심을 통한 영적 거듭남의 거대한 평양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손정도가 공부하던 숭실중학교에서도 부흥운동의 물결이 닥쳐왔다. 손정도는 동료 학생들과 죄와 실수를 고백하며 부흥운동을 경험했다.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손정도는 이후 기도와 전도에 더욱 열심을 내게 되었다. 한 번은 20리성 밖으로 전도를 갔다 오면서 어느 언덕 소나무 밑에서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에 얼마나 온 정신을 기울였던지 밤을 꼬박 새웠고, 눈이 귀까지 쌓이는 줄도 몰랐다. 학교 기도실에서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다. 또한 인천과 공주까지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손정도의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그의 영혼도 확장되었다. 그는 민족의 구원과 해방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바탕 위에서 민족을 구원하며 ‘하나님 사랑이 곧 나라사랑’이라는 신앙과 독립운동, 신앙과 정치의 일치에 도달했다. 그는 나라가 있고 독립이 있어야 자유가있으며 독립운동은 진리와 정의의 싸움이라는 신념을 굳게 새겼다.

손정도는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했던 한 질문을 “대한제국이 국권을 회복할 때가 이때 입니까?”하는 것으로 바꾸었고 성경에서 주님의 대답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원용하여 “대한제국이 독립을 얻을 때와 시기는 하나님이 정하실 것으로 우리가 알 수 없고, 다만 우리 민족이 성령을 받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우리 민족의 독립 시기가 단축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