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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바람, 여자의 섬

제주도의 독립운동사 (2) 바람Ⅱ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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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운동
3·1운동은 거대한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의 무단통치에 질식해 가던 독립정신에 새 생명을 불어 넣었다. 젊은이들은 만주로, 상해로 달려가 독립군과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독립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었고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기념하며 결의를 재다짐 했다. 3·1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그 제한된 자유의 틈새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민족 언론이 출범했고 국어·국사 등의 국학운동과 문학·언론·출판 등의 문화운동, 노동·농민·청년·여성·어린이·형평사 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일제의 민족성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자기 정체성 찾기 작업이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각지 임시정부 통합의 성공은 전제주의를 청산하고 민주공화제 시대로의 전환을 선포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모든 성과와 의미의 바탕에 독립을 성취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희망과 기대가 있었다.

3·1운동이 가진 많은 성과와 의의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독립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3·1운동은 결과적으로 좌절이었다. 그 좌절감.좌절감에 뒤따르는 무력감은 더 은밀하고 더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더 강력한 독립운동 길을 모색하게 했다. 바로 그 시기에 독립운동의 방편으로서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다.

본래 사회주의는 사회를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 농민 등 무산자로 구분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노동이며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노동의 과실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가를 타도하여 노동자 농민의 무산자(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 농민의 사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초기 사회주의 사상은 지식인들의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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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식
 

김명식과 사회주의 수용
이러한 초기 사회주의운동에서도 제주도 출신들이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런 선구적 인물로서 제주 출신의 김명식(金明植, 1892~1943)이 있었다. 그는 와세다대 정치경제과를 나와 사회주의에 대해 대학에서정식으로 공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궤적은 3·1운동 이후 청년운동, 노동운동 등으로 민족운동의 영역이 확대되어가다 사회주의운동으로 나아가는 한국민족운동의 전개와 궤를 같이 한다. 그의 활동을 공훈록을 통해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 김명식(金明植, 1892~1943)
- 제주(濟州) 사람이다.

- 일본 동경의 조도전(早稻田) 대학 정치과 유학 중 1912년 10월 27일 조직된 조선인유학생학우회(朝鮮人留學生學友會)의 간사부장·회장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도자로 참가하였다.

- 2·8독립선언 이후 귀국한 김명식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창립에 참가하였다. 노동공제회는 당시 노동운동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1921년 3월 노동공제회 회장에 선출되면서 노동운동에 앞장을 섰다. 아울러 1920년 6월 28일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朝鮮靑年會聯合期成會)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이어 12월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가 창립될 때 그는 지방부의 일원으로 피선되었다.

그 후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식민지 민족문제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922년 1월 신생활사(新生活社)설립에 참가하여 주필 기자로 활동하였다.

<신생활>은 1922년 3월 11일 창간된 사회주의 계열의 최초의 대중 잡지로 무산대중의 개조와 혁신에 목적을 두고 발행되었다.
<신생활>은 창간호가 나오자마자 발매금지되었는데 1922년 11월 14일자 특집의 <노국(露國)혁명 5주년기념호>가 다시 문제가 되어 발매 금지가 되었다. 이때 ‘러시아혁명기념’이란 논문을 기재한 김명식도 체포되어 1923년 1월 8일, 징역 1년 6월을 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고문후유증으로 1924년 7월 26일 형집행정지(刑執行停止)되었으나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 그는 1927년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의 제주지회장(濟州支會長)으로 활약하였으며, 1929년에는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조선인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검거되었다. 그 결과 그는 1930년 6월 7일 대판형무소에 재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이후에는 잡지 <비판>에 「조선종교론」「민족단체 재건계획에 대하여」 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1
- 공훈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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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훈록
 

김명식의 기고 기사가 문제가 된 신생활지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관련 사건으로서는 최초의 사법사건이었다. 그는 복역중 신병으로 가석방된 후에도 신간회 제주지회장, 오사카에서 노동운동 등의 활동을하다 다시 투옥되는 등2 고난을 겪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3년 서거했다.

1920년대 육지에서 노동쟁의나 소작쟁의가 활발했을 때 제주도에서는 그와 같은 노동쟁의나 소작쟁의가 별로 없고 주로 사회주의적 사상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조직된 ‘반역자구락부’, 그것이 발전된 1925년의 ‘신인회(新人會)’, 1925년 9월에 결성된 제주청년연합회, 1927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연합한 좌우합작의 신간회가 모두 그러했다고 평가된다.3 제주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중심인물들은 신인회 창립멤버들인 강창보(姜昌輔, 용담), 김정노(金正魯, 이도), 오대진(吳大進, 모슬포), 윤석원(尹錫沅, 성내), 김시용(金時容, 조천) 고경흠(高敬欽, 조천), 김택수(金澤銖), 송종현(宋種鉉), 김민화(金民化) 등이다.4

