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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게 오는 봄

"씨알의 소리"


글.사진 서상진 세계잡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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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코로나19와의 전쟁이 3차 세계대전을 대신할 만한 요즘이다. 저녁이면 새로 증가한 환자의 수에 눈을 주고, 아침이면 어젯밤 보았던 그 숫자를 기억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수시로 화면을 켜서 보는 확진자와 사망자, 발생자로 흡사 전시상황 같은 하루하루다. 급기야는 세계보건기구(WHO)도 팬데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라는 체화된 믿음은 어느 날인가 누군가에 의해 백신이 발견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루하루를 스스로 자가격리된 상태에서 지내고 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포유류 중의 어느 종도 이뤄내지 못했던 협력과 신뢰라는 믿음에 금이 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있다. 그러면서 낯선 이의 얼굴을 보면서 드는 그의 행선지에 대한 막연한 의구심이 이미 호기심을 앞질러 버린 현상을 언제까지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한다.

종교도 이념도 체제도 그 어느 것도 개인의 자유를 대신할 수 없는 이 시대, 4·19 혁명이 있은지 60년이 지나는 올해의 그날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여 년 전 마침 부산에 갈 일이 있어 민주공원에서 일하는 분에게 민주공원에 대한 안내를 받은 적이 있다. 공원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시내는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고 민주공원은 꽃과 나무와 공원을 찾는 사람들로 인해 아주 ‘민주적인’ 휴식공간이 되어 있었다. 상설전시장을 돌아보고 나오니 한 무리의 여대생들이 공원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가 나더러 셔터를 눌러 달란다.

“과 숙제거든요. 민주공원 가서 리포트 써내는 거라서 인증샷이 필요해서요.” 그래서 그렇게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그네들은 정작 전시관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다시 우르르 몰려 내려가 버렸다.

“저 애들 리포트는 어떻게 쓰나?”하는 내 말에 옆에서 아내가 그런다.

“인터넷 뒤지면 다 나오는걸 뭐. 그리고 부산 애들이면 한 번쯤은 와보지 않았겠어? 요즘 저 나이만 돼도 몰라. 열사들 덕분에 자기들이 편히 사는 걸 모른다고. 몰라서 행복한 아이들인 거지. 오래전에 조선대에서 우리 옷 강좌를 받고 차를 얻어 타고 충장로를 오는데 함께 탄 젊은 애가 5·18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야. 그때 같이 탔던 언니 또래들이 얼마나 그 애들을 뭐라 하는지 옆에서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어. 그 언니들이 지금 저애들한테 그랬다면 아마 어림없을 걸? 그래도 그때 애들은 죽는 시늉이라도 해보이드만. 하기야 거기가 광주였으니 가능한 장면이었을 거야.”

“부산도 광주 못지않은 민주의 땅이라오. 부인.”

전시관 안내를 받으며 내가 가진 민주화 혁명의 무기로 쓰였던 대자보를 모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말>지 같은 책들을 그때 거리에서 나누어 주었어요. 나는 데모와 시위현장의 대자보나 포스터 같은 걸 손에 넣으려고 쫓아다녔지요. 그런 걸 손에 넣은 날은 지하철을 타지 않고 버스를 탔어요. 나는 거의 검문도 안 당했어요. 사실 나 같은 놈은 쳐다보지도 않았죠. 학생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차림새가 말쑥한 직장인도 아니고.”

그리고 이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억류당한 사이 그날은 지나가고 있다. 그래도 4·19가 되면 한 번씩 펼쳐보곤 했던 책이었는데, 운동권도 될 수 없었던 그 시절의 피 끓던 나이였기에….

비가 온다. 비가 오는 날의 감상도 예전과 좀 다르다. 바이러스도 숨죽이고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이 3월이니까 4월에는 그 양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잠시 <씨알의 소리>를 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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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4월 20일 창간된 잡지 <말씀>은
함석헌 선생의 1인 개인 잡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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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창간호 판권란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
“먼저 어떻게 잡지를 내게 된 경로부터 이야기합시다. 내가 자진했다기보다는 친구들의 몰아침에 못 견디어 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일을 비록 좋은 일이라도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억지로 하면 좋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남들이 주간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는 그것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63년경입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점점 복잡해가는 마스콤 시대에 사람들은 긴 논문을 읽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요, 한 달에 한 번 가지고는 시대의 요구에 응할 수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 이상야릇한 법을 만들어서 굉장한 시설과 자금이 없이는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몇 분 할 만한 이들을 모아 <말씀>보다는 좀 더 넓고 교양적이요, <사상계>보다는 좀 더 민중적인 것을 내보려고 하는 때에 회오리바람이 일어났습니다.”

