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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바람, 여자의 섬

제주도의 독립운동사

(3) 여성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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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의 항일운동


3・1운동 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조금 완화된 문화정치로 후퇴했다 하더라도 사찰과 통제가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찰력을 증강하여 더욱 주밀하게 감시하고 통제했다. 이 때문에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합법공간의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부분의 운동이 거의 존립기반을 상실했다.

이에 적색농민조합운동, 적색노동조합운동 등으로 사회주의적 조직화와 지하화를 통해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혁명화하고자 하였으나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운동방침 상으로는 경제투쟁에 기초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할 것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치투쟁의 기반이 되는 경제투쟁조차도 전개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29년 세계대공황과 1930년 대 이후 전시체제, 이에 따른 일제의 강제동원 및 민족말살정책으로 합법공간이 극도로 축소되어 각지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던 소작인 운동 등의 농민운동은 1930년대 중반 이후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일제의 농산물 강제공출, 노동력의 강제 동원, 군수 농작물의 강제 재배만이 있었다. 1


제주도 항일해녀투쟁은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사회의 제일 낮은 노동자 계층의 해녀들이 자신들의 생존권 투쟁으로서 단결하여 일어난 전국 최대의 항일 여성운동이었다.

제주도 해녀들의 생존문제는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의 공동판매 때 해산물 가격사정, 등급검사, 기타 등의 과정에서 해녀조합의 부정으로 인한 문제로 이미 1920년대부터 문제되어 오고 있었다. 당초 해녀보호 등을 목적으로 1920년 만들어진 해녀조합이 관제조합으로 변했고, 조합은 해녀들의 이익 대신 일본인 무역상이나 해조회사의 이익을 대변하고 공판부정과 자금횡령을 저질렀다.

1930년 9월 들어 해녀투쟁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계기는 정의면 성산포산 석화채를 조합서기가 경쟁 입찰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해녀에게서 매수하려던 것이 발단이 되었다. 1000여 명의 해녀들은 해산물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고 수매 부정행위를 반대하면서 투쟁을 벌였다. 해녀들의 투쟁은 제주도 사회운동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회운동가들은 1930년 11월에는 해녀조합 문제에 대한 격문을 뿌리는 등 힘을 보탰다. 그런 와중에서도 해녀조합은 해산물 수매가격을 낮추고 등급을 부당하게 산정하는 이전 행태를 계속하였다.

1931년 구좌면 하도리에서는 조합에서 생복지정매수인이 매수를 거절하고 조합에서 처치를 해주지 않아 생복이 다 썩고 감탯재는 지정등급변경, 지정가격 인하로 판매가 중지되어 손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1931년 말부터 하도리 해녀들이 중심이 되어 투쟁을 시작했다.

구좌면은 정의면과 함께 제주도 해녀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1932년 해녀 수가 3381명으로 제주도 전체의 약 42%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전부터 어업조합에 대해 불만이 누적되어 왔던 해녀들은 1차로 항의문을 발송했다. 하지만 조합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해녀들은 구좌면 세화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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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성운,「 1930년대 이후 농민운동의 성격」,『 신편 한국사』 50,국사편찬위원회, p.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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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1932년 1월 7일 정오부터 300여 명의 해녀들이 집결하여 호미와 비창을 들고 어깨에는 양식보자기를 메고 하도리에서부터 세화시장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세화주재소의 저지를 뚫었다. 부근 동리의 해녀들도 합세했다. 해녀들은 장을 보러 온 수천 군중들에게 해녀조합의 비행을 고발했다. 끝까지 싸워 승리할 것을 결의했다. 부근 마을 주민들도 합세했다. 시위대는 해녀조합본부를 향해 대열을 지어 나아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세화주재소는 중재를 자청하였다. 해녀들은 주재소에 쇄도하여 대표를 뽑고 해녀들의 항의에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시위 대는 다시 평대리 해녀조합 지부사무소에 가 면장 겸 조합지부장에게 책임지고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마지못해 해녀조합 지부장이 승낙하여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그러나 해녀조합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월 12일 1932년도의 해산물 중 포패류에 대한 지정판매를 한다는 광고문이붙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자 해녀들은 일체의 지정판매를 절대 반대하는 각 동리 연합투쟁을 벌이기로 비밀리에 계획하였다. 각 리에서 해녀회의가 열렸다.

