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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바람, 여자의 섬

제주도의 독립운동사 (2) 바람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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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항일운동 기념 의열사
 


바람이 먼저 부는 곳
지난 30년 동안 매년 평균 25.6개의 태풍이 발생했는데, 그 중에서 평균 3.1개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2019년에는 20개의 태풍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 것이 7개나 되었다. 1 태풍이 불어 올 때마다 뉴스에 제일 먼저 제주도가 이야기 된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태풍을 맞는다.

역사의 태풍도 비슷한 것 같다. 제주도는 목포에서 약 100㎞나 떨어진 섬이어서 육지 사람들은 ‘아무래도 모든 문명과 정보가 육지에 비해 뒤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육지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도 한참 후에야 제주도에 파급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제주도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먼저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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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집의계 구국맹약지 현장
 

을사의병과 집의계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리 고립되어 침략과 약탈 앞에 노출되어 있는 섬이다. 1876년 개항하자 제주는 곧 일본인들의 어업침탈에 직면했다. 1879년경부터 일본인들은 가파도와 비양도를 근거지로 하여 잠수기 조업을 하면서 제주도에 상륙하여 도민을 살상하고 가축과 재물을 약탈했다. 21889년 11월에는 <조선일본양국통어규칙(朝鮮日本兩國通漁規則)>이 체결되어 일본어민이 선단을 거느리고 제주도 근해에 합법적으로 출어하게 되고 제주도민들은 이에 반발했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은 해변에 막을 치고 풍기를 문란시키며, 마을에 함부로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항의하면 살상하기도 했다.[3]

이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제의 국권침탈이 더욱 노골화되자 1905년 3월 제주유생 이응호(李膺鎬)・김좌겸・김병로・서병수・김병구・고석구・김석익・김기수・강철호・김이중・강석종・임성숙 등 12지사는 일본인들의 어업침탈을 배격하고자 문연서숙(文淵書塾)에 모여 비밀조직 집의계(集義契)를 조직했다.[4]

제주 12지사들의 집의계 조직은 육지에서 몇 달 후 시작된 을사의병의 선구적 움직임이었다. 그 첫 움직임은 집의계 조직 6개월 후인 그해 9월 원주 동쪽 주천(酒泉)에서 원용석(元容錫, 일명 용팔:容八)・박정수(朴貞洙) 등이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고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의병진은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와 일진회(一進會)의 급습을 받아 해체되었다. 그 후 단양에서 정운경(鄭雲慶)이 단양·제천·영춘 등지의 의병 300~400명을 규합하였으나 역시 원주진위대의 습격으로 정운경·박정수 등 주모자가 붙잡혔으며 의병도 해산 당하였다. 이후 1906년 3월 충남 서해안 일원에서 일어난 민종식(閔宗植)·안병찬(安炳瓚) 등의 홍주의병이 5월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31일 성이 함락될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처럼 을사~병오년으로 이어져간 의병진의 결성과 투쟁에서 제주의 집의대 조직은 그 선구적인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감부 시기의 지방 재편 및 장악과 제주도
일제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탈취하고 보호국으로 만든 뒤 통감부를 설치했다. 그 후 곧 전면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시도했다. 350여 개 부군을 230여 개로 대폭 통·폐합하는 안이었다. 그러나 폐합되는 군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통감부는 이에 더 이상 밀어붙이지 못하고 계획을 철회했다.

이 계획은 조선의 지방사회에 오랜 향촌공동체의 유대를 해체하여 일제의 일방적, 일원적 지배에 순응하게 하고자 한 계략이었다. 이 계획은 병탄 후 조선총독부가 안정을 기한 1914년에야 전국의 지방행정구역 전면적인 개편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계속하여 1917년 조선 면제(面制)의 시행과 면장의 전면적 교체를 통한 친일화, 1918년까지 동리수준까지의 말단 행정구역의 통・폐합을 관철시켜 조선의 지방사회를 장악했다.[5]

