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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묘에서

독립 공원이 되기까지

다사다난했던

효창공원


글, 사진.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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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 있는 의열사
 



서울시 용산구는 서울시 안에서도 조금 특이한 지역이다. 강북권에 속하지만 강남을 호가하는 부촌이 자리 잡고 있으며 반대로 서울의 달동네가 한 곳에 모여 있기도 하다. 지금은 떠나갔지만 오래 머물고 있었던 용산기지로 인해 외국인 거주 비율이 높은 곳이기도 한 이곳에 조금 특이한 공원이 있다. 바로 독립투사들을 품고 있는 효창공원이다.

정조의 사랑으로 시작
정조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군주이자 한 여인을 바라봤던 로맨티스트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의 소재가 될 정도로 회자된다. 하지만 임금의 사랑은 1786년 애절하게 끝나고 만다. 홍역을 앓았던 문효 세자가 그해 6월 세상을 떠났고 이후 시름시름 앓던 의빈 성씨마저 만삭의 몸으로 세상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정조에게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는 특별했다.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 정조는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며 기쁨을 표현할 정도였다. 그랬던 문효세자가 세상을 뜨자 정조는 묘를 가까이 두고자 했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고양율목동 언덕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0년 5월의 기록을 보면 정조가 문효세자의 묘지 후보였던 창릉과 강릉에 대해 “창릉의 갑좌와 강릉의 갑좌는, 하나는 웅장한 것을 취할 것이 없고 둘은 멀어서 흠이 됐다. 대체로 동교의 능원은 8, 9곳이기 때문에 매양 거둥할 때마다 비록 새벽에 궁을 나서더라도 반드시 밤이 되어 돌아왔다. 지금 만약 이곳을 쓰기로 정할 경우 하룻밤을 지내지 않는다면 두루 들를 수가 없다”라며 “비록 사세로 말하더라도 춘추로 성묘하는 이외에 이로 인하여 다시 한 번 더 거둥하게 된다면 많은 경비가 들 것”이라고 단점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도감 도제조 홍낙성은 “웅장한 형국은 취할 필요가 없고 사세상 편리하고 가까운 곳을 이왕 구하고자 할 경우 율목동보다 더 나은 곳이 없을 듯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정조는 율목동으로 택하기까지 세 번이나 걸음을 한 뒤에야 결정을 내렸다. 이를 통해 얼마나 정조가 첫 아들이었던 문효세자를 사랑했고 가까이 두고 싶어 했는지 그의 부정(父情)을 느낄 수 있다.

문효세자가 묻힌 율목동은 당시 솔숲이 울창하고 앞으로는 한강이 펼쳐져있는 길지였다.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가 모두 솔숲으로 울창했다. 삼고초려 끝에 문효세자의 묘 자리를 정한 정조는 직접 ‘효창(孝昌)’이라고 짓고 정자각 상량문(上樑文) 또한 친히 지었다. 이후 의빈 성씨가 죽자 문효세자가 묻힌 곳으로부터 100보정도 떨어진 왼쪽 산등성이 언덕에 묘를 만들었다. 모두 정조의 사랑에서 비롯됐다.

이후 효창묘에는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와 그의 소생이었던 영온옹주의 묘까지 자리를 잡았고 도성에서 가장 인접해있는 왕실묘역으로 조성됐다. 이를 1870년 고종이 효창묘에서 효창원으로 승격시켜 이름을 높였다. 하지만 국운이 다 하면서 효창원의 운명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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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묘역마저 우롱한 일제의 만행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연달아 겪으면서 서울은 일본에게 잠식당했다. 일본은 만리재 숲을 훼손하고 숙영지로 만들었으며 효창원 인근에 일본군 사령부와 철도 관사 등을 만들었다. 용산 경찰서장 잔치를 효창원 일대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열었다는 기사도 있을 정도였다.

이후 주권을 뺏은 일본은 1921년 6월 효창원 숲을 경성 최초의 골프장으로 만들었다. 문효세자의 묘에는 울타리가 세워졌고 그를 둘러싼 숲은 골프를 치러 온 사람들 발에 훼손됐다. 골프장은 1924년 폐장됐지만 일제는 더욱 악랄했다.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이왕직으로부터 무상 임대하는 방식으로 효창원의 절반을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왕실무덤이 공원으로 된 것이다.

공원에는 아동용 놀이시설이 들어서면서 유원지로 변했고 1940년에는 총독부 고시 208호로 효창원을 ‘효창공원’으로 고시했다. 거기다 1944년에는 침략전쟁의 희생자 충령탑을 세우기 위해 효창원의 모든 묘를 고양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시켰다. 서삼릉은 원칙적으로 임금과 정비의 능이 모인 곳이었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한 채 효창원의 묘를 옮겼다. 정조의 사랑으로 100보 남짓 거리에서 함께 있던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는 서삼릉으로 이장되면서 2㎞이상 떨어지게 됐다. 그렇게 정조의 사랑은 일제에게 처참히 밟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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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사 묘역
 


해방 후 독립투사의 품으로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효창공원은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됐다. 1945년 11월에 귀국한 김구는 효창공원에 독립 운동가들의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오늘날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 묘역’과 ‘임정요인 묘역’이다.

삼의사 묘역에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이봉창은 서울 용산이 고향이다.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924년 용산에서 금정청년회를 조직하면서 항일운동을 했다.

