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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과 어린이날

3・1운동 이후 허무의 광야에

‘어린이’라는 희망나무를 심다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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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어린이날 포스터
 


100돌 맞은 ‘어린이’란 말
‘어린이’란 말은 꼭 100년 전 어린이 운동가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선생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20년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종합 월간지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불 켜는 이>를 발표하면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썼다. 어린 아동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평생 노력한 문화운동의 첫발이었다. 그 전에도 아이를 애지중지(愛之重之: 매우 사랑하고 귀하게 여김)하고, 금지옥엽(金枝玉葉: 금 가지와 옥 잎)같이 귀하게 여기는 문화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통은 ‘아이’ ‘애’ ‘애들’이라 했고, 삶이 고달픈 사람들은 ‘애새끼’라고 거칠게 표현하기도 했다. 심한 경우, 자기 아이들에게도 어려운 삶에 짐만 된다는 의미로 ‘애물’ ‘애물단지’ ‘애무래기’라고 하기도 했었다.

유교는 원래 고급스러운 예(禮)의 사상이요 문화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계급문화로 자리잡음에 따라 양반과 상민, 문반과 무반, 적자와 서자, 남자와 여자, 양민어른과 아이를 구별하는 서열문화, 계급문화, 차별문화가 형성되었다. 그중에 장유유서(長幼有序)라 하여 어른과 어린 사람 사이에 서열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아이들을 무시하는 병폐를 낳았다. ‘애들’ ‘애새끼’ 같은 말에는 어린이를 어른의 종속물로 볼 뿐, 한 인간으로서 영혼의 고귀성, 인격의 독립성, 타고난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았다.

사람을 계급과 성별, 나이 등에 따라 차별하는 가치관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은 1860년 4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이 동학사상을 창도하면서부터였다. 동학에서는 ‘인시천(人是天)’ 또는 ‘인내천(人乃天)’이라 하여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린 아이도 곧 하느님”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어린이 운동을 주도한 방정환이 천도교인이었고, 천도교가 앞장서서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이기도 하여 열정적인 어린이 운동에 천도교가 큰 뒷받침이 되었다.

방정환의 생애와 어린이 운동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의 아주개(종로구 당주동)에서 아버지 방경수와 어머니 손씨 사이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이 쌀가게를 하여 큰 기와집 두 채를 터서 살았을 만큼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아홉 살 때 집안이 망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인쇄소 직공으로 일하여 끼니를 이어가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방정환은 1909년 만 10살이 되어서야 서울 매동보통 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했다. 집안은 기울었어도 방정환은 명랑하고 활달하였으며, 뛰어난 재주꾼이었다. 학교의 소년입지회라는 모임에서 8~9명의 학생들이 모여 주제를 놓고 토론회를 열었는데, 방정환이 총대장을 하면서 모임의 규모가 160여 명으로 커졌다. 12살 때 방정환은 학교의 대운동회, 대한문 경축행사, 성북동 밤 줍기 행사 등을 나서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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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유광열 등이 발간한 잡지 <신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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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잡지 <신청년(新靑年)> 3호
 


1913년 사업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상업공부에 뜻이 맞지 않았다. 졸업을 1년 앞두고 자퇴한 그는 1915년 토지조사국에 문서를 정서하는 사자생(寫字生)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것이 마땅치 않아 곧 그만 두었다. 방정환은 그곳에서 만난 친구 유광열과 이복원, 이충각 등의 청년들과 1917년 경성청년구락부라는 모임을 결성하여 친목모임과 다양한 문화행사와 활동을 펼쳤다.

1917년 그해 방정환은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천도교 지도자 권병덕의 천거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했다. 방정환은 자신이 꿈꾸는 일들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린이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맘껏 불태울 수 있게 되었다. 1918년(19세) 첫 아들 운용을 얻고, 손병희가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919년 1월 20일 경성청년구락부의 기관지 <신청년> 창간호를 발간했다.

1919년 장인 손병희가 주도한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청년구락부 회원들을 이끌고 거리로 나가 <조선독립신문>을 배포했다.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한 천도교 보성사 임직원들이 체포되고, 인쇄소가 폐쇄되자 방정환은 유광열과 함께 후속 <조선독립신문>을 등사판으로 제작하여 청년구락부 부원들과 나가 비밀리에 배포했다. 그의 집에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 방정환은 일주일 동안이나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일제강점기에서 조선 사람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고, ‘이 땅의 소년소녀들을 바르게 키우는 일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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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8월 잡지 <개벽사> 직원들의 폐간 항의 사진. 가운데가 방정환(출처: 독립기념관)
 

1920년 9월 방정환은 개벽사의 동경 특파원과 천도교 청년회 동경지회 회장 직분을 띠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동경에서 체계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1년 김기전(金起田), 이정호(李定鎬) 등과 함께 천도교 청년회 안의 소년회를 천도교 소년회로 발전시켰다. 이후 어린이를 위한 표어 제작, 경어사용 권장, 각종 계몽운동, 강연회 개최 등 다양한 운동을 벌여 나갔다. 1921년 4월 도요대학에 신설된 문화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철학과 신문화, 아동 문학,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하였다. 일본 경찰은 유학생 방정환을 감시했다.