그런데 제주의 경우는 그보다 7년 앞서 1907년 통감부가 제주도에 제주, 대정, 정의의 3군을 설치하고, 면리에 존재하고 있던 전통적인 풍헌(風憲), 약정(約正), 존위(尊位), 경민장(警民長) 등을 철폐하였으며, 면장과 이장을 임명했다.6 이와 함께 제주, 대정, 정의의 3군 무기고의 군기를 불태우고 재정, 치안, 재판권을 장악했다. 식민지화의 태풍이 제주도에 먼저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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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상청, 태풍발생현황통계, 1981-2010 및 2019
2. 강만생,「 한말 일본어업의 제주침탈과 도민의 대응」,『제주도연구』3, 1986. 참조
3. 「제주도 어업에 관한 건」,『 일본외교문서』 24; 위『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49에서 재인용.
4. 위 『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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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병 훈련장 황사평(제주천주교 공원묘지 북쪽)
 


독립전쟁과 제주의병
국권의 위기가 계속되고, 대한제국의 행정, 경찰, 사법, 군사권이 다 일제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망국의 위기가 현실화되자 한편에서는 국내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1909년의 제주의병은 주도자 고승천(高承天)이 1908년 7월 제주군수 윤원구(尹元求)로부터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 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했다.

고승천은 김석명(金錫命), 노상옥(盧尙玉)등과 더불어 제주 광양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고, 황사평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재정확보와 동지규합에 나섰으며 고승천, 이중심, 김석명, 노상옥, 조병생, 김재돌, 양남석, 양만평, 김만석, 한영근 등 10명이 창의자로 모였다. 이들은 의병장으로 고천석과 이중심(李中心)을 추대하고, 고승천・이중심・김석명이 격문을 작성하여 2월 25일 제주를 일주하며 돌렸다. 그 내용을 보면, 주민에 대해 각 마을의 이강(里綱)은 “호적에 의하여 주민을 일일이 인솔하여 집결할 것, 이에 거역하는 백성은 이름을 적어 보고할 것이며 통적(統籍) 1부를 지참할것”이라 하여 조직적으로 이민을 동원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2월 25일 공북(拱北)으로부터 시작하여 삼양, 신촌, 조천을 거쳐 대독
(大獨)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통문을 전달할 것을 명시했다.

거사 날짜와 장소는 1909년 3월 3일 제주 읍내 관덕정으로 정하고, 관덕정에서 각 동리별로 인원을 점검할 것이며, 참가하지 않은 이장은 목을 벨 것이라 경고하고 선박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며 선박보유 상황을 보고하게 하였다.[7]

격문을 받은 각 동리는 이장을 중심으로 출병을 준비했다. 창의 지도부는 1만 명의 의병대를 모집하여 일본인을 처단하고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착착 진행되던 중 3월 1일 고승천과 김만석이 체포되고, 그날 이른 아침 광청리에 집결한 의병대와 대정 주재소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으며 출병을 준비하던 신좌면 대흘리와 구우면 두모리 등에서는 출병 준비가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3월 4일 고승천과 김만석이 처형되었다. 다음의 자료는 당시의 각 동리 호응상황을 보여 주는 한 예다.

제주군 구우면(舊右面) 모두리(毛頭里: 두모리의 착오) 이장 김재영(金栽瀅)은 당시 격문에 응하여 즉시 촌민 227명을 소집 수명씩의 단체를 조직 각 통수(統首)를 두고 폭동에 내응(內應)의 준비를 하였다.[8]

비록 이상의 제주의병은 사전에 발각되어 주도자가 처형당하고 막을 내리긴 했지만, 무기제작, 군사훈련 등 제대로 독립전쟁을 준비하고자 한 것으로 육지와 만주의 독립 운동기지건설과 독립전쟁 준비에 앞선 선구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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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정은, 『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pp. 68-78.
6. 김석익, 『 心齋集』,『 제주문화』(영인본), 1990;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69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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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천(사훈) 의병 관련 기사(신한민보, 1909. 4. 14)
 

3・1운동에 앞선 법정사 항일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어 서울 전역과 전국에 퍼져나 갔다. 민족 최고 최대의 3・1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그 5개월 12일 전에 제주도에서 법정사 항일투쟁이 일어났다.[9]

법정사 항일 독립운동의 첫 봉화는 1918년 9월 19일(이날은 음력으로 8월 15일이다) 법정사에서 열린 우란분 행사 때였다. 우란분이란 범어 울라바나(Ullabana)의 음역이며, 분(盆)은 식기를 뜻하는데, 100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죽어서 거꾸로 매달려 고통 받고있는 자의 영혼에 바쳐 구한다는 불교의 의식이다. 보통으로 음력 7월 15일 백중(百衆)날에 행하나 백중날보다 한 달이나 뒤에 열렸다.