월남파병과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결국 씨알은 뿌려졌다. 1970년 4월 19일, 4·19 학생혁명 10주년이 되던 해 <씨알의 소리>는 창간된다. 그러나 겨우 2호를 내고 박정희 군사정권으로부터 등록처분취소라는 통보를 받는다. 계약된 인쇄소에서 인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인권변호사인 이병린의 무료변론으로 13개월에 걸친 긴 싸움이 시작된다.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던 날 ‘법원이 아주 죽지는 않았다’라는 복간호 3호가 1971년 8월 다시 나온다.

“그럴수록 기대되는 것은 지식인인데 그 지식인들은 왼통 뼈가 빠졌습니다. 이상합니다. 학문이란 다 서양서 배운 것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양역사하면 민권투쟁의 역사요, 서양의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을 하나도 실천하려 하지 않을까?”라고 묻던 창간사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이병린의 변론으로 복간할 수 있었다.

사법부와 투쟁한 긴 시간 속에서도 ‘폐간 중에 드리는 소식’을 4번 발행하여 정기독자들에게만 보낸다. 복간호부터는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가 수석편집위원으로 힘을 싣게 된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95호(1980년 7월)까지 펜을 놓지 않으려 저항을 하지만 결국 전두환 군사정권에게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강제 폐간당하기에 이른다. 잡지 자체의 발행역사가 험난한 민주화의 여정을 읽게 만드는 책이다. 88올림픽의 무드로 88년 12월 96호로 다시 씁쓸한 복간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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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된 후 정기독자에게만 보냈던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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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복간호(1971년 8월호)
 


나는 왜 이 잡지를 다시 읽나?
당시 최고부수 1만 2000부, 최하는 1000부 발행했다 하는 것은 거의 경이에 가깝다. 민주화의 일선에 서거나 운동권이 아니었어도 가슴에 단단한 띠를 조여 맨 듯한 그 시대에 진보 잡지는 광고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다. 있다 해도 글쟁이들의 책 광고였고 공짜광고라고 회고되어 있다. 순전히 잡지를 팔아서 운영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95호까지 숨을 이어왔음은 소리 없는 독자들의 응원이었을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책머리에서 4월은 씨알이 아구 트는 달이라 하셨다. 나는 이 책을 96호까지 가지고 있는데 아무 데도 소속되지 못하여 피 끓는 현장에 함께하지 못했던 전태일 만큼의 외로움을 추억하며 읽곤 하는데 오늘은 함석헌 선생님께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다.

“지금 하늘나라에서 이 시대를 보시고 계신다면 벌떡 일어나 다시 <씨알의 소리>를 복간하시지 않을까요? 씨알의 눈이요, 입이라고, 예수·공자·석가가 섰던 자리에 있는 것이 신문이라던 외침을 거둬들이고 다시 씨알을 뿌리시지 않을까요?”

“씨저 죽는 것을 배웠다면 오늘의 씨저도 죽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다면 민중의 앞장을 서야 할 것이 아닙니까? 소크라테스, 예수의 수난을 보았으면 그와 같이 죽어도 옳은 건 옳고 그른 건 그르다 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암만해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가졌던 그 의문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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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군사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강제 폐간된
<씨알의 소리> 폐간호(198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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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복간호(1988년 12월호)
 


개인소견이지만 함석헌 선생님이 살아계셨어도 어찌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근대라는 사회는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을 겪고 있는 중이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중에 ‘근대의 계약’의 한 구절을 옮겨 적음으로 마무리를 해볼까 한다.

“근대성은 일종의 계약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는 날 이 계약에 서명하고, 죽는 날까지 이 계약의 통제를 받는다. 이 계약을 취소하거나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계약은 우리가 먹는 것 우리의 직업 우리의 꿈을 주무르고 우리가 사는 곳, 사랑하는 사람, 죽는 방식을 결정한다.”

선생님의 시대는 여기까지 오는 시대적 과정의 한 과정이었을까? 그러나 선생님은 이 계약을 파기하자고 우리를 향해 외치셨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