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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헌장,

우리나라 첫 헌법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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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 개원(1948)
 


망국사태와 구 집권세력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었다. 5000년 오랜 역사, 훈민정음과 거북선을 발명한 찬란한 문화민족으로 자부해왔던 한국민은 졸지에 나라 없는 민족, 국가 없는 국민이 되었다. 동시에 ‘국가란 통치자와 집권세력이 잘못하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도 있다’는 황당한 현실을 마주했다. 그것은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국가 체제를 이어오며 살아온 나라 국민으로서는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요,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자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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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고종) 황제
 


노회한 일본 침략자들은 조선말의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운동의 발발(1894)과 대한제국기의 만민공동회의 의회설립 요구(1898) 등 몇 차례 위기국면에서 황제와 집권 특권층들이 국가의 운명보다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 유지에 더 관심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병합 방침을 이미 결정해 놓은 일제는 그 틈새를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1910년 8월 22일의 ‘병합조약’에 그 점이 집중 반영되어 있다. 병합조약의 제1조와 제2조를 통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넘기고 받음을 규정한 다음, 대한제국 구 통치자와 특권층에 대해 안전과 재산, 특권적 지위를 확실하게 보장하겠다는 것을 병합조약 7개조중 제3, 4, 5조와 7조의 4개 조항을 할애하여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 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즉 병합조약은 집권층과 국민을 분리하고, 나라를 넘겨받는 대신 구 집권층의 특권을 보장하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대한제국 황제와 집권층으로부터 국권을 넘겨받는 데 성공했다.

   
망국 사태 속에서 싹튼
국민 주권의식


망국 5년 전인 1905년 대한제국 집권층의 반역적 매국행위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만든 을사조약 때부터 망국은 현실로 다가왔다. 바로 그때 밑바닥의 민중과 해외의 노동이민자들 사이에서 이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제 이 나라는 우리가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쓰러져가는 나라, 명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나라를 구해 내는 일은 황제와 집권층에 기대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구한국 체제하에서 어떤 특권도 누리지 못한 민중이 나라를 지키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자신들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국민 주권의 대한민국 역사는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민초들이 나서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망국사태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의한 순절 의열사들, 의병을 일으킨 지방 유생, 산간의 포수들이 그들이었고, 애국계몽운동,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만주와 연해주 무장투쟁 등이 그런 운동이었다.

한국민은 나라는 잃음으로써 국가의 주인의식을 갖게 되었고, 독립운동을 통해 스스로 주인임을 입증했다. 그 독립운동의 절정은 일제 압제 10년 만에 터진 1919년 3·1운동이었다. 시키는 사람, 어느 중심적 조직의 지도 없이 남녀노소가 스스로 참여하고 서로 연대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만들어갔다.

전국에서 그해 5월까지 이어진 시위운동을 통해 국가공동체에 대한 자유시민의 주인의식이 낮의 해, 밤의 달처럼 밝게 빛났다. 그런 용감한 자유정신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육로로 해로로 국제자유도시 상해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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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하이 1920년대 최고 번화가 남경로, 우)상하이 황포강에서 본 시가지
 


임시정부 구성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 중화민국 상해시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위치한 2층 양옥에 29명의 망명 지사들이 모였다. 망명 지사들은 이동녕(李東寧)과 서울정동교회 목사였던 손정도(孫貞道)를 의장과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이 회의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라 이름하였다. 회의첫 의제는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것이었다.

서울의 한성정부 인정 여부로 장시간 논의를 지속하다가 자정을 넘겼다. 이에 먼저 국호에 대해 대한민국이라 하자는 신석우(申錫雨)의 동의와 이영근(李渶根)의 재청이 가결되었다. 다음으로 집정 관제를 총리제로 결의하고, 국무총리는 한성(서울)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승만(李承晩)으로 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조완구(趙琬九)의 재청이 있었다. 신채호(申采浩)가 전에 위임통치를 주장했다며 이승만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이승만 외에 별도의 3인을 추천하여 2/3 가결로 정하기로 했다. 조소앙은 박영효(朴泳孝)를, 신채호는 박용만(朴容萬)을, 김동삼(金東三)은 이상재(李商在)를 추천했으나 각각 부결되었다. 현창운(玄彰運)은 신채호를 추천했다. 그러나 부결되었다. 신채호는 화를 내며 회의장을 떠났다.

그 후 여운형(呂運亨)이 안창호를, 신석우는 이동녕을 추천하여 가결되었고 조성환(曹成煥)·김규식(金奎植)·이회영(李會榮)은 각각 추천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이에 추천을 중단하고 추천된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세사람 중에서 무기명 투표로 국무총리 선거를 하였는데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정과 선포
이어 헌법에 해당하는 10개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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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사용하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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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사용하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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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부터 시계방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제2대 대통령 박은식,
3대 국무령 김구, 2대 국무령 홍진, 초대 국무령 이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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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헌장의 첫머리에서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의 주인은 왕이나 황제가 아니라 국민이며(민주), 통치자의 지위를 아버지에서 아들, 손자로 대를 이어지는 세습이나 왕이나 황제가 통치하는 전제왕정을 부정하고 국민이 지도자를 뽑는 ‘공화정’을 선포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의 새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선언이었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
두 번째 조항은 비록 국권을 잃어 해외에 임시정부를 세우지만,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와 같은 임시의정원의 심의와 결의를 통해 정부가 통치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을 선언하였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세 번째는 새로운 국민의 나라는 남존여비와 같은 낡은 제도나 관습,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차별을 거부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계급을 부정하며 국민이 모두 평등함을 선언했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
이 조항은 앞서의 국민 평등원칙에 따라 국민이 신체적 자유, 소유의 자유, 거주와 활동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유사회를 선포했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공화제는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하고, 자신도 지도자로 선출될 수 있는 체제이다. 제5조를 통해 이전의 조선-대한제국과 완전히 선을 긋는 새로운 민주국가의 출범을 확고히 했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국가는 사실 구성원들이 헌법이라는 약속에 의해 유지되는 가공의 조직체이다. 국가는 국민이 국민 노릇을 하지 않거나 제대로 못하면 존립할 수 없는 생명체이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 국민은 교육을 받아 공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며, 소득을 얻어 자립하면서 세금을 내고, 국가를 지키는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함을 명시하였다.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이와 같이 자유의 원칙, 공화제 정치,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바로 선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것이다. 국제연맹 가입은 일본과 같이 세계평화를 교란하는 전체주의 국가에 대항하여 세계평화를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한다.
임시정부가 구황실을 우대한다고 한 것은 국민과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과거를 무조건 단절의 대상으로만 인식하지 않음으로써 당면한 국권회복과 독립이라는 지상과제에 집중하고자 한 것일 것이다.
제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부 폐지한다.
새로운 공화국은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사형제나 신체의 일부나 전부를 손상하는 비인도적 형벌, 인간의 고귀한 생명 탄생과 관련된 것을 상품화하는 것을 반대했다.
제10조 임시 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그리고 광복을 맞게 되면 그 1년 안에 국회를 소집하도록 규정하여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이 중단 없이 이어지도록 규정하였다.

7월 17일은 제헌절이다. 제헌절을 맞을 때마다 대한민국은 헌법이라는 약속 위에 존재하는 공동체이며 그 시작이 3·1운동과 상해의 제1회 임시의정원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