1920년 말을 지나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화한다. 곧 1931년 만주침략,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전시총동원체제로 전환한다. 1920년대 말에는 합법 공간에서의 운동은 민족주의운동이든 사회주의운동이든 불가능해졌다. 이리하여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은 탄압·억압되고 사회주의 운동은 지하화한다. 제주도 사회주의 운동 또한 1928년 7월을 전후하여 제4차 공산당 사건으로 김택수, 송종현, 강창보와 공산단청원회 김정노, 윤석원 등이 구금되면서 신인회 급진분자가 공산당 조직과 직접 연결하여 비합법적 지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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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 2000.
2.「 김명식씨 출옥」,『 삼천리』 11, 1931. 1월호, p. 37. “신생활 사건의 金明植씨 최근대판 형무소에서 잔기(殘期)를 다 마치고 최근에 출옥한 바 좌기처에 체류 중. 대판 동성구(東成區) 저사야(猪飼野) 1203번지”
3.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4
4. 「민족해방 때까지의 투쟁」, 위,『 제주도지』 1(제7장 제2절 3)
5.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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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통합을 이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 9. 17). 앞줄 중앙에 안창호, 다음 줄 맨 오른쪽이 김구 선생이다.
 

공산당 재건운동과
고경흠, 강문석
제4차 공산당 사건으로 괴멸적 타격을 받은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국제적 승인이 취소되어 해방될 때까지 당 재건 운동이 전개되었다. 당 재건운동에서 제주도 출신의 고경흠(高景欽)이 크게 활약했다. 고경흠은 1927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동경에서 이북만(李北滿) 등과 ‘제3전선사(戰線社)’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잡지 <제3전선>을 발행했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FF) 동경지부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가 가입하여 일본총국 출판위원이 되었다. 그 후 제주도에서 검거되자 일본으로 호송도중 고배(神戶)역에서 탈주하여 상해로 갔다.6

당시 상해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전문학교 학생 대표로서 3·1운동을 주도했던 한위건(韓偉健)이 있었다. 한위건은 1930년에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국내 영등포와 일본에 공작원을 파견했다. 그때 일본으로 파견된 공작원이 제주출신의 고경흠이었다. 고경흠은 이듬해 다시 영등포로 잠입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을 조직한 후 다시 일본으로 잠입하여 집필활동을 했다.

동경대에 재학하면서 좌익문필가들의 출판사 무산자사(無産者社)를 운영했던 김삼규(金三奎)는 이 시기 고경흠에 대해 다음과같이 회고했다.

“고경흠은 이론파로서 김민우, 차석동 등의 필명으로 몇 개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래서 고경흠 등은 조선공산당 재던에 관한 출판활동을 ‘무산사’(無産者社)를 통하여 하고 싶다고 위원장이었던 나에게 요구했다. 나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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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5
7. 김삼규,「 개인사 중의 조선과 일본」,『 (朝日選書) 朝鮮と日本のぁぃだ』,1980. p, 24.


고경흠은 1931년 8월에 동경에서 김삼규·한재석·활학노 등과 같이 검거되었다. 그후 고경흠은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졌다.8

제주출신 강문석도 크게 활약했다. 그는 1932년 상해에서 박헌영 등과 상해한인반제 동맹을 결성하고 그 후 국내에서도 박헌영과 함께 공산당 재건을 위해 경성 콤그룹에서 활동했다.9


제주도인의
일본 도항과 사회주의 직수입
사회주의 수용이 본격화 되던 시기 제주-오사카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그것은 제주도가 사회주의 수용의 직항로 개설을 의미하기도 하고 육지에 비해 더욱 진보적일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1910년대 제1차 세계대전 기간(1914~1918)중 일본은 전시 특수경기를 톡톡히 누렸다. 개항 이래 계속되어 온 만성 적자국 상황을 대전 기간 중에 흑자국으로 도약했다. 전례 없는 호황으로 인력 수요가 급증했다. 값싼 조선인 노동력이 환영받았다. 1922년 12월 일제는 한국과 일본 간에 자유 도항제를 실시하고 1923년 12월 15일 제주-오사카간의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이에 따라 이전에 제주도에서 부산, 시모노세키(下關)를 경유하여 오사카로 가는 경우보다 시간은 절반, 배삯은 1/3로 절감되었다. 그 결과 일자리를 구하고자 일본으로 도항하는 제주인이 급증했다. 그리하여 1923년 제주 총인구가 209,925명, 1930년에는 199,577명이었는데, 일본에 잔류하는 제주인의 수는 1926년 28,144명, 1934년에는 50,045명으로 증가하였다. 제주 인구의 4명 중 1명이 일본에 거주하는 셈이었다. 일본으로 진출한 제주인들은 제주-오사카 정기노선의 종착지인 오사카에 집단 거주했다. 오사카부의 조선인 남자 1000명 중 60% 이상이 제주출신이었다. 10 오사카 거주 제주인들은 오사카의 최하층 노동자가 되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거주하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우산제조공장, 메리야스공장, 유리공장, 고무공장, 철공장 등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혹사당했다.