1920~1923년의 유학 기간 동안 방정환은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수필, 번역동화, 풍자기 등을 발표하였다. 방정환은 어린이들에게 변변한 읽을거리가 없는 현실을 보고 <산드룡의 유리구두(신데렐라)> <잠자는 왕녀(잠자는 숲속의 공주)> <왕자와 제비(행복한 왕자)> 등 세계명작 동화 10편을 번역 번안하여 <사랑의 선물>이란 이름으로 1922년 7월 7일 개벽사에서 발간했다. 이 책은 5만 4000부가 나갈 만큼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사랑을 받았다.

1923년 3월 20일 한국 최초의 아동을 위한 월간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18명이 신청할 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다. 방정환은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동화구연을 하러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매년 70회, 통산 1000회 이상의 동화구연을 했다. 그는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재미있는 구연동화로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잡지를 선전했다. <어린이>는 이후 매월 10만부를 발행할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이 잡지는 마해송, 고한승, 정순철, 윤극영뿐 아니라, 독자였던 이원수, 윤석중, 윤복진, 최순애 등이 작품을 투고하면서 한국 아동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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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1일 색동회 창립기념 사진(도쿄 미와사진관에서)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뒷줄 왼쪽부터 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 (제공: 독립기념관)
 



1923년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고 어린이날을 정하였다. 1927년에는 불교소년회 등 어린이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소년연합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는 동안 <형제별>등의 동요·동화·모험 탐정소설인 <칠칠단의 비밀> 소년 소설, 아동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 소개에 힘썼다. 1928년에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었다.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잡지 개벽사와, 색동회 등 어린이 단체운영, 각종 모임과 강연회 등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931년 7월 23일 향년 31세에 별세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와 도쿄에서 색동회를 함께했던 동지 이정호는 그의 1주기를 맞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동화 순회를 다니다가 지방 어린이 애독자의 딱한 정경을 보고는 불러 올려다가 이곳저곳에 취직을 시키어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길거리에서 기한(飢寒)에 우는 불쌍한 어린 ‘룸펜(거지)’에게 자기의 주머니를 털어 바치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어린 사람이라면 그 급을 가리지 않고 한 결같이 자애롭게 굴어준 조선의 ‘페스탈롯치’였다.”

“또 그이의 동화는 어린 사람의 심성을 좌우하고도 남을만하였다. 울리고 웃기는 것을 자기의 음성과 표정 하나로 좌우하는 천재적 변설가였다. 그리하여 연단을 거치어 또는 방송국의 ‘마이크로폰’을 통하여 조선의 어린 사람들을 얼마나 울리고 웃기었는지 그 수를 헤일 수가 없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 방면에 대한 연구와 조예가 컸다.”

“어린이날 기념 때에는 밤을 며칠씩이나 새이다시피 하여 정작 당일에 가서는 연단에서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조선의 어린 대중이여! 복되게 잘 크소서. 잘 자라소서!’를 몇 번이나 불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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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방정환 선생 장례식 우) 방정환 선생 아래) 방정환 사망 기사(매일신보, 1931년 7월 25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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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사망 기사
(매일신보, 1931년 7월 25일, 2면)
 


어린이를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절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31살의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가 남긴 어린이에 대한 사랑은 어린이날로 남아 오늘에 이른다.

어린이날
어린이날은 1923년 색동회가 조직될 때 5월 1일로 전했다. 그 후 전국의 소년단체를 연결하는 연맹체로 경성소년연맹을 조직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금지조치로 이루지 못하다가 1925년 5월에 반도소년회・천도교소년회・불교소년회・새벗회・명진소년회・선명소년회・중앙기독소년부 등 단체가 연합하여 경성소년단체의 연맹으로서 5월회를 조직했을 때 5월 1일이 노동절과 겹쳐 어린이날을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다. 이 또한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1946년 다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1961년 제정된 ‘아동복지법’에서는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명시하였고, 1975년부터 공휴일로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