경북 영일 출신의 주지 김연일(金蓮日)은 참석한 신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외쳤다. “왜놈이 우리 조선을 병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합 후에도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머지않아 불무황제(佛務皇帝)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들을 섬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불무황제의 명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김연일이 말한 불무황제는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온다는 미륵불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우란분이라는 불교의식을 통해 미륵불의 출현이라는 불교적이며 태을교적인 관념으로 항일의식을 강화한 후 김영일은 33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했다. 33인 결사대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사발을 엎어 놓고 그 원형으로 사발통문식 서명을 하였다. 서명자는 김연일을 비롯하여 그의 조카 김인수, 정규룡 등이 포함되었다. 33인의 결사대원은 민족대표 33인의 숫자와 똑같다.

김연일은 선봉대를 조직했다. 제주출신의 승려 강창규를 선봉대장으로, 또 다른 제주출신의 방동화와, 김연일과 같은 외지 경북 영일출신인 강민수를 좌·우대장으로, 1918년2월에 불교에 입도하여 승려가 된 양남구를 중군대장, 제주출신 김상만을 후군대장, 장임호를 모사(謀士)로 삼았다. 법정사 시위대는 법정사 승려와 법정사 승려가 아닌 다른 사찰의 제주도 현지 출신인 승려들이 지휘부를 형성했다. 여기에 법정사 승려와 신도, 법정사 외부의 승려와 불교도 그리고 박주석으로 대표되는 선도교(仙道敎) 교인들로 이루어진 3개 그룹의 종교인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선도교는 이후에 보천교 또는 태을교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흥종교였다.

10월 4일, 주지 김연일은 법정사 주위의 마을 이장 앞으로 보내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일제를 처단할 기회가 왔으니 10월 7일 새벽 4시에 하원리에 집결하라.” 주민 소집명령이었다. 이와 함께 “제주성을 습격하고 나아가서는, 일제를 제주도에서 추방한다”는 행동계획도 들어있었다.

1918년 10월 7일 새벽, 법정사에 승려와 신도들, 선도교 교인들, 농민들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 10월 4일 이장들에게 격문을 발송한지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일제에 밀고한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주민들도 한 마음이었다. 이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었고, 화승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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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터(일제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주지 김연일의 입에서 포효가 쏟아져 나왔다. “제주도에서 일본인을 몰아내자!”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을 섬 밖으로 몰아내자!” 사람들은 대열을 지어 서귀포로 향해 비탈진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중문에 이르자 그곳 농민들이 합세했다. 수십 명에서 출발한 군중은 4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마을로 내려간 선봉대는 4~5명씩 조를 짜서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마을 구장에게 민적부를 받아 장정들을 행동대원으로 참여시키기도 했다. 시위대는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가는 도중 전선·전주를 절단하였다. 길에서 만나는 일본인을 몽둥이와 돌멩이로 구타하고 일본인과 동행하고 있던 한국인도 구타하였다.

중문지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군중이 70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대는 중문주재소에 쇄도해 들어가 주재소의 집기를 부수고 문서를 불태웠다. 또한 일본인과 개신교 목사를 구타하였으며 주재소에 구금된 농민 13명을 석방시킨 후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오전 11시경 서귀포경찰관과 기마 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출동하여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항일투쟁에 참여한 주도자와 농민들에 대한 검거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 순사대는 법정사를 불태우고 붙잡은 66명 중 31명을 재판에 회부하여 실형을 받게 했다. 항쟁의 중심에 섰던 김연일 등 핵심주체들은 상당기간 동안 체포되지 않았다. 김연일은 1년 5개월의 피신 끝에 1920년 3월에 체포되었다. 강창규는 4년여의 피신 끝에 1922년 12월 27일, 정구용은 1923년 2월 13일이 되어서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김연일은 징역 10년, 강창규(姜昌奎)는 징역 8년, 방동화(房東華)는 징역 6년의 중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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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김연일·강창규·방동화는 법정사 항쟁을 시작하기 전에 인근의 산천단에서 의형제를 맺고, 법정사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며 결의를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법정사 승려들의 강력한 항일투쟁은 이런 결속과 준비과정을 거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

