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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머나먼 귀환의 길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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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2일 일본에서 부산으로 귀국하는 동포들의 모습. 일부는 맨발이다. (출처:국사편찬위 우리역사넷)
 



해방과 해외동포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본 히로히토 천왕의 항복 성명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을 때 해외에는 약 500만 이상의 한국민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220만, 만주를 포함한 중국 전역에 250만, 기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지역에 일제의 강제동원이나 취업 또는 사업을 위하여 해외에 나갔던 사람들이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조국으로 돌아가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었으나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더구나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에 휩싸였고, 만주·사할린은 소련에, 일본은 미국에 점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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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배편으로 인천항으로 들어온 귀환 동포들이 1946년 6월 5일 임시수용소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제공:미국 국립문서관, 정용욱 교수)
 



중경 임시정부
“중경 시내에 나갔다가 갑자기 전 시가에 폭죽과 환호성이 터졌다. 웬일인가 의아하여 폭죽을 터뜨리던 사람에게 물었다. 자기도 모르겠다고, ‘다른 집에서 딱총을 터뜨리기에 자기도 따라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마침 호외 한 장을 사보니 일인이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대호활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기뻐서 정부로 뛰어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하루 바삐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불같았다.”

중경에서 해방을 맞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비서실장) 겸 외무차장이었던 민필호의 회고담이다. 해방이 됐지만 임시정부로서도 언제 귀국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김구 주석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전보를 치게 했다.

“임시정부 영수 자격으로 미군을 따라 먼저 입국하시지요. 나는 이곳에서 임시의정원을 소집하여 주석직을 사직하는 한편 그대를 임정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본국으로 통보하겠소이다.”

이승만은 이미 귀국 도중에 있다는 연락이왔다.

사흘 후인 8월 18일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이 미군의 협조를 받아 선발대원 4명을 이끌고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총부리를 겨누고 “아직 항복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돌아가라!”며 상륙을 허용하지 않아 24시간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김구 주석은 중국 장제스(蔣介石) 주석에게 귀국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면담을 신청했다. 두 달이 지나도 회답이 없었다. 중국 당국은 미국의 태도를 살피느라 면담날짜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에 진주한 미 군정장관 하지가 임시정부에 대해 개인자격으로 귀국을 허용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나서야 장제스 주석은 김구 주석을 만나 주었다.

김구 주석은 중국 당국이 중국 내 일본인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할 때 일본인과 함께 취급하지 말 것과 한국인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귀국한 후 임시정부 요인 일부를 중국에 남겨 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게 하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 송환지원 문제가 합의됐다. 일본과 한국 군인과 민간인을 중국 항구까지 수송책임은 중국이, 중국 항구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수송은 미 제7함대가 맡기로 했다. 전후의 혼란 속에서 중경에서 상해로 가는 수송수단을 확보하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임정이 잔류시켜 놓은 주화대표단의 천신만고의 노력과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난제들이 하나씩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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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환하는 재일동포들
 


종전이 되자 화중 화북, 화남지역에서는 중국 군경이나 인민들이 교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학대했다. 귀환시 1인당 휴대품은 15kg으로 제한했다. 고생하여 모은 전 재산을 놓고 빈 몸으로 지붕 없는 열차에 태워져 밤낮을 차 위에서 비를 맞으며 콩나물처럼 서서 항구까지 가야 했다. 열차가 쉴 때면 철로 연변의 군경이나 강도가 올라와서 약탈과 구타를 일삼는다는 보고가 각지로부터 임시정부의 주화대표단에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왔다. 중국정부에 조처를 요청했으나, 중국 당국으로서도 전후 혼란으로 중앙에서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아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임정 주화대표단의 노력으로 1인 15kg으로 제한되었던 한국 동포들의 휴대품은 60kg으로 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중국인들이 일본인보다 한국인을 더 미워하는 현상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일본인들 밑에서 악역을 대신 떠맡다보니 그 영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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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
 


7개월 걸려 중경 동포들을 모두 귀환시킨 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은 남경으로 본부를 옮겼다. 국민당 정부가 지원하는 매월 1000만원(元)으로는 나날이 오르는 물가와 떨어지는 화폐가치 때문에 남은 가족 30여 명의 매월 생활비, 사무실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주화대표단 부단장 민필호는 또다시 중국 측에 경제적 도움을 받기가 부끄러웠다.

그는 장제스 주석에게 소금 5만 톤을 원가로 한국에 세금 없이 수출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여, 그중 2000톤의 한국 수출 권리를 중국 상인 장자량(張子良)에게 주고 대금 6억 원을 미리 받아 이 돈 가운데 1억 5000만원으로 남경 시내에 양옥 하나를 얻어 주화 대표단 사무실을 열었다. 남은 돈은 본국에 정식 정부가 설 때까지 매월의 경비로 저축해 두고 중국 측으로부터 매달 받는 경제 지원은 사절하였다.