지정판매일인 1월 12일은 세화장날이었다. 마침 그날 제주도사 겸 제주해녀조합장이 구좌면을 통과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해녀들은 구좌면의 하도리・세화리・종달리・연평리, 정의면의 오조리・시흥리의 6개리에서 해녀조합에 대한 일대시위를 하고 도사와 직접 담판하기로 계획하였다.

1월 12일 종달리・오조리 해녀 약 300명, 하도리 300여 명, 세화리 40여 명, 시흥리와 연평리 300여 명이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고 만세를 부르면서 세화장을 점령하였다. 해녀들은 대표를 뽑아 각 리 공동 7개 요구조건과 하도리측의 11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해결을 요구하였다. 도사는 5일내 요구대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해녀들은 5일 이내 완전한 해결이 없으면 더한층 맹렬히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이때 해녀들이 요구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일체의 지정판매 절대 반대
② 일체의 계약 보증금은 생산자가 보관
③ 미성년과 40세 이상 해녀 조합비 면제
④ 병, 기타로 인하여 입어 못한 자에게 조합비 면제
⑤ 출가증 무료급여
⑥ 총대는 리별로 공선
⑦ 조합재정공개
⑧ 계약 무시하고 상인 옹호한 마쓰다 서기 즉시 면직
⑨ 위선적 우량조합원 표창 철폐
⑩ 악덕상인에게 금후 상권을 절대불허
⑪ 가격등급은 지정한 대로 할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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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일보』, 1932. 1. 14~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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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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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박물관(출처:제주해녀박물관 블로그)
 


그러나 응답은 주도 인물에 대한 일제 검거로 돌아왔다. 1월 24일 아침 주도자 20여 명과 그 외 청년 수십 명이 검속되었다. 분노한 해녀들과 주민들은 검거자 탈환투쟁을 벌였다. 1월 26일에는 800여 명의 해녀들이 무장경관대와 충돌하는 등 투쟁을 계속했으나 지도자 다수가 구금되면서 더 이상 계속할수 없게 되었다.

그 후 구금자 대부분이 풀려나면서 최종적으로 해녀 3명만 구속되었고 그 외 구속자들은 모두 제주도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일명 제주도 야체이카) 관계자들이었다. 일제는 제주도 야체이카가 해녀시위를 배후 조종했다고 여기고 이들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러면서 해녀들의 요구를 부분적이나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 지정판매제를 폐지하고 경쟁 입찰에 의한 공동판매를 재개했으며 부정한 조합서기 및 지정 상인을 10년간 조합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50세 이상의 해녀와 미성년자에게는 출가(出稼: 외지로 일 나가는 것)시 조합에 내는 수수료를 면제하였다.

1932년 제주도 해녀투쟁은 연인원 1만 7130명 238회의 집회 및 시위를 전개한 대규모 투쟁으로 우리나라 최대 어민운동이자 1930년대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제주 해녀들이 육지의 어느 지역 여성들보다 스스로 생산하고 생산물을 처분하여 소득을 얻는 경제적 힘을 갖고 있었으며 남성들에게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이며 자립적이었던 데서 가능했다. 게다가 제주 해녀들은 야학이나 조직 활동을 통해 일제하 식민지 조선이 처한 상황과 문제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하던 제주도 인과 직결되어 있었다. 1934년 오사카에서 검거된 겸홍옥은 원래 제주도 해녀였고 “해녀들의 적화에 전심하였다”는 기사처럼3 여성운동가들의 의도적 노력도 다각적으로 작용했다. 4

제주도는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은 3다(多)의 섬이다.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돌과 바람과 여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척박한 생존환경에 있는 돌의 섬이기 때문에 유배문화가 꽃피었다.