제주도 내에서는 소작쟁의나 노동쟁의가 거의 없었으나 제주인들의 계급적 자각에 입각한 노동운동은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한 제주항일운동사의 서술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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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8
9.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5
10. 조선총독부,「 阪神, 京浜 지방의 조선인 노동자」, 1924, 7


일제시대에 재인 한국인의 3재 직종은 갱부(坑夫)·토공(土工)·직공(職工)이다. 그들은 민족적 차별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일본인으로부터 소외된 생활환경 속에서 신음했다. 따라서 재일 한국인 속의 선각적인 인텔리들은 그들에 대한 민족적 박해를 반대하고 차별적인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당연히 그를 위한 사상적 무기는 사회주의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11

오사카에 있는 제주도민들의 노동운동은 조천 출신의 김문준(金文準, 1893~1936)이 주도했다. 김문준은 제주도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1927년 오사카에 와서 노동조합 간부로서 고무공장 파업투쟁, 판제(阪濟: 오사카-제주)항로의 선임인하운동을 지도하였다. 1930년 전후하여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에 의하여 재일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일본 공산당에 흡수되고, 1925년 2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노총동맹(재일조선노총)도 일본 노동조합전국협의회(全協)에 흡수되었다. 이에 따라 대판 조선노동조합도전협 산하 산업별 노동조합(화학노조, 금속노조 등)에 흡수되었다. 김문준은 1930년에 전협화학노조 대판지부의 책임자로서 고무공장 파업투쟁을 지도하다 검거되었다. 김문준은 그 후 1934년부터 일본 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고 1935년에는 민중일보를 창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 1936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12 이 화학노조에 강항인(姜恒仁, 姜鐵), 김석송(金石松) 등 제주도 출신 간부들이 많았다. 현상호(玄尙好, 송성철(宋性徹) 등도 유명한 제주도 출신 활동가였다.13

현호경(玄好景)은 제주 성산포 출신인데 일본공산당 관서지방위원이며 대판시위원회 책임자였다. 그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포함한 대판 공산당의 최고 간부였다.14 그는 1931년 9월 만주침략 후 일본의 좌익탄압이 강력하게 계속되면서 1933년 240명의 공산당원, 152명의 공청원을 포함하여 1820명의 재인한국인이 검거될 때 체포되었다.15

오사카 한국인 노동자 중 제주도 출신이 60%이상 차지하고, 한국인의 노동운동에서 제주출신 인사가 지도자 역할을 하던 시기에 오사카와 제주 간 직항로는 일본의 사회주의 사상운동과 노동운동이 제주도로 직수입되는 통로가 되었다.

대판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 노동운동에서제주도 출신자가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던 시기는 동아통운조합의 자주운동운동 시기와 겹칠 뿐만 아니라 1932년초의 제주도 해녀 항쟁시기와도 연결된다. 제주도와 대판을 직결하는 판제항로다 두 개 재역간을 사상적 및 조직적으로 연걸하는 파이프의 역할을 수항한 것은 안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16

이 점은 제주도가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일본과 인적, 교통적으로 직통으로 연결되어 육지보다 결코 뒤쳐진 지역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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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8
12.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9
13.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8
14.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9
15. 위와 같음.
16.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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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재일동포 밀집 지역이었던 히라노강변. 벌목된 나무들이 가득하다. 이 하천변에 60년대까지 제재소가 많았다.
 


이 시기 사회주의 사상운동의 선구자인 김명식은 1929년 2월에 오사카로 가족을 이끌고 왔는데,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별건곤> 제24호(1929. 12)에 별건곤 오사카 지사 김용암(金龍岩)이 그를 방문한 기사가 있다.

新生活社의 筆禍事件이후 濟州本第에서 병을 치료하고 게시든 金明植氏가 大阪으로와서 게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바로 얼마전 일이다. 나는 깃부고 반가운 마음으로 선생을 차저 猪飼野町17으로 갓다. 선생은 나를 반기며 마저드러 따뜻한 악수를 하여 주섯다. 京城의 천지가 좁다는 듯이 濶濶大路에서 左馳右走하며 빗나게 활동하시든 선생이 異域의 이 땅에 와서 悶悶한 세월을 보내게 되니 보는 사람이 엇지 感慨之懷가 업스랴. 선생의 宅이 잇는 곳은 우에도 말하엿거 니와 猪飼野町이다. 大阪에서도 가장 공기가 불결하고 지저분한 곳이다.<16> 그러한 곳에서 선생이 셋집으로 어더 들은 집이니까 집꼴이 엇더하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업슬 것이다. 선생의 얼골은 말할 수 업시파리하엿다. 足部手術도 아직 하지 못하고 더구나 耳鳴症이 심하여 말을 잘 알어듯지 못하실 뿐아니라 장시간의 담화는 도저히 불가능하신 모양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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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카이노마치(猪飼野町)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동성구와 생야구에 걸친 이전에 평야천 구도로 우측편 일대 지역으로 제주도인의 제2의 고향이라 불린다.
18. 金龍岩,「 前날 新生活社主幹 金明植氏 訪問記 在外名士訪問記」,『별건곤』 24, 192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