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다문화의 역사 (4)

- 천년제국 로마, 다문화로 흥하고 다문화로 망하다



글.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01.jpg
포노 로마노
 


동서양을 망라해 인류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국가들은 하나같이 다문화를 포용한 국가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다문화 포용성’이 그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었고 찬란한 문명을 만들었던 토양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도 성립한다. 즉, 위대했고 찬란했던 국가들이 망하게 된 원인도 바로 다문화 정책의 문제였던 것이다. 동서양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국가들은 모두 다문화 포용성이 높은 나라들이었지만 다문화 사회통합에 실패함으로써 망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양의 로마와 동양의 당나라였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세계국가로 발전하게 된 것은 두 번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전쟁이었다. 로마는 1, 2차 포에니 전쟁이라고 명명된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16년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아주 힘겹게 이겼다.

   

02.jpg
노예출신 디오클레티아누스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것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었다. 그가 아프리카북부(지금의 튀니지)에서 스페인과 프랑스 지역을 거쳐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고, 10여 년을 넘도록 로마 인근을 휘저으며 로마를 절망스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로마를 구원해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목숨 걸고 로마 공화정을 지키고자 하는 시민정신(지도층의 사회적 책임-노블리스 오블리제)이었고, 두 번째는 다문화 연합 군대였다. 8000명에 달하는 귀족들과 그 자제들이 한니발의 포로가 되었음에도 목숨을 흥정하지 않고 단호하게 결사항전 했으며 포로가 된 귀족들과 자제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전쟁이 끝난 후 로마는 포로가 되어 그리스 등지로 팔려간 포로들을 모두 찾아내어 귀환시켰다. 귀족과 지도층은 전쟁에서 목숨을 건 책임의식(노블리스 오블리제)을 고수했으며, 국가는 전쟁에서 이긴 후 그들을 모두 찾아내 귀환시킴으로써 그 보답을 했던 것이다.


03.jpg
속주 징세관집안 출신 베스파시아누스
 


또 하나는 다문화 연합 군대였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불세출의 전술로 10여 년 동안 승승장구를 하며 로마 곳곳을 초토화시켰다. 이에 로마는 주변 도시국가들과 왕국들을 끌어들여 연합군대를 편성했다. 연합군대를 통해 한니발의 공격을 버텨내면서 스키피오가 바다를 건너 카르타고로 진격해 들어갔다. 한니발의 전략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그렇게 한니발의 전략을 그대로 모방하여 카르타고에 침략해 들어감으로써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군사 교전권’만 박탈했을 뿐, 자치독립권을 유지시켜 주었다. 카르타고의 종교, 제도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다문화 포용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정복지역에 대한 로마의 포용성은 모든 점령지에 적용되었다.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종교적 자유’을 보장했으며, 식민지 노예라 하더라도 로마에 충성하고 공헌을 하면 그 정도를 심사해서 시민권을 부여해 주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식민지 속주 출신 황제도 많이 나왔으며, 심지어 아프리카 출신 흑인과 노예출신 중에서도 황제가 나왔다.

다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타 종교를 공격하거나 테러를 하는 행위, 종교적 갈등을 유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았다. 흔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행위를 가지고 로마가 종교탄압을 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빌라도는 심판자였을 뿐이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것은 기득권자였던 유대교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04.jpg
에스파니아출신 트라이아누스 황제
 


이렇듯 로마는 점령지에 대해 충분한 자치권을 부여했고 그들의 문화와 권리를 존중했다. 하지만 로마가 세계적인 제국이 되면서 다문화 존중만을 가지고는 제국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에 따라 공화정에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정으로 변신하는 등 국가의 통합력에 힘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로마가 토템식 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이유였다.

즉, 다문화 국가였던 로마는 ‘다문화 존중’만으로는 국가의 통합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제정으로 전환하여 황제를 중심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국가 통합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다.

로마가 천년을 넘어 유지되었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국가통합력에 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포에니 전쟁 때 그리스로 팔려가 전쟁포로들을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도 끝까지 찾아내어 귀환시켰던 것처럼 ‘국가의 의리’를 지키는 것과 ‘황제’를 국가의 구심점으로 삼는 제국으로 변신한 것, 그리고 자신들의 토템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 굳이 하나를 더 추가 하자면, 로마 전시대를 관통하는 ‘타문화에 대한 수용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스키피오가 이탈리아 반도의 한니발을 상대하지 않고 곧바로 카르타고로 건너간 것은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 전략을 그대로 본받은 것이다. 그리고 스키피오는 끝까지 한니발의 전쟁 전술을 베껴서 전쟁을 치렀다. 한니발의 전술로 한니발 군대를 무찌른 것이다.

이것은 로마 역사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점령지 적국의 좋은 점이 있으면 그것을 곧바로 모사하여 ‘로마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된 것도 그런 이유이다. 이렇듯 로마를 최고의 국가로 만든 것은 타문화 수용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며 이민족이나 식민지 노예라 하더라도 국가에 기여하면 시민권을 주고, 황제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05.jpg
속주 징세관집안 출신 베스파시아누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의 통합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의리’ ‘국가의 구심(황제)’ ‘국가의 종교’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문화 국가 로마가 천년제국을 유지하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이었다. 이러한 로마인의 정신에 대해 로마의 불세출의 영웅인 카이사르와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우리 로마인은 다른 종족들에게 뛰어난 관습이 있다면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는 삼니움인에게서 배우고 권위를 표시하는 상징물은 에트루리아인에게서 배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다른 자들의 뛰어난 것을 시샘하기보다는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 카이사르

“우리 조상들은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는 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내의 모든 사람들, 모든 부족들이 시민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포강 너머에 살던 이탈리아 인들에게 시민권을 주었더니, 그들은 우리 군대에 자원하여 모자란 병력을 채워주었습니다.

뛰어난 전쟁 능력을 갖고 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왜 멸망했습니까? 그들이 정복한 자들을 이방인으로 배척했기 때문 아닙니까? 하지만, 노믈로스(로마 창설자)는 정복한 자들을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들은 금과 자산을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 로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하지만 로마는 종교와 권력 내부의 갈등으로 동・서로마로 나뉘게 되었다. 수도를 기독교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며 동・서로마로 갈리게 되었고, 서로마 지역은 게르만 등 다양한 이민족이 들어와 정착하는 곳이 되었다. 또 군대를 게르만 등 이민족들의 용병으로 대체함으로써 이민족에 대한 중앙권력의 통제력도 급속히 약화되었다.

또 노예의 생산에 의한 풍족한 생활로 귀족들과 시민들은 나태해졌고, 사치와 향락에 물들어갔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영토를 지키는 힘들고 위험한 군대와 전쟁은 이민족(게르만족) 용병들에게 맡겨졌다. 결국 황제마저도 이민족 용병출신 장군들이 마음대로 바꾸고 세우는 상황이 초래되었고 결국엔 게르만 용병출신 장군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06.jpg
팔라티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