법정사 항일투쟁은 여러모로 3·1운동을 예고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법정사 항일투쟁이 일어난 1918년 하반기는 3·1운동이 발발하기 5개월여 전에 일어난 대중시위운동이다. 대중시위운동으로서 3·1운동의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법정사 항일운동은 33인으로 결사대를 조직했다. 민족대표 33인들도 스스로는 죽음을 각오한 결행으로 생각했었다.

셋째, 법정사 항일운동은 3·1운동 발발 직전에 3·1운동의 배경과 원인을 공유하며 발발했고, 대중시위운동으로서 3·1운동의 성격과 발전방향을 앞서서 보여 주었다.

넷째, 법정사 항일운동은 일제 무단통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에 발붙일 수 없었던 상황에서 종교인들이 종교의 외피를 쓰고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3·1운동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불교와 선도교 등 서로 다른 종교가 종교의 차이를 넘어 하나로 연합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했다는 점 등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이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하고 독립선언에 앞장섰던 것과 똑같은 패턴이었다.

다섯째, 법정사 항일운동은 처음에는 종교집회를 표방하여 집회를 시작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당위성과 결의를 다지다가 시위운동에 나섰으며, 연도의 주민들을 결집, 참여시켜 시위대의 세력을 키우고, 마침내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여 방화, 소각시켰다. 이것은 3·1운동이 평화적인 만세시위에서 출발하여 점차 결집이 가능했던 지역에서 주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면사무소, 주재소의 파괴 방화에 이르는 3·1운동의 전개추세와 궤를 같이 한다. [11]

이와 같이 법정사 항일투쟁은 3·1운동의 전조이자, 3·1운동의 전개양상과 그 추이를 예시하는 모양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태풍이 먼저 부는 제주도의 특징을 가장 현저하게 보여 주며,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약간의 예외적인 사건으로 취급하여 1910년대 독립운동사에서도 누락되고, 3·1운동사에서도 관과되어 왔으나, 이 사건은 3·1운동의 전사(前史)로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사건이라 생각한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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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연일의 법정사는 불교로 위장한 태을교 계통 사람들로 보는 시각도 있다. 태을교는 강증산이 창건한 종교로 훔치교, 또는 태을교로 불렸는데,
1909년 그가 사망한 후 제자들에 의해 선도교, 미륵불교, 무극대도교, 보천교, 증산대도교 등 많은 교파들이 나왔다. 그중 선도교는 강일순 사망 후 제2대 교주인 차경석이 창도하였으며, 1922년에 보천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는 선도교를 비밀결사체로 간주하여 집회를 규제하였다. 선도교는 3.1운동 직전인 1918년에 신도수가 23%나 급증하였다.

11. 한국사연구회,『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지역적 전개』, 경인문화사, 2019 참조

12. 1918년 9월의 시점은 조선의 쌀값 폭등으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이 극대화되었던 시점이었다. 약 1달 전 서울에서는 쌀값의 이상 폭등으로 민생의 위기상황에서 8월 28일 서울의 종로소학교 쌀 염매(廉賣)장에서 시민들의 집단투석, 저항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3.1운동의 대폭발 조짐이 있었다. 이런 조짐이 9월에 제주도 법정사 항일투쟁을 거쳐, 1919년 3월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정은,「 『매일신보』에 나타난 3.1운동 직전의 사회상황」,『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1990; 이정은,『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국학자료원, pp. 115-1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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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3・1운동 만세시위 현장 조천장터 비석거리
 