만주, 기타지역 동포
1947년 만주의 동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 외교부 당국으로부터 외국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며 추방 통보를 받았다. 주화대표단은 중국 당국과 담판을 벌였다. 한국인들이 중국 국적을 얻어 토지를 매입하였으므로 법적 문제가 없으며, 한인들은 만주에 논농사를 개척하여 쌀을 대량 생산하게 하였으며, 두 민족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를 뿌렸으므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남중국해의 해남도에는 우수한 품질의 자철광산이 있었다. 일제는 전시물자 확보를 위해 국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수형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철광산 노역을 시켰다. 이것은 국제법상 불법이었다. 종전이 되자 불법노역을 은폐하기 위해 일제는 1000여 명에 달하는 강제 동원 한인 수형자들을 집단 학살하여 매장했다.



소련군 포로의
시베리아 강제노역과 귀환

소련이 만주를 점령하자 일본군 64만 명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중에는 일본군에 징집되었던 한국인들도 1만에서 1만 5000명이 있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끌려갈 때 이들도 일본군과 같이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이런 동포들은 3년 4개월을 시베리아 혹한과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일본 정부가 억류 일본군의 송환을 추진하는 1948년 말에야 귀환하게 됐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군의 송환배를 타고 일본을 통하여 왔다. 다른 2161명은 흥남항에 내렸는데, 남한이 고향인 500명은 흥남에서 걸어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왔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남은 사람도 있었다.


재일동포의 귀환
일본에는 해방 당시에 220만의 동포가 있었다. 해방 후 1946년 3월까지 135만 명의 재일동포가 자유 귀국을 했다. 1946년 이후 일본정부는 개인당 1000엔을 초과하는 현금과 화물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60여만 명은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남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사할린에 강제 동원됐던 동포들도 전후 사할린이 소련 영토가 되면서 귀국이 원천 봉쇄됐다.

일본에서 귀국하고자 하는 동포들이 부산의 맞은편, 야마구치현 센자키(仙崎), 하카다(博多)항으로 몰려들었다. 관부 연락선의 관문 시모노세키(下關)항은 전쟁 중 미군이 투하한 기뢰로 큰 배가 다닐 수 없었다. 센자키항은 부두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외항의 부산으로 가는 큰 배까지 1500톤짜리와 400톤짜리 작은 배가 승객을 실어 날라야 했다. 군함이나 민간 배가 부산에서 일본 군인과 민간인을 태워 오면 다시 돌아갈 때 재일동포 귀환민들을 태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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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에 도착한 해외동포 귀환선과 환영 인파(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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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인천항에서 귀환 동포들에게 미군이 디디티 방역을 하고 있는 모습(제공:미국 국립문서관, 정용욱 교수)
 


센자키와 부산을 오가는 7000톤급 흥안호(興安丸)는 1400명 정원이었으나 5000명에서 7000명을 태웠다. 1945년 8월 31일 첫 귀환선이 출항했다. 이후 33만 명이 이 배를 타고 귀국했다.

귀환하는 배를 기다리는 한인들은 부두 근처의 반도인수용소라는 가건물에 묵으면서 최소한 1주일 이상 기다려야 귀국선을 탈 수 있었다. 기상 악화로 배가 출항하지 못하면 수용소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길에서 노숙하는 한국인들이 1만 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

야마구치현(山口縣)의 재일조선인연맹은 그해 9월 청년 30여 명을 중심으로 조선인구 호회를 조직하고 일본 지방행정기관과 긴밀히 협력하여 귀환동포들의 서류작성, 급식과 안내의 편의를 제공했다. 그해 11월까지 3달간 20만 4697명을 질서 있게 귀환하도록 도왔다.

1945년 9월 17일 마쿠라자키(枕崎) 태풍이 상륙하자 귀국을 포기하는 동포들이 많이 생겨났다. 연락선을 타기가 어려웠으므로 개별적으로 작은 배의 세를 내어 귀환하는 동포들도 많았다. 그런 이들은 태풍으로 조난을 당하거나 해적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다음은 작은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넜던 동포의 회고이다.

“귀국하기 위해 어렵게 130원을 구해 함경도 원산 고기잡이 배를 탔다. 50톤 배에 100여 명이나 탔다. 대마도에서 하루 저녁 자는데 배가 고파서 풀뿌리를 뽑아 씹었다. 파도가 때리면 배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우리앞에 여러 채가 파선되어 사라졌다. 다행히 우리는 살아나왔다.(김기철 증언, 독립기념관 구술자료, 2001. 11. 18)”

해방은 500만 동포의 귀환이라는 큰 숙제를 안겼다. 임시정부는 주화대표단을 남겨서 중국내 동포들의 귀환을 도왔다. 야마구치현(山口縣)의 재일조선인 30여 청년들이 3개월 동안 20만 5000명 가까운 동포를 안전하게 귀환하게 봉사한 일은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07.jpg광복 70주년 기념 해방귀국선 재현(2015년 8월 14일)(출처: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