이후 일본에 넘어갔다가 1931년 중국 상하이로 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했고 1932년 1월 사쿠라다문 폭탄의거를 벌였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1908년 6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1930년에 만주로 망명했다.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에 입단했고 홍커우 공원에서 있었던 기념식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도시락 폭탄으로도 잘 알려진 이 사건으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가와바다 일본인 거류민단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노무라 중장, 우에다 중장 등이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윤봉길은 25살의 젊은 나이에 오사카 위수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형무소에서 차갑게 스러졌지만 그의 의거는 중국 장제스가 한인애국단에 협력하게 됐고 식어가던 독립운동에도 다시 불붙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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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요인 묘역
 


삼의사 묘역에서 조금은 낯설 수 있는 인물이 백정기 의사다. 백 의사는 189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무장 항쟁을 전개했고 이후 1920년대 이회영과 신채호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 길에 들어섰다.

노동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상해에서 5·30 총파업이 발생하자 중국인들과 함께 노동자운동을 전개해 10여만 명의 대노동자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1930년 북만주에서 비밀결사 조직인 자유혁명자연맹을 만들었고 1931년 한·중·일 무정부주의자들과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1933년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가 상하이 홍커우에 있었던 연회에 참석했을 때 이강훈, 원심창과 함께 습격하려다 붙잡혔다.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된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4년 6월에 순국했다.

이렇게 순국한 이들의 유골을 1946년 6월 일본에서 가져와 부산 태고사에 안치했고 7월 6일 효창원의 중심인 문효세자가 있었던 자리에 국민장으로 안장했다. 그리고 그 왼편으로는 아직 유골을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조성되어 있다. 언젠가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찾게 된다면 이곳으로 안장하겠다는 김구의 의지였다.

효창공원에는 삼의사 묘역 외에도 임정요인 묘역이 또 있다. 문효세자의 생모였던 의빈 성씨가 안장되었던 장소로 이동녕과 치리석, 조성환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석오 이동녕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제1대의장이기도 했다. 이후 임시정부 여러 요직에 있으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주석으로 있던 도중 1940년 급성폐렴으로 쓰촨성에서 죽었다. 차리석은 광복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 또는 국무위원회 비서장으로 함께했다. 하지만 광복이 된 직후 1945년 9월 9일 광복의 기쁨을 다 느끼지 못한 채 중경임시 정부 청사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이에 김구는 이동녕과 치리석의 유해를 가져와 1948년 정부 수립 후 사회장으로 추모했으며 지금의 자리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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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 있는 의열사에는 독립 운동가 7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또 함께 있는 조성환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도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조국에 돌아왔으나 1948년 10월 7일에 서거했다. 김구의 주도 아래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후 이동녕, 치리석과 함께 임정요인 묘역에 묻혔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을 구상하던 김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두희의 암살로 1949년에 서거한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효창공원 서쪽에 안장됐다. 하지만 김구 서거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독립 운동가들의 묘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이승만 정부는 시민들의 효창공원 참배를 막았고 있었던 묘소마저 이장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지금 효창공원 옆에는 효창운동장이 있는데 이와 같은 운동장을 짓기 위해 독립 운동가들의 묘소를 이장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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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 있는 백범 김구의 묘
 


다사다난했던 효창공원
당시 10만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육상경기장을 설립하기 위해 1956년 5월 첫 삽을 뜨려 했으나 효창공원선열보존회(보존회)의 반발에 부딪혀 공사는 중단됐다. 당시 보존회 회장이었던 김창숙은 <동아일보>에 ‘효창공원을 통곡함’이란 한시를 지으면서 강하게 비판했고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까지 국회에서 반대 결의안을 내면서 공사는 겨우 중단됐다.

하지만 서울시는 1959년 2월 제2회 아시아 축구대회 개최를 이유로 아시안컵 축구대회 전용 경기장을 만들려 하자 보존회는 다시들고 일어섰다. 결국 정부와 보존회는 묘소와 일정한 간격을 띄우고 운동장을 만든다는 조건 하에 공사를 합의했고 효창운동장은 1960년 10월에 준공됐다. 당시 효창운동장은 국내 최초의 국제규격축구장으로 지어졌으며 지난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이후로도 효창공원은 다사다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반공기념탑, 테니스장 등을 세웠고 골프장을 조성하려고도 했다. 또 어린이 놀이터와 원효대사 동상도 세워지면서 효창공원의 정체성은 모호해져 갔다. 게다가 1972년에는 묘지 진입로와 돌계단을 설치하면서 조성사업도 함께했는데 이때부터 공원 출입이 금지됐다.

1982년이 되어서야 재개방된 효창공원은 1989년 6월 8일 사적 제330호로 지정됐고 그해 11월에 의열사와 창열문이 건립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오늘날 정치인들이 효창공원에 와 참배하는 것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시정부와 김구를 부각시켰고 1998년에는 백범기념관 건립지원을 약속했다. 약속된 백범기념관은 2002년 10월 22일에 개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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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반공투사위령탑
 


효창공원에서 만난 인근 주민 김은정(30대,여)씨는 “자주 효창공원에 산책하러 오지만 사실 묘역은 신경 쓰지 않는다. 눈으로 독립 운동가들의 묘를 직접 보지만 와 닿지 않는다”면서 “효창공원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 됐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효창공원은 7명의 독립 운동가들을 품고 있음에도 시민들에게는 ‘사적’인 성격보다 ‘근린공원’의 성격이 더 강했다.

하지만 서울시가 오는 2024년까지 ‘독립운동 기념공원’으로 바꾸기 위해 2021년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지난해 밝혔다. 이를 통해 묘역 주변은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됨과 동시에 기념일에는 추모공간으로 변하는 ‘일상 속 성소’로 갖출 예정이다.

정조의 사랑으로 시작된 효창공원. 이제는 도심 속에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옛 것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나아가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대표적인 공원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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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기념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