조천의 3·1만세시위
제주지역의 본격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조천지역에서 일어났다. 조천 만세시위에는 1873년 제주에 유배 온 최익현의 문인으로, 제주도에서 도학(道學)의 제1인자로 꼽히는 김희정(金羲正)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김시우와 그의 형제들인 김시범(金時範), 김시은(金時殷) 그리고 그 형제로서 일본에 유학한 김시학(金時學), 김시학의 아들로서 서울 휘문고보 4학년생이었던 김장환(金章煥)이 중심에 있었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김장환이 경성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휴교령이 내리며 시위 가담자 색출이 강화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3월 16일 제주에 도착했다. 김장환은 숙부 김시범을 찾아뵙고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미 김시범, 김시은은 외지에서 들려오는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있었던 터여서 조카의 이야기를 듣자 향리에서도 만세시위를 결심했다. 김시범, 시은, 장환 가족은 3월 17일 조천의 미모치(味毛峙,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결의하고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지를 규합했다. 이들은 3월 21일 제주도내에서 명망이 높은 김시우의 기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그 제사에 사람들이 의심받지 않고 모일 수 있게 했다. 대형 태극기 4개, 소형 태극기 300개를 준비하고 동지규합을 계속했다.

제1차 시위
3월 21일 아침 조천의 미밋동산에는 14일 주도자와 조천리와 인근 함덕, 신흥, 신촌 등지의 서당생도 등 150여 명이 모였다. 김필원은 창호지에 혈서로 “독립만세”라 써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조천의 서쪽에소 동쪽 미밋동산까지 행진했다.

오후 3시경 미밋동산에 태극기가 높이 휘날렸도,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후 미밋동산을 출발하여 조천의 비석거리까지 대열을 지어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시위대는 제주 읍내로 진출하고자 행진을 계속하다 신촌리에서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조천 주재소의 간다(神田) 순사부장 이하 순사와 보조원 4명이 저지하다 힘이 미치지 못하자 제주경찰서에 응원을 요청하였다. 30여 명의 경찰이 응원출동했다. 3명이 부상하고 13명이 연행되었고, 그 중에 14인 주도자 중 김시범, 김시은, 김용찬, 고재륜, 김영배, 황진식, 김장환, 김경희, 김희수 등 9명이 체포되었다.

제2차 시위
3월 22일 조천장터에서 제2차 시위가 있었다. 백응선, 박두규, 김필원 등이 주도하는 가운데 200여 명이 전날의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신촌을 향해 행진해 가다 출동한 일경에 의해 박두규와 김필원이 연행되면서 해산했다.

제3차 시위
3월 23일 백응선, 김연배, 이문천 등이 주도하는 가운데 검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조천 장터에서 제3차 시위가 일어났다. 이문천은 약 100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함덕리로 진출했다. 함덕리 주민들이 합세하자 시위군중은 800명으로 늘어나 기세를 더했다. 신흥리의 이귀동(李貴童)이라는 여성은 “대한독립 만세, 같이 죽자 만만세!”라고 구호를 외쳤다. 다시 일경이 출동하여 이문천, 백응선 등8명이 연행되고 해산되었다.

제4차 시위
3월 24일 제4차 시위가 일어났다 이날은 조천 장날이었다. 김연배를 중심으로 조천 장터에 1500명이 모여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김연배 등 4명이 출동한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로써 초기 14명의 주도자 모두가 검거되었다. 이에 군중은 해산되고 시위운동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조천의 만세시위는 토착 공동체의 유대가가진 힘을 보여 주었다.

첫째, 토착 양반의 세거지에다 유교적 문화와 사제관계 등이 기반이 된 이 지역 만세시위는 토착 공동체적 결속력이 살아 있는 지역이었다.

둘째, 이런 향촌 공동체의 유대를 바탕으로 14인 주도자들이 조천과 인근주민들을 동원하여 장날이 아닌 날에 만세시위를 거행할수 있었다.

셋째, 이와 같은 결속력과 동원력이 있었기 때문에 조천의 만세시위는 한 번의 만세시 위로 끝나지 않고, 4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시위대는 4차 시위에서 14인의 주도자 중 마지막 사람들이 체포될 때까지 시위를 벌이며 14인 주도자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와 헌신을 보여 주었다.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것은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최익현 문하의 김희정·김시우로 이어지는 위정척사 계통의 유교 사상의 토양과 토착 문중을 중심으로 한 14인의 주도자 그룹에 대한 굳은 신뢰 관계가 일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