돌밭이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려 해도 부릴 수 없어 지주와 소작인 계급의 현격한 분리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제주는 일제하에서도 하나의 공동체로서 굳게 결속하는 특징을 유지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척박한 돌밭이었기 때문에 해외진출에 눈을 돌려 오사카에 ‘작은 제주’ ‘제주나라’를 조성했다. 그것이 좁은 섬 제주를 벗어나 세계를 호흡하는 문이 되어 독립운동 시기와 해방 이후의 제주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

바람에 세고 바람이 먼저 부는 제주도는 역사의 주요 지점에서도 육지보다 먼저 그리고 더 세게 바람이 불었다. 육지에서 의병 시도가 시작되기 전에 시작된 을사의병이 그러했다. 망국을 앞두고 육지에서 1910년 말 독립군 기지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이 시작하기 전에 제주의병은 1909년에 이미 독립전쟁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3・1운동 때도 그러했다. 육지에서 3・1운동이 태동하기 전에 제주도의 법정사 투쟁이 일어났다. 법정사항일운동은 3・1운동의 예고편이었으며 도입부였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제주도인이 선도했다. 최초의 사회주의운동 탄압사건인 <신생활>지 사건에 제주인 김명식이 관계됐다. 일본 오사카에 제주도인의 나라가 형성됨으로써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제주도에 직수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사카  지역의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을 제주인들이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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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산일보』, 1934년 4월 21일.
4.「 잠녀(해녀)투쟁」,『 신편 한국사』 50, 국사편찬위원회, 2002, p.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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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제주도의 선진성이 여성운동에서도 일어났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전시체제가 강화되어 대부분의 항일운동이 침잠해 들어갔을 때 해녀들의 항일투쟁이 일어났다. 일제는 물질하여 생계를 이어가던 제주해녀들의 생존권까지 유린하려다 반발을 샀고 그것은 일제 패망의 문을 여는 서막이었다.

이상 논의의 결론은 제주도 독립운동은 육지보다 뒤떨어지고 육지에 종속적이거나 부수적 또는 추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시기적으로 앞서고 내용적으로 선진적이며 더 투쟁적이었다.

이런 제주 항일독립운동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첫째, 먼저 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즉 독립운동을 조사하고 특히 돌에 새길 만큼 세밀하고 탄탄하게 자료와 내용을 정리하고 돌담장을 쌓고 돌무더기를 쌓듯이 작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쌓아 가야 한다. 구석구석 굽이굽이마다 돌부리 채이듯이 이야기가 발길에 채이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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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돌이 많다
 


둘째,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육지에 앞선 선진적인 것이지만 20만밖에 되지 않는 제주도 인구와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으로 인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거나 지속성을 가진 독립운동이 될 수는 없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셋째,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척박한 돌섬이었기에 제주도 사람들은 바다 건너 제주나라를 개척했다. 고립된 제주의 세계화였다.

넷째, 제주는 세계사의 주요 변동과 함께 하는 역사의 섬이었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은 몽고제국과 항일독립운동은 제국주의 일본과 6・25전쟁 전후의 갈등과 사건은 미소 강대국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지하에 평화라는 공통된 생명수가 흐르고 있다. 제주도의 역사,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의 역사 속에 흐르는 이 평화의 생명수를 길어 올려야 한다. 역사적 사건을 보편적 메시지로 승화시켜 세계화해야 한다. 세계에 주는 메시지로 승화시켜 전파해야 한다.

다섯째, 여자 많은 섬 제주도의 항일기념사업은 ‘여심(女心)’ 즉 제주를 방문하는 전세계 관광객들의 감성을 사로잡아 ‘바람’에 실어 세계로 날려 보내기를 제안한다. 중국 항주 송성의 송성가무쇼, 서안의 섬서가무와 같이 제주의 역사를 장대한 공연물로 만들어 세계인들 가슴에 깊은 감동으로 심는 사업을 해서 제주의 정신을 기리며, 제주의 관광자원화 해야 할 것이다.



<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
-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
- 문학박사
